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도쿠 살인 사건 스도쿠 미스터리 1
셸리 프레이돈트 지음, 조영학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천재 여수학자 + 퍼즐 + 수학 + 지적인 미스터리라는 말에 혹해서 두근두근하며 펼쳐본 책.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코지 미스터리라서 좀 당황했다.
 
* 코지 미스터리 Cozy Mystery
: 복선이나 암시를 찾아 헤매는 일 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추리.
  배경은 주로 한적한 시골마을이 많다.
  끔찍한 살인사건보다 평범한 살인사건에 주변인물의 캐릭터, 로맨스와 인생관, 가치관, 감정 등을 강조한다.
  (네이버 검색 참고^^)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싱크탱크에서 일하는 수학자 케이트는 고향 그린빌에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애번데일 교수의 연락을 받고 귀향한다. 애번데일 교수의 퍼즐박물관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고, 퍼즐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땅에 대규모 쇼핑몰이 들어설 계획이 있어 마을은 뒤숭숭하다. 애번데일 교수의 제자 해리는 실종된 상태고, 케이트는 익명의 협박 편지를 받는다. 며칠 후 애번데일 교수가 칼에 찔려 사망하고, 교수의 책상에는 어쩐지 미심쩍은 풀다 만 스도쿠 퍼즐 종이가 놓여 있다. 교수의 전화를 받고 온 케이트는 제 1발견자이자 용의자가 된다. 케이트는 퍼즐박물관을 지키고 애번데일 교수를 살해한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한 것과 달리, 수학 용어는 나오지만 사건과 관계된 것은 아니고, 수학천재라는 건 그냥 설정일 뿐이다. 케이트를 보자면 '어디가 수학천재지?'하는 의문이 든다. 천재라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왕따와 애번데일 교수와의 동질감 같은 부분은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건 해결하는 걸 보면 케이트는 그냥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다.
  이건 미스터리를 조금 식상하게 만든다. 케이트가 두뇌를 이용해서 해결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단서는 해리가 물고 오고, 케이트 없이도 미쉘 서장은 수사를 착착 진행한다. 케이트가 없었어도 결국 살인범은 잡히고 사건은 해결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탐정으로서의 케이트의 존재의의가 희미하다. 그리고 남겨진 스도쿠는 의외로 활약을 하지 못한다.
  해결된 방식도 좀 얼렁뚱땅인 것 같다. 우연의 우연의 우연? 그러나 제시된 미스터리 자체는 초반부를 두근거리며 보게 했다.
 
1. 사라진 배서수표의 행방은?
2. 해리는 어디로 갔을까?
3. 협박 편지를 보내온 사람은?
4. 애번데일 교수를 살해한 사람은?
5. 애번데일 교수 유서의 행방은?
 
  이런 것들이 한데 합쳐져서 대체 뭘까 누굴까 두근두근하게 했다.
 
  미스터리로는 아쉬운 구석이 많지만 이야기는 재미있다. 시골마을 그랑빌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고, 그 곳에 사는 개성 넘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매력적이고 유쾌하다. 개인적으로 프루던스 고모의 캐릭터가 참 강렬했다. 아, 갭스 할머니들도. 그랑빌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좋은 사람들이지만 외부 사람에게 보이는 특유의 폐쇄성이 답답하기도 하다. 특히 신임경찰서장인 미쉘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저래도 괜찮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또, 돌아온 케이트를 반기는 모습들을 보면 무척 친근하다. 시골마을의 폐쇄성은 두렵지만 그 마을 속 사람들은 무척 든든할 거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케이트는 그 마을 출신이기 때문에, 용의자였고 제 1목격자였지만 좀 구경당한 것을 빼고는 별다른 곤욕스런 일을 겪지 않았다. 도리어 미쉘 서장이 욕을 먹었지. "범인이 우리 마을 사람일 리 없어!" 하고.
 
