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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 ㅣ 화장 시리즈 2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단편집.
<회귀천 정사>에 이은 '화장 시리즈' 단편 3편과, '양지바른과 사건부' 3편이 실려 있다.
'화장 시리즈'를 읽으면서 계속 소화가 안 되는 것처럼 속이 거북했다. 이 글에 기본으로 깔린 정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반복되는 미(美)적인 강조도 불편했다. 나는 탐미라는 장르를 안 좋아한다.
* 붉은 꽃 글자
: 나는 친구이자 같은 물리학도인 미즈사와와 놀러갔다가 어릴 적 헤어진 여동생 미쓰를 우연히 만난다. 미즈사와는 미쓰에게 마음이 있는 눈치를 보인다. 나는 미즈사와와 미쓰가 밀회하는 것을 안다. 미즈사와는 약혼녀가 있고, 나는 미쓰를 추궁한다. 미쓰는 미즈사와와 연락을 끊지만 이미 미쓰는 임신한 상태였다. 어느 날 나는 미쓰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나는 미즈사와를 찾아가는데......
-> 반전이 인상적인 단편. 이미지가 굉장히 선명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야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나'가 약혼녀가 있으면서 미쓰를 꼬여내는(마지막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싶다나--;) 미즈사와는 내버려두고 미쓰만 질책하는 점, 피가 안 섞였다고는 하나 미쓰의 유혹에 거리낌없이 잠자리를 하는 '나', 그리고 수면제 먹고 자는 동안 미즈사와와 몸을 섞은 게 미즈사와 약혼녀에게 사죄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미쓰.... 납득이 가거나 공감이 가는 감정이 없다. 탁 까놓고 '나쁘지만 어쩔꺼야' 이러면 차라리 속 시원할 텐데, '나쁘지만 나쁘지 않아 이건 아름다운 것'하는 식으로 보여주려 해서 더 일그러져 보인 것 같다. 미쓰가 미즈사와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모르겠고, 미즈사와는 실제로 미쓰에게 무슨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고. 보여주기 위해 연극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 느낌이라고 할까, 그들의 감정을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게 이상해보이기만 하는데, 이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가?
* 저녁싸리 정사
: 어릴 적 나는 길을 잃었다가 싸리꽃을 든 여인과 학생복을 입은 남자를 만나, 등불을 건네받고 여인이 떨군 싸리꽃을 따라 돌아간다. 그는 며칠 뒤, 여인과 남자가 같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 커서도 저녁싸리 정사라 명명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인(다지마 유우)와 동반자살한 남자, 미하기 신노스케가 쓴 저녁싸리 일기를 읽고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나는 사건 이면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 이것도 반전이 있음. '알려진 것과는 다른 진실'이라는 점에서 붉은 꽃 글자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이 글을 읽고 제일 궁금해진 건, 이 사건을 과연 정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유우는 신노스케를 만나기 전부터 자살할 계획이 있었다. 말하자면 자살의 이유가 '신노스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아닌 셈이다. 유우는 오래도록 죽고 싶어했으니까. 유우의 계획에 신노스케가 그냥 딸려간 셈. 쓸쓸해서 누구라도 데려가고 싶었던 건가.
유우는 신노스케를 사랑한 걸까? 유우는 신노스케와 절대 몸을 섞지 않는다. 장지문 너머로 쓰다듬을 뿐이다. 그 모습은 나에게 유우가 신노스케를 좋아한 걸까 하는 의문을 심어줬다. 그녀에게서는 '같이 죽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의 뜻도 존중해줘야 할 것 같은데... 으음. 유우가 신념을 갖고 신노스케를 배신했다면 모르겠지만, 유우는 그냥 다지마 노리부미의 말에 따라 다지마가 신노스케의 계획을 역이용하려는 것을 묵과했다. 이런 저런 것들이, 유우의 사랑을 의심하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녁싸리 정사>에 실린 '화장 시리즈' 중에서 제일 알기 쉽고 명확한 캐릭터는 다지마 노리부미였다. 최소한 이 사람을 보면서 답답하진 않았다. 비열하거나, 음흉하거나, 뭐 그런 감정은 들었을지라도.
