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 오렌지 휴먼앤북스 뉴에이지 문학선 12
구현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미리니름 있습니다 )
 
 
 
  이 소설의 제목은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다. 에이전트라는 단어에서 첩보물의 냄새가 나고, 오렌지라는 단어는 상큼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합쳐지면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의 고목을 말려 죽이는데 사용한 고엽제의 이름이 된다. 고엽제는 심한 후유증을 낳는 화학약품인 게 밝혀져서 이후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의 환경과 사람에 가한 어마어마한 폭력, 에이전트 오렌지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책을 읽을 때는 그저 한 편의 잘 나가는 액션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초능력자 노인이 있고, 초능력자 노인을 돕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이 세상을 호도하며 그물을 죄어오고, 한판 대결 끝에 초능력자 노인이 승리하지만 악당의 무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제목을 보면, 이 글에서 의미 있는 것은 사실 배경인 척 깔린 것들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든다. 미국의 실험, 6.25전쟁, 베트남 전쟁, 80년대 학생운동, 라이따이한, 연쇄살인마, 언론의 선정적 보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폭력이다.
 
  책을 덮고 났을 때 기억에 남은 건 초능력자 노인의 괴력이나 악당의 비열함 따위가 아니었다. 노인을 상대로 자극적인 기사들을 써내는 ‘언론’, 미국 기관의 명령에 자국민이 다칠 만한 일일지라도 기꺼이 협조해주는 ‘정부’,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는 광기어린 ‘대중’이 잔상처럼 남았다.
 
  소수의 진실은 보잘 것이 없다. 정 기자는 초능력자 노인의 진실을 밝히려고 주변을 파헤치지만 사건의 실체를 알고서도 기사화하지 않고 잠적한다. 중학생 유나도, 라이따이한 흐우도 정 기자와 함께 잠적한다. 그들은 서류상 죽은 사람이 되어 숨어서 힘을 기른다. 그들은 왜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모든 일이 미국 기관의 손아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길러 싸울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나는 정 기자가 기사를 써도 그 기사는 인쇄-배포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대는 민간인을 대량으로 죽여도 무마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소수의 사람들은 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또한 결국 커다란 힘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진짜라고 믿는 거예요? 지금 이 상황이? 서장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우리가 뭘 믿는가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 안 그래? 힘 있는 친구들이 이게 진짜라고 말하면, 그게 진짜인거야. 그런 게 세상이야. 우리 같은 일개 부속품들은 그렇게 기능하다 한순간에 버림받는 거라고. (p.201)

 
  그래서 정 기자 일행은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대신, 진실을 경험한 소수끼리 힘을 길러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정 기자 일행이, 자신을 지키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대가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을 정 기자 일행의 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다수를 가만히 보면, 그들은 어떤 의견을 참으로 여겨 동의한다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동조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다. 판단을 남에게 미뤄버리고 세간에서 말하는 대로 끌려가는 일이 의외로 많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니 옳겠지.’ ‘저렇게 권력 있는 사람이 옳다고 하니 옳겠지.’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어 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대부분을 얄팍하게 그저 받아들인다.
 
  외눈박이 나라에선 두눈박이가 병신이랬다. 다수가 틀렸을 때 다수결에 따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다수는 언제나 옳은가?
 
  자신이 스스로 연쇄살인범을 따라 나간 게 아니라, 연쇄살인범이 반장을 찾자 반친구 모두가 자신을 보고 그 중 친구가 자신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밀려났다는 유나의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연쇄살인범들이 자신을 지목하지 않아 안심했고 이 살인행각이 얼른 끝나기를 빌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나의 등을 슬쩍 밀었다. 하지만 유나가 돌아왔을 때, 친구들은 유나를 반친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려 한 영웅으로 생각했다. 자신들이 유나를 연쇄살인범에게 밀어 넣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유나와 같은 반친구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고, 어떤 종류의 폭력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다수의 마법이랄까.
 
  <에이전트 오렌지>에서는 ‘장난’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특이한 것은 장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항상 가해자라는 점이다. 9명의 사람을 교실에서 고깃덩이로 저며 놓은 연쇄살인범도, 누가 더 많은 베트콩을 죽이나 겨루자고 말한 조지 랜돌프도, 그것에 의한 한국 군인도. 유나가 진심으로 반친구들에게 그날의 일을 따졌다면, 그들도 유나에게 그건 별거 아닌 장난 같은 일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폭력은 도처에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다양한 폭력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쟁, 살인, 차별. 그리고 직접 폭력을 쓰지는 않더라도, 폭력적인 행위를 묵과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폭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동조이고, 방관이고, 그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세상을 보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살아남으려 발버둥 쳐봐도 언젠간 누구나 죽고 이렇게 헤어지는 거니까요. 그러니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게 더 중요한 문제예요. (p.173)
 


  그리고 <에이전트 오렌지>는 소수의 모습도 보여준다. 폭력을 당하는 소수, 그리고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 다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소수의 모습을 말이다.
 
  정 기자 일행은 스스로 움직였다. 그들의 앞날이 밝을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그들의 모습은 어쩐지, 바위를 향해 돌진하는 계란이나, 불꽃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 할일을 결정했다. 결과가 어떻더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는 문제가 아니라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느냐의 문제다. 많은 사람이 그걸 잊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잊고 있었다.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생각을 해야겠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을 막을 수는 없지만, 하나의 폭력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주변에 따라가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는 행동이 아주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쏟은 내 노력도 아주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 
  
  
  
   


2011. 7. 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