  사람들이 보이는 나름의 인간관계도 재미있지만 그 외에 케이트와 미쉘 서장 사이에 흐르는 로맨스의 기운이나 해리와 케이트가 가지는 동료애는 흥미롭다. 미스터리가 아니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이야기이다. 사실 코지 미스터리라는 것을 알고 읽었다면 실망없이 훨씬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미스터리와 거대한 두뇌싸움은 없지만 시골 마을 사람들의 감성과 일상을 훔쳐보는 듯한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2011.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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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페어
하타 타케히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원제는 <추리소설>.
  개인적으로 엔터테인먼트 느낌이 강했다.
 
  줄거리 :
  공원에서 회사원과 여고생이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회사원은 왼쪽 안구가 도려내진 채고, 현장에는 '불공정한 것은 누구인가?'라고 적힌 책갈피가 발견된다. 범인을 쫓는 속도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어떤 출판사의 문학신인상 수상파티에서 출판사 사람이 샴페인에 든 독을 마시고 죽는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살인과 똑같은 내용의 <추리소설 상권>이 각 출판사에 배달되고, 최저 3천만엔 이상으로 소설을 입찰하라는 범인의 요구가 전달된다. 출판사들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수익 계산을 할 때 3차 살인으로 여대생이 죽고, <추리소설 중권>이 다시 출판사로 배달되어 오며 입찰액은 1억엔으로 늘어나는데.......
 
  속도가 빠르다.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추리소설의 법칙을 깨부수고 있어서 추리소설같지 않은 느낌이다. 범인의 동기는 무엇인가? 범인이 남겨놓은 단서는 무엇인가? 탐정은 꼭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언페어> 속의 범인은 추리소설에서의 '공정성'과 '리얼리티'에 의문을 던진다. 실제로도 범인이 그런 걸 따질까? 추리소설을 읽으며 가끔 생각해 본 일이라서 흥미가 갔다. '추리소설이 현실에서도 가능한가?' 하는 것 말이다.
  사실 <추리소설>로 그런 의문을 던진 것 자체가 범인의 또다른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 계속 범인의 손에 놀아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범행장소를 오픈했으니 '추리로 범인을 알아내지 못했어도' 결국 범인은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결국 범인의 진짜 동기, '잊혀지지 않는, 자살같지 않은, 자살'은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그 자살의 동기는 또 무엇일까?
 
  <언페어>는 말하자면 예고살인을 다루고 있는데, 살인보다는 오히려 출판사와 언론의 행태에 눈이 간다. 대필작가, 책의 질이 아닌 수익으로 따지는 출판사, 조작된 베스트셀러, 인지도를 걱정해 중소출판사가 원고를 요청하면 거절하는 이름난 작가들....... '잘 팔리는 쪽으로' 사실을 각색하여 방송으로 내보내는 언론들. <언페어>를 읽다보면 살인사건은 시청률을 확보해주는 하나의 오락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특히, 살인사건이 더 일어나야 <추리소설>의 몸값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부수가 전부인 출판사들의 모습을 보면 말이다.
  범인의 동기는 혹시, 추악한 출판사 / 언론 /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있었을까? 흥미진진 공들인 <추리소설>의 첫부분과는 달리 끝부분은 아주 김빠지는 내용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걸 보려고 너희들은 살인을 기다렸어?' 하고.
  하지만 나는 범인이 싫다. 어쨌건간에 사람의 목숨을 수단으로 삼은 것도 이해가 안 가고, 사람을 죽이고 있는 건 자기면서 '너희들이 낙찰하지 않아 이 사람은 죽는다.'라고 하는 것도 우습다. 출판사와 언론 등도 살인방조죄 정도라면 범인은 살인자 아닌가. 다시 말해서 살인의 1차 책임은 살인범에게 있다. 자기 책임을 떠넘기는 발언이라 보면서 좀 우스웠다.
 