* 국화의 먼지
: 다기리 시게타로가 저녁 7시경 방에서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한다. 그러나 '나'는 다기리의 부인 세쓰가 6시경 군인 남자와 집에서 만나는 걸 봤고, 피에 젖은 국화꽃과 실밥은 다기리의 방 이외의 곳에서 발견했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다기리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 작품 말미, 다기리 세쓰의 논리를 들으며 좀 무서웠다. 맹목인 '무사의 피'에 대한 집착과 증오라니. 그녀의 논리는 꽤나 전체주의적이고, 개인의 감상이라기보다는 어떤 집단의 감상 같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초반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소식이 나온다) 더 불편했다.
<저녁싸리 정사>에서는 '바람은 피웠지만 몸은 떳떳한' 유부녀가 나왔다면, <국화의 먼지>에서는 '바람은 피웠지만 목적 달성(아이갖기)을 위해서지 마음은 떳떳한' 유부녀가 나온다. 몸과 마음 중 하나는 무조건 지켜줘야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라는 소재가 등장한 것에 좀 변명하는 느낌이랄까. 거기서 이 글이 사실 꽤나 옛날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 때문에 연극적이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읽고 느낀 것은 '화장 시리즈'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히기는 잘 읽히는데 읽을수록 불편하다.
그래서 뒤쪽의 '양지바른과 사건부' 단편 3편이 반가웠다.
유머 미스터리라고는 하는데 딱히 아주 우스운 것은 아니고, 느낌이 코메디라기 보다는 시트콤 쪽에 가깝다.
* 하얀 밀고
: 사회부 기자가 모텔에서 독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신문사 분위기는 어수선해지만 자료부 2과(속칭 양지바른 과) 4인방 시마다 과장, 아이코, 로쿠스케, 쇼타는 평화롭다. 한 통의 밀고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 밀고 전화는 범인이 사회부 시즈타라고 밝히고, 그 이후 270통의 밀고전화가 신문사 각 부서로 쏟아진다. 그 와중 아이코는 자신과 사귀는 와시즈 타로가 범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데......
-> 우왕좌왕하는 양지바른과 사람들이 귀여웠다. 가장 흥미가 간 사건. 아무래도 사건이 양지바른 과 사람들과 관계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어지는 2편 단편의 서막.
* 네잎클로버
: 쇼타가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었던 인기 가수 '리리와 루루'의 리리가 살해당한다. 동시에 리리의 쌍둥이자매가 있지 않을까 하는 설이 사실로 밝혀지는데... 그 진상은?
-> '하얀 밀고'에서 시작된 아이코의 심리 복잡한 연애 얘기가 리리 살인사건보다 관심이 갔다. '하얀 밀고'처럼 직접 범인을 잡지 않아서 그런지 상당히 루즈한 느낌? 밝혀진 진실은 꽤 재미있고 어느 정도 블랙코미디 같다.
* 새는 발소리도 없이
: 한 여인이 로쿠스케에게 대신 전화를 걸게 시킨다. 철 뇌조의 행방을 준코라는 여대생이 알고 있다고 밀고하는 내용. 그러나 밀고한 여자가 준코라는 게 밝혀지고, 준코 자신은 철 뇌조의 행방을 모른다고 진술한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미행당하는 준코, 준코가 사는 집에서 속옷을 계속 훔쳐가는 도둑, 그러다 준코가 길에서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 아이코의 연애 3편...도 있지만 로쿠스케와 도망간 부인의 얘기도 나온다. 전편에 비해서 미스터리가 좀 복잡해진 느낌. 하지만 양지바른과 사람들의 일상이 사건보다 관심이 가는 건 여전하다. 양지바른과는 결국 해피엔딩^^ ...중년의 가을을 느끼는 시마다 과장만 빼고.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막 재미있지는 않은데, 기분전환하기 괜찮았다. 사람 성격이 유쾌하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다들 나름 귀엽다. 시대배경은 현대기는 한데 현재보다는 좀 옛날이라는 느낌...
이 시리즈는 사건보다는 양지바른과 사람들의 일상에 더 관심이 간다. 기본적으로 양지바른과 사람들이 심각하게 개입되어 있지도 않고, 사건의 해결이 본업도 아니라서 그런 듯 하다.
하지만 렌조 미키히코의 다른 글을 다시 읽지는 않을 것 같다.
2011.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