저주받은 자, 딜비쉬 - 딜비쉬 연대기 1, 이색작가총서 2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너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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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히 약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복잡다난한 시대기 때문일까. 항상 정도를 걸으면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소위'착한 사람'은 대체로 사람들에게 '바보같다'는 인상을 준다. 오지랖도 넓지, 너부터 잘해, 니가 있고 남이 있지, 이런 충고를 던지면서 불의를 봐도 적당히 외면하고 자기 유리한 쪽으로 일을 슬쩍 끌어당기라고 한다. 딴에는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착한 사람이 보답을 받는 것은 대체로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얘기 아닌가. 

  <저주받은 자, 딜비쉬>는 사악한 마법사 젤레락에게 저주를 받고 백 년 가량이나 몸은 동상으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온 기사 딜비쉬의 이야기다. 딜비쉬는 자신에게 저주를 건 젤레락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악마말 블랙과 함께 떠난다. 11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저주받은 자, 딜비쉬>에는 딜비쉬가 젤레락을 찾아서 떠나는 장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딜비쉬가 젤레락에게 복수하기 위해 둘이 맞닥뜨리는 장면은 딜비쉬 연대기 2편 '변화의 땅'에서 나오는 듯 하다). 

  딜비쉬는 이상한 사람이다. 이상적이라서 이상하다. 악마말인 블랙이 위험을 경고해도 그는 꼭 거기에 뛰어들고 위험을 겪는다. 그의 호기심은 일견 그를 멍청하게 보이게 만든다. 위험한데 왜 뛰어드는가? 딜비쉬에게 충고하는 블랙처럼 나도 그에게 그냥 좀 가던 길이나 가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하지만 딜비쉬는 꿋꿋하다. 젤레락이 산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가씨를 구하려 뛰어들었다가 저주를 받았던 그 때처럼, 딜비쉬는 사방팔방에 뛰어들고 그로 인해 위험을 겪는다. 하지만 착한 일을 해도 그에 대한 대가는 받지 못한다(피해나 안 받으면 다행이다;). 그래도 딜비쉬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나야 재밌지만 이 사람 너무 고생한다. 왜 그는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이런 의문에 대답을 해 준 것이 '피의 정원'이다. 

  딜비쉬는 힘이 있다. 엘프 혈통을 가졌고 엘프 장화를 가졌고 능력있는 기사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큰 힘이 되는 악마말 블랙이 있다. 지옥에서 가져온 비장의 마법(?)도 몇 개 있다. 그러나 인간에서 벗어난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는 마법사 젤레락에게 복수를 하러 가지만 실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복수 못하고 젤레락에게 죽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젤레락이 굳이 찾아와서 그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젤레락에게 복수를 하러 가고, 애꿎은 죽임을 당하려는 아가씨에게 뛰어들고, 사람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한다. 자신의 정의를 위해서. 피하면 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한 길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의 걸음이 늦어질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 쪽에 가는, 그런 사람. 그러면서도 '정의를 위해'라거나 '세계를 위해'라는 거창한 말을 하지 않는다. 딜비쉬는 자신을 기억해준 포타로이 시를 위해 싸우고, 아가씨를 죽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싸우고, 사악한 마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저주를 했기 때문에 복수하려 한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잣대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런 것치고는 묘하게 다른 사람 좋은 일을 하지만. 

  딜비쉬는 멋진 사람이다.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고 무리한 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망설임없이 한다. 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흠조차도 귀엽다. 하지만 딜비쉬와 함께 다니기 때문에 매번 사건에 휘말려 활약해야 하는, 조언을 해도 듣지 않는 딜비쉬 때문에 같이 고생하는 악마말 블랙은 가끔 처량해보인다. 블랙을 위해서도 딜비쉬가 적당히 해 줬으면 싶다. 잘 짜여진 세계관 속에서 굳건한 주인공이 가는 소소한 영웅담 <저주받은 자, 딜비쉬>을 읽다 보면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해서 멍청하게 보였던 딜비쉬가 어느 순간 멋진 딜비쉬로 보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막 웃기거나, 막 손에 땀을 쥐게 하거나, 막 감동적이거나 하는 것은 없다. 전체적으로 건조한 느낌인데 읽고 나면 은은하게 남는다. 음, 그러니까 중세 기사 서사시를 보는 느낌이다.