  이 글에서 범인을 쫓는 건 형사 유키히라 나츠미이다. '쓸데없이 미인, 검거율 1위, 살인 현장에 누워 피해자가 본 마지막 풍경을 느껴보는 행위, 쓰레기통인 집, 괴팍한 성격을 가진 여형사'라는 설정은 만화 혹은 라이트노벨 식의 있음직하지 않은 과장된 캐릭터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요소들이 사건 해결과 관련되는 게 아니라서 쓸데없는 설정으로 느껴진다. 사실 유키히라가 한 건 총을 쏘는 정도......; 그래서인지 소설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만화로 보는 쪽이 훨씬 즐거울 것 같다.
 
  소설을 읽는 중에 얘기가 여기저기 튀어나가서 힘들었다. 마치 영화/드라마 장면전환을 보는 것 같았다. 작가가 원래 극본/각본을 썼다니 어쩔 수 없나. 사실 지금도 내가 이야기를 제대로 읽었나 헛갈린다. 기대한 내용과 좀 다르기도 하고 내 생각과 달리 예고살인에서 오는 긴박감도 떨어지고, 진행에 아쉬운 점도 많아서 별 세 개 반이다.
 
 
 p.s. 부록으로 <언페어> 속에 나오는 책갈피가 같이 온다. '불공정한 것은 누구인가!' + 지문 땡땡땡 
 

 
201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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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좀비 습격사건 휴먼앤북스 뉴에이지 문학선 3
구현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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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작품은, 다른 작품의 전에 위치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이 없었다면 <에이전트 오렌지>는 아마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은 좀비, <에이전트 오렌지>는 초능력자로 소재가 각기 다르지만,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도 흐름도 캐릭터도 비슷하다. 그러나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는 <에이전트 오렌지>와는 달리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은 매우 거칠고 툭툭 튀어나와 있다. 여러 이야기가 저마다 노는 이야기라고 할까. 원하는 것을 모두 넣다보니 이야기의 과잉과 비약이 이루어졌다.
 
  줄거리.
  연인들의 데이트코스, 대성리에 좀비가 나타났다는 글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끈다. 삼류 방송국 리포터와 카메라맨은 대성리 좀비를 촬영하러 갔다가 자신도 좀비가 되고, 그들이 촬영한 좀비 영상은 누군가 모를 사람에 의해 인터넷에 뜬다. 인터넷은 조작영상인가 아닌가로 뜨겁게 달궈지고 사이버수사대 조경감과 최경위는 좀비수사에 나선다.
  택배배달원 호준은 커피숍에서 일하는 연지를 짝사랑한다. 호준이 연지를 바래다 준 날 밤, 대학로에 좀비가 출몰하고 정부는 치명적 바이러스가 대학로에 유포되었다면서 인근지역을 모두 폐쇄하고 군인을 투입한다. 연지가 대학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호준은 연지를 구하러 폐쇄지역에 잠입하려 하려 한다. 도중에 조경감과 최경위, 그리고 장기자와 최기자와 만나서 다섯이서 택배차를 타고 대학로에 잠입하는데......
 
  가독성이 좋다. 영화를 보는 듯 머리 속에 영상이 쭉 펼쳐진다. 재미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에는 무리가 많다. 애초에 대학로에 좀비가 출현한 것이 대성리 좀비가 전염/전파되어서가 아니라면, 극 초반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좀비를 일부러 대학로에 풀었다는 게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이다. 좀비를 제어할 수단이 있다는 것도 특이하다. 그러나 덕분에 좀비에 대한 공포-잘 죽지도 않고 제어할 수도 없고 전염력이 빠르고 등등- 가 많이 없어졌고, 그래서 '굳이 좀비여야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극 초반에 좀비들 각각이 좀비가 된 사연을 설명한 것이다. 좀비도 인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 듯 한데, 이건 글 전체 흐름상 해가 된 것 같다. 인간 혹은 인간이었던 것을 망설임 없이 마구 죽이는 비인간적 행태는 대학로에서 좀비가 되지 않고 숨어있던 사람들이 군인들을 보고 자신을 구출한 줄 알고 나타나자 군인이 그들을 '잠재적 좀비'로 간주, 사살하는 데에서 이미 드러난다. 굳이 좀비들의 인생사를 들려주지 않아도.
 