  


2009.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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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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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날개의 등장인물 소개 인용)
 
1. 조반니노 : 유명한 소설가이나 집안에서는 직업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불쌍한 아버지. 가족들의 무시에 좌절하면서도 cooooool하고자 애쓰는 이 시대 보통 아버지.
 
2.  마르게리타 : 가끔 슬픈 상상으로 아이들의 눈물을 빼고 꿈 때문에 절망하기도 하는, 몽상적이고 현실 감각이 없지만 대략 착한 심성의 어머니.
 
3. 알레르티노 :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튼튼하게 구축하고 있는 '엣지'한 소년. 아버지가 쓴 책을 면전에서 '별로'라고 평가하는, 조반니노에겐 무서운 관찰자이자 경쟁자.
 
4. 파시오나리아 : 몸이 약하다는 걸 무기로 삼는, 영리하고 깜찍하고 '뾰족한'소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엄마, 아빠, 또는 오빠와 동맹을 맺기도 하는 정치가이자 전략가.

  얼마 전, <까칠한 가족>을 함께 읽은 지인들과 작은 토론이 있었다. 발단은 나의 한 마디였다.

  "<까칠한 가족>에서 제일 골때리는 것은 파시오나리아야."

  그러자 지인A가 말했다.

  "난 마르게리타라고 생각해."

  "왜?"

  "파시오나리아는 부모의 성격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대체 마르게리타는 어디서 그런 성격이 온 걸까?"

  지인 B가 덧붙였다.

  "마르게리타가 맞아. '꿈의 포로'를 보고 나는 정말 웃다가 죽을 뻔 했단 말이야."

  나는 파시오나리아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으므로 쉽게 동의를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토론이 일어났다. 이런 류의 토론이 그렇듯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잠정적으로 '제일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마르게리타라고 결정이 났다.

  오늘, 비가 왔다. 비가 오면 우울해지기 쉽다. 나는 이런 날에는 유쾌한 책들을 꺼내서 보곤 하는데, 마침 며칠 전의 토론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까칠한 가족>을 펴들었다.

  <까칠한 가족>은 조반니노(아빠), 마르게리타(엄마), 알베르티노(아들), 파시오나리아(딸) 넷으로 이루어진 가족에게 일어난 짤막한 에피소드를 엮어낸 것이다. 배경은 이탈리아, 그리고 꽤 옛날(저자는 1968년에 사망했다)의 이야기라서 가끔 생소해 보이는 풍경도 있지만 그런 부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저자의 수려한 글솜씨(이 경우에는 유쾌한 글솜씨라고 해야 하는 걸까)와 등장인물들의 강력한 개성(나로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사고방식)이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소재를 배꼽이 튀어나가서 리듬체조를 하다가 다시 굴러들어올 정도의 웃음으로 조리해 낸다. 이 가족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당연한 것을 비틀고, 낯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논리의 비약에 언어의 유희에 초점 흐리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평범한 사건, 아니 평범할 수도 있었던 사건을 거대한 하나의 에피소드로 바꾸어놓는다. 그들은 편을 가르고 전쟁(?)을 하고 말다툼을 하지만 언제나 사이좋다.

  <까칠한 가족>을 읽고 나면 잠시 고민에 빠진다. 이들 중 가장 독특한 사람은 누굴까? 나는 늘 파시오나리아라고 생각했지만(대체로 서평도 파시오나리아의 개성을 높이 사고 있고), 얼마 전의 토론 때문인지 마르게리타가 새롭게 보인다. 음, 확실히 범상치 않다. ...어쩌면 최강자는 마르게리타일지도? 정말이지 읽어도 읽어도 새로운 유쾌함이 흘러나오는 책이다.