  이런 것들을 포함하여, 글에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은 느낌이다. 시점도 이 사람 저 사람을 마구 왔다갔다 해서 산만하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건 호준과 연지의 러브스토리일까, 대학로 좀비를 물리치는 사람들의 호쾌한 액션일까, 힘 있는 자들의 논리(박사 vs. 정부)에 휘말려 희생되는 인간(좀비)들의 모습일까, 전쟁(대학로는 일종의 전쟁 상태다)의 비참함일까, 언론과 정부와 기업과 군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들일까?
 
  어쩌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비꼬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호준이 폐쇄지역으로 잠입하기 전에 '대학로 희생자 가족 모임'에게 폐쇄지역에서 사람들을 구출해달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냐고 말했더니 보상금을 노리는 사람 취급을 하며 쫓아내는 부분이 있다. 글 전체에서 가장 불쾌한 부분이었다. 보상금 노리고 거기서 농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두, 그걸 노리고 있는 걸까? 생명보험금을 노리고 가족을 살해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명보험에 드는 사람이 모두 가족을 살해하는 건 아니다. 보상금을 노리고 거기 버틴 가족들이 있을지 몰라도, 가족의 안위와 생사가 걱정되어 버티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고 믿는다. 대학로에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놓아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대학로에 잠입하고 싶어하고 실제로 잠입하려 하는 이가 호준밖에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차라리 호준조차 없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결론은 '작은 악에게는 승리를 거뒀지만 큰 악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 같다. 이 결말은 <에이전트 오렌지>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에이전트 오렌지>의 프로토 타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거칠고 제멋대로인 작품을 싫어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좋은 점수를 주기도 뭣하다.  
 
* 참고로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의 장점은 속도, 액션, 가독성, 유쾌함 정도가 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죽는다. 
  

 
2011.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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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오렌지 휴먼앤북스 뉴에이지 문학선 12
구현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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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리니름 있습니다 )
 
 
 
  이 소설의 제목은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다. 에이전트라는 단어에서 첩보물의 냄새가 나고, 오렌지라는 단어는 상큼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합쳐지면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의 고목을 말려 죽이는데 사용한 고엽제의 이름이 된다. 고엽제는 심한 후유증을 낳는 화학약품인 게 밝혀져서 이후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의 환경과 사람에 가한 어마어마한 폭력, 에이전트 오렌지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책을 읽을 때는 그저 한 편의 잘 나가는 액션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초능력자 노인이 있고, 초능력자 노인을 돕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이 세상을 호도하며 그물을 죄어오고, 한판 대결 끝에 초능력자 노인이 승리하지만 악당의 무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제목을 보면, 이 글에서 의미 있는 것은 사실 배경인 척 깔린 것들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든다. 미국의 실험, 6.25전쟁, 베트남 전쟁, 80년대 학생운동, 라이따이한, 연쇄살인마, 언론의 선정적 보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폭력이다.
 
  책을 덮고 났을 때 기억에 남은 건 초능력자 노인의 괴력이나 악당의 비열함 따위가 아니었다. 노인을 상대로 자극적인 기사들을 써내는 ‘언론’, 미국 기관의 명령에 자국민이 다칠 만한 일일지라도 기꺼이 협조해주는 ‘정부’,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는 광기어린 ‘대중’이 잔상처럼 남았다.
 
  소수의 진실은 보잘 것이 없다. 정 기자는 초능력자 노인의 진실을 밝히려고 주변을 파헤치지만 사건의 실체를 알고서도 기사화하지 않고 잠적한다. 중학생 유나도, 라이따이한 흐우도 정 기자와 함께 잠적한다. 그들은 서류상 죽은 사람이 되어 숨어서 힘을 기른다. 그들은 왜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모든 일이 미국 기관의 손아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길러 싸울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나는 정 기자가 기사를 써도 그 기사는 인쇄-배포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대는 민간인을 대량으로 죽여도 무마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소수의 사람들은 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또한 결국 커다란 힘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진짜라고 믿는 거예요? 지금 이 상황이? 서장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우리가 뭘 믿는가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 안 그래? 힘 있는 친구들이 이게 진짜라고 말하면, 그게 진짜인거야. 그런 게 세상이야. 우리 같은 일개 부속품들은 그렇게 기능하다 한순간에 버림받는 거라고. (p.201)

 
  그래서 정 기자 일행은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대신, 진실을 경험한 소수끼리 힘을 길러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정 기자 일행이, 자신을 지키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대가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을 정 기자 일행의 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다수를 가만히 보면, 그들은 어떤 의견을 참으로 여겨 동의한다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동조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다. 판단을 남에게 미뤄버리고 세간에서 말하는 대로 끌려가는 일이 의외로 많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니 옳겠지.’ ‘저렇게 권력 있는 사람이 옳다고 하니 옳겠지.’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어 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대부분을 얄팍하게 그저 받아들인다.
 
  외눈박이 나라에선 두눈박이가 병신이랬다. 다수가 틀렸을 때 다수결에 따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다수는 언제나 옳은가?
 
  자신이 스스로 연쇄살인범을 따라 나간 게 아니라, 연쇄살인범이 반장을 찾자 반친구 모두가 자신을 보고 그 중 친구가 자신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밀려났다는 유나의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연쇄살인범들이 자신을 지목하지 않아 안심했고 이 살인행각이 얼른 끝나기를 빌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나의 등을 슬쩍 밀었다. 하지만 유나가 돌아왔을 때, 친구들은 유나를 반친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려 한 영웅으로 생각했다. 자신들이 유나를 연쇄살인범에게 밀어 넣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유나와 같은 반친구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고, 어떤 종류의 폭력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다수의 마법이랄까.
 
  <에이전트 오렌지>에서는 ‘장난’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특이한 것은 장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항상 가해자라는 점이다. 9명의 사람을 교실에서 고깃덩이로 저며 놓은 연쇄살인범도, 누가 더 많은 베트콩을 죽이나 겨루자고 말한 조지 랜돌프도, 그것에 의한 한국 군인도. 유나가 진심으로 반친구들에게 그날의 일을 따졌다면, 그들도 유나에게 그건 별거 아닌 장난 같은 일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폭력은 도처에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다양한 폭력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쟁, 살인, 차별. 그리고 직접 폭력을 쓰지는 않더라도, 폭력적인 행위를 묵과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폭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동조이고, 방관이고, 그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세상을 보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살아남으려 발버둥 쳐봐도 언젠간 누구나 죽고 이렇게 헤어지는 거니까요. 그러니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게 더 중요한 문제예요. (p.173)
 


  그리고 <에이전트 오렌지>는 소수의 모습도 보여준다. 폭력을 당하는 소수, 그리고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 다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소수의 모습을 말이다.
 
  정 기자 일행은 스스로 움직였다. 그들의 앞날이 밝을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그들의 모습은 어쩐지, 바위를 향해 돌진하는 계란이나, 불꽃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 할일을 결정했다. 결과가 어떻더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는 문제가 아니라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느냐의 문제다. 많은 사람이 그걸 잊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잊고 있었다.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생각을 해야겠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을 막을 수는 없지만, 하나의 폭력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주변에 따라가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는 행동이 아주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쏟은 내 노력도 아주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 
  
  
  
   


2011.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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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 화장 시리즈 2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단편집.
  <회귀천 정사>에 이은 '화장 시리즈' 단편 3편과, '양지바른과 사건부' 3편이 실려 있다.
  '화장 시리즈'를 읽으면서 계속 소화가 안 되는 것처럼 속이 거북했다. 이 글에 기본으로 깔린 정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반복되는 미(美)적인 강조도 불편했다. 나는 탐미라는 장르를 안 좋아한다.
 