2009.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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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조지를 죽였는가 - 양들의, 양들에 의한, 양들을 위한 미스터리 심리 수사극
레오니 슈반 지음, 김정민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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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양들이 잠에서 깨어 풀을 뜯으러 나가보니 들판에는 양치기 조지가 삽에 맞아 내장을 쏟은 채 평온한 얼굴로 죽어 있었다. 양들은 조지가 살해당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들을 잘 돌봐준 좋은 양치기인 조지를 죽인 인간을 찾아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들은 양이다. 도대체 어떻게 양치기 조지를 죽인 인간(혹은 인간들)을 찾아낸단 말인가? 혹 찾아낸다 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알릴까? 

  <누가 조지를 죽였는가>는 사실 조지의 죽음보다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특이한(?) 양들 때문에 시선이 간다. 동물이 탐정이 되어 범인을 찾는 것은 일본추리소설작가인 아카가와 지로의 <얼룩고양이 홈즈>시리즈에서 보긴 했지만, 고양이 홈즈의 파트너는 가타야마 형사이다. 말하자면 얼룩고양이 홈즈가 추리를 하면(이랄까 범인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고 알려주면) 가타야마 형사가 그것을 받아서 행동에 옮기는 식이다. 하지만 <누가 조지를 죽였는가>의 양떼에게 있는 것은 양(그러니까 조지를 양치기로 두고 있는 한 무리의 양들) 뿐이다. 

  이게 또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양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조지의 양들은 보통의 양과는 틀리지만, 그렇다고 양이 아닐 정도로 틀리지 않다. 그들은 양의 프레임 안에서 사건을 수사하고, 양의 프레임 안에서 사건을 해석하며, 양의 프레임 안에서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건수사는 조금쯤 혼잡하고 조각조각 나 있다. 그들은 양이니까. 말하자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화자인 여섯 살 옥희가 어머니와 아저씨의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그러나 독자는 눈치를 채는) 그런 분위기랄까. 양들은 '정의'를 외치지만 실제로 '정의'가 무엇일까는 잘 모른다. 어렴풋이 아는 정도다. 

  도대체 어떻게 양이 수사를 한단 말야, 하고 투덜투덜하면서도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양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조지에 대한 의리이다. "누구도 우리 양치기를 그렇게 빼앗아갈 수는 없어!"라는 강한 신념으로 뭉친 조지의 양들은 조직을 짜서 각자의 맡은 부분을 수사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분업은 역시 딱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양이니까. 하지만 양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들은 가끔 너무 똑똑하다. 

  저자는 후기에서 "양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기만 한 동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사실 양을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나는 그런 것은 잘 모르겠고- 그래서 조지의 양들이 특별한 이유는 아마도 조지 때문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지의 양 중에서 제일 똑똑한 양의 이름은 미스 마플이고 도중에 양떼에 합류한, 한때 서커스에서 일했던 검은 양의 이름은 오델로다. 그리고 절벽 위에 서 있는- 하늘을 좋아하는 양의 이름인 조라는 조라 닐 허스톤(<그들의 눈은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를 쓴 미국 흑인작가. 조지의 양 조라의 얼굴이 검은 것과 은근히 매치가 된다.)과 비슷하고 지도자 리치필드 경의 쌍둥이 양이자 양떼에서 벗어나 세상을 방랑하는 양의 이름은 멜모트인데 이 이름은 어쩐지 찰스 로버트 매튜린의 <유랑자 멜모트>와 닮았다. 이 이름들은 저자 레오니 슈반이 마음먹고 정한 것일테지만, 한편으로는 소설 속의 조지가 양들의 특성을 따서 이런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조지는 양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또 양들에게 유럽을 보내주려 할 정도로 자신의 양들을 아꼈다. 이 상황에서 양들은 EQ와 IQ가 쑥쑥 자라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양들은 풀도 먹고 마을도 내려가고 다른 양과 대화도 나누고 인간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하면서 정보를 모은다. 그에 따라 책이 시작할 때는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 보이던 조지는 평범하지 않은 양치기의 모습이 된다. 양들에게 좋은 양치기였던 조지는 비밀이 있는 남자였고, 조지와 양들이 살던 언덕 근처 마을 사람들에도 비밀이 있었고, 양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의 위치가 바뀌기도 하고, 정신없이 용의자들이 바뀌어서 결국엔 누가 범인인지 모를 지경에 이른다. 