 
* 붉은 꽃 글자
: 나는 친구이자 같은 물리학도인 미즈사와와 놀러갔다가 어릴 적 헤어진 여동생 미쓰를 우연히 만난다. 미즈사와는 미쓰에게 마음이 있는 눈치를 보인다. 나는 미즈사와와 미쓰가 밀회하는 것을 안다. 미즈사와는 약혼녀가 있고, 나는 미쓰를 추궁한다. 미쓰는 미즈사와와 연락을 끊지만 이미 미쓰는 임신한 상태였다. 어느 날 나는 미쓰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나는 미즈사와를 찾아가는데......
-> 반전이 인상적인 단편. 이미지가 굉장히 선명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야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나'가 약혼녀가 있으면서 미쓰를 꼬여내는(마지막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싶다나--;) 미즈사와는 내버려두고 미쓰만 질책하는 점, 피가 안 섞였다고는 하나 미쓰의 유혹에 거리낌없이 잠자리를 하는 '나', 그리고 수면제 먹고 자는 동안 미즈사와와 몸을 섞은 게 미즈사와 약혼녀에게 사죄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미쓰.... 납득이 가거나 공감이 가는 감정이 없다. 탁 까놓고 '나쁘지만 어쩔꺼야' 이러면 차라리 속 시원할 텐데, '나쁘지만 나쁘지 않아 이건 아름다운 것'하는 식으로 보여주려 해서 더 일그러져 보인 것 같다. 미쓰가 미즈사와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모르겠고, 미즈사와는 실제로 미쓰에게 무슨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고. 보여주기 위해 연극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 느낌이라고 할까, 그들의 감정을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게 이상해보이기만 하는데, 이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가?
 
 
* 저녁싸리 정사
: 어릴 적 나는 길을 잃었다가 싸리꽃을 든 여인과 학생복을 입은 남자를 만나, 등불을 건네받고 여인이 떨군 싸리꽃을 따라 돌아간다. 그는 며칠 뒤, 여인과 남자가 같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 커서도 저녁싸리 정사라 명명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인(다지마 유우)와 동반자살한 남자, 미하기 신노스케가 쓴 저녁싸리 일기를 읽고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나는 사건 이면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 이것도 반전이 있음. '알려진 것과는 다른 진실'이라는 점에서 붉은 꽃 글자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이 글을 읽고 제일 궁금해진 건, 이 사건을 과연 정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유우는 신노스케를 만나기 전부터 자살할 계획이 있었다. 말하자면 자살의 이유가 '신노스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아닌 셈이다. 유우는 오래도록 죽고 싶어했으니까. 유우의 계획에 신노스케가 그냥 딸려간 셈. 쓸쓸해서 누구라도 데려가고 싶었던 건가.
  유우는 신노스케를 사랑한 걸까? 유우는 신노스케와 절대 몸을 섞지 않는다. 장지문 너머로 쓰다듬을 뿐이다. 그 모습은 나에게 유우가 신노스케를 좋아한 걸까 하는 의문을 심어줬다. 그녀에게서는 '같이 죽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의 뜻도 존중해줘야 할 것 같은데... 으음. 유우가 신념을 갖고 신노스케를 배신했다면 모르겠지만, 유우는 그냥 다지마 노리부미의 말에 따라 다지마가 신노스케의 계획을 역이용하려는 것을 묵과했다. 이런 저런 것들이, 유우의 사랑을 의심하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녁싸리 정사>에 실린 '화장 시리즈' 중에서 제일 알기 쉽고 명확한 캐릭터는 다지마 노리부미였다. 최소한 이 사람을 보면서 답답하진 않았다. 비열하거나, 음흉하거나, 뭐 그런 감정은 들었을지라도.
 