  머리 속이 뱅뱅 고여서 정신줄로 겹매듭을 지은 것 같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범인을 알 수 있을까? 읽으면 읽을 수록 드는 생각은 "그래서 범인이 누구라는 거야? 쟤야? 얘야? 누구야?"이다. 이 때쯤 되면 나는 <누가 조지를 죽였는가>에서 탐정 역을 맡고 있는 것이 양떼라는 것을 잊어버릴 즈음이다. 양의 탈을 쓴 사람(조금 사고방식이 특이한?)이라고 여기게 된달까.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이미 나는 저자의 계략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양떼는 양떼이지 사람이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고 중요한 것을 터무니없이 작게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조지를 죽인 범인이 밝혀지면 허어, 하고 김이 빠진다. 허탈한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처음에 주어졌던 중요한 단서 하나가 양들의 시선 속에서 아주 형편없이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조지를 죽였는가>의 결말은 아주 납득이 안 되는 결말은 아니다. 하지만 척 들어 납득이 되는 결말도 아니다. 어쩐지 허망하다. 범인이 밝혀지는 극적인 과정이 허술한 느낌이다. 미스 마플의 열정적인 추리(삽->채소밭->조지가 저항했다->범인은 XX다)는 양답지만, 그 전에 이어져 온 흐름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그 추리의 계기가 미스 마플의 꿈이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양들은 사랑스러웠고, 양들의 그 평온한 감각과 살인사건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이상한 부조화는 강렬했고, 우왕좌왕하는 양들의 추리와 그들이 본 인간들은 재미있으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하나씩 끌려나오는 단서들은 신기했으며 평범해 보이는 것 뒤에는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든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을 봤다. 조지의 양들은 이제 유럽으로 갈 테고,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것을 보고 맛있는 사과(언덕에 딱 한 그루 있는 너무너무 신 작은 사과가 아닌, 진짜 사과)를 실컷 먹게 될 것이다. 가끔은 조지를 기억도 하겠지. 양들이 하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조지가 우리랑 같이 가야 했는데. 맞는 말이다. 

2009.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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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곡선
고사카이 후보쿠 지음, 홍성필 옮김 / 파라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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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곡선 :

  딱 봐서 뭘 가리키는 단어인지 알 수가 없다. 연애에 곡선이 있다고? 가만 생각하니 연애란 시작할 때부터 점점 높아지다가 어느 순간 사그라드니 그걸 그려놓으면 곡선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연애소설, 혹은 풍자극, 그런 류의 글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뒤쪽의 설명을 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선구자, 고사카이 후보쿠의 단편소설집 : 의학과 생리학, 괴기, 깜짝 놀랄 반전의 기막힌 조합!'

  그러니까 이책이 미스터리 단편 소설집이란다. <연애곡선> 외 12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247p라는 두껍지 않은 책 속에 13편의 단편이 있으니, 단순계산을 해 보면 한 편 당 약 19페이지인 셈이다. 이렇게 짧은데 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이어질까. 두근두근거리면서 책을 폈다.

  깔끔하다. 괴상하고 무섭고 이상하다. 그리고 재미있다.

  짧은 단편들인데도 군더더기없이 쫙 빠져 있는 게, 다른 데 한 눈 팔 필요 없이 결말로 달려가게 만든다.

  각 단편마다 반전이 마련되어 있다. 헉 하고 숨을 들이킨 반전이 있는가 하면 읽으면서 짐작하고 있었기에 덤덤하게 넘어간 것도 있었다. 반전을 짐작하든 짐작하지 못하든, 모두 끝까지 흥미진진해 하면서 읽었다(아, 혈우병 한 편 빼고.).

  '시체양초' 한 편을 빼고는 모두 의학이 어떻게든 엮여 있는데, 의학이란 그저 소재일 뿐이다. 읽으면서 와 닿는 것은 의학의 오묘함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불순물들이다. 광기, 신념, 복수, 욕망, 질투, 장난, 집착, 그런 것들 말이다. 작가인 고사카이 후보쿠는 1890년에 태어났으니 100년 하고도 조금 더 전의 사람이다. 그런데도 13편의 단편은 읽으면서 등줄기가 움찔 떨리게 한다.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지 못하고 옛날 얘기구나 곱씹게 되는 부분도 물론 있다. 하지만 단편 개개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은, <연애곡선>의 사건이 오늘 일어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인간이 품는 감정이야 100년 전이든 지금이든 100년 후든 그것이 그것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가장 소름돋았던 것은 '얼간이의 복수'와 '연애곡선'이다. '연애곡선'은 반전을 짐작하지 못해서 알고서 섬찟했고 '얼간이의 복수'는 반전을 짐작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떨렸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의 말투 때문에 더 소름돋았다. 가만 보면 그렇게 덤덤히 말할 일이 아닌데 화자는 그냥 '옆집 개가 짖었다.'고 말하는 듯이 슬렁슬렁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연애곡선>이라는 책에 담긴 열 세 편의 단편을 꿰뚫은 공통점이다. 흘러나오는 끈적한 감정과 딱딱 끊어주는 서술이 얽혀서 읽을 때는 꿀쩍꿀쩍하게 빠져들게 하고 나올 때는 확 돌아나오게 한다. 짧은 단편들로 이런 느낌을 주다니, 고사카이 후보쿠는 굉장한 사람이다.

 

2009.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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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18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김양미 옮김 / 인디고(글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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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중 하나인 <작은 아씨들>. 

  색감이 예쁜 일러스트가 촘촘이 박힌 이 책은 작고 귀여운데다가 무척 사랑스럽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책이다. 곳곳에 있는 일러스트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책 속 내용과는 별 연관이 없는 일러스트들이라 그저 예쁜 엽서를 책 사이사이에 끼워놓은 느낌이 드는 게 조금 아쉽다.(내용상에는 푸른 드레스인데 흰 드레스로 그려진다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예쁜 그림이라 보고 있자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작은 아씨들>은 어린 시절에 무작정 감탄하며 봤던 이야기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사랑스럽기만 하던 메그, 조, 베스, 에이미, 그리고 로리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아이들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른스러운 메그는 허영이 심한 단점이 있고, 활발한 조는 다혈질이고 제멋대로라는 단점이 있다. 천사같은 베스는 수줍음이 너무 많고, 귀여운 에이미는 철이 없다. 로리 또한 너무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 구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아이들은 귀엽다. 어렸을 적 보았던 것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말이다.

  가끔 등장인물의 말을 빌어서 혹은 서술하는 부분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교훈적인' 이야기가 군데군데 눈에 거슬렸다. '흥 과연 그럴까요'라고 이죽거리고 싶어지는 기분이랄까. 이전에는 참 감탄을 하면서 그래 착한 아이가 되어야지 하고 읽었던 것 같은데.

  책을 읽으며 다섯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이야기는 참 왁자지껄하고, 착한 아이가 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은 '완벽하지 않고 흠이 있고 어딘지 부족한' 아이들이 부딪히고 구르고 보듬고 자라는 모습에 푹 빠져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의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어렸던 나를 떠올리면서 지금의 느낌과 비교해 보기도 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2009.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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