 
* 국화의 먼지
: 다기리 시게타로가 저녁 7시경 방에서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한다. 그러나 '나'는 다기리의 부인 세쓰가 6시경 군인 남자와 집에서 만나는 걸 봤고, 피에 젖은 국화꽃과 실밥은 다기리의 방 이외의 곳에서 발견했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다기리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 작품 말미, 다기리 세쓰의 논리를 들으며 좀 무서웠다. 맹목인 '무사의 피'에 대한 집착과 증오라니. 그녀의 논리는 꽤나 전체주의적이고, 개인의 감상이라기보다는 어떤 집단의 감상 같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초반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소식이 나온다) 더 불편했다.
    <저녁싸리 정사>에서는 '바람은 피웠지만 몸은 떳떳한' 유부녀가 나왔다면, <국화의 먼지>에서는 '바람은 피웠지만 목적 달성(아이갖기)을 위해서지 마음은 떳떳한' 유부녀가 나온다. 몸과 마음 중 하나는 무조건 지켜줘야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라는 소재가 등장한 것에 좀 변명하는 느낌이랄까. 거기서 이 글이 사실 꽤나 옛날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 때문에 연극적이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읽고 느낀 것은 '화장 시리즈'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히기는 잘 읽히는데 읽을수록 불편하다.
  그래서 뒤쪽의 '양지바른과 사건부' 단편 3편이 반가웠다.
  유머 미스터리라고는 하는데 딱히 아주 우스운 것은 아니고, 느낌이 코메디라기 보다는 시트콤 쪽에 가깝다.
 
 
* 하얀 밀고
: 사회부 기자가 모텔에서 독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신문사 분위기는 어수선해지만 자료부 2과(속칭 양지바른 과) 4인방 시마다 과장, 아이코, 로쿠스케, 쇼타는 평화롭다. 한 통의 밀고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 밀고 전화는 범인이 사회부 시즈타라고 밝히고, 그 이후 270통의 밀고전화가 신문사 각 부서로 쏟아진다. 그 와중 아이코는 자신과 사귀는 와시즈 타로가 범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데......
-> 우왕좌왕하는 양지바른과 사람들이 귀여웠다. 가장 흥미가 간 사건. 아무래도 사건이 양지바른 과 사람들과 관계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어지는 2편 단편의 서막.
 
* 네잎클로버
: 쇼타가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었던 인기 가수 '리리와 루루'의 리리가 살해당한다. 동시에 리리의 쌍둥이자매가 있지 않을까 하는 설이 사실로 밝혀지는데... 그 진상은?
-> '하얀 밀고'에서 시작된 아이코의 심리 복잡한 연애 얘기가 리리 살인사건보다 관심이 갔다. '하얀 밀고'처럼 직접 범인을 잡지 않아서 그런지 상당히 루즈한 느낌? 밝혀진 진실은 꽤 재미있고 어느 정도 블랙코미디 같다.
 
* 새는 발소리도 없이
: 한 여인이 로쿠스케에게 대신 전화를 걸게 시킨다. 철 뇌조의 행방을 준코라는 여대생이 알고 있다고 밀고하는 내용. 그러나 밀고한 여자가 준코라는 게 밝혀지고, 준코 자신은 철 뇌조의 행방을 모른다고 진술한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미행당하는 준코, 준코가 사는 집에서 속옷을 계속 훔쳐가는 도둑, 그러다 준코가 길에서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 아이코의 연애 3편...도 있지만 로쿠스케와 도망간 부인의 얘기도 나온다. 전편에 비해서 미스터리가 좀 복잡해진 느낌. 하지만 양지바른과 사람들의 일상이 사건보다 관심이 가는 건 여전하다. 양지바른과는 결국 해피엔딩^^ ...중년의 가을을 느끼는 시마다 과장만 빼고.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막 재미있지는 않은데, 기분전환하기 괜찮았다. 사람 성격이 유쾌하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다들 나름 귀엽다. 시대배경은 현대기는 한데 현재보다는 좀 옛날이라는 느낌...
  이 시리즈는 사건보다는 양지바른과 사람들의 일상에 더 관심이 간다. 기본적으로 양지바른과 사람들이 심각하게 개입되어 있지도 않고, 사건의 해결이 본업도 아니라서 그런 듯 하다.
 
  하지만 렌조 미키히코의 다른 글을 다시 읽지는 않을 것 같다. 
  
 

 
201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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