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바 전설 살인사건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우치다 야스오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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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세 개 반.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no.1.

 

  고토바 법황이 유배된 길을 따라 여행하던 여인 쇼호지 미야코가 역에서 살해당한다.

  본청에서 온 기리야마 경감과 갈등을 겪는 노가미 형사는 피살당한 장소에 오기까지 쇼호지의 여정을 조사하다가, 그녀가 대학생일 적 친구와 함께 같은 길을 한 번 여행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목격자인 도미나가 다카오를 만나 쇼호지 미야코의 짐 중에서 녹색 천 커버의 책이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기리야마 경감은 그의 발견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수사가 답보상태에 머무는 가운데 도미나가 다카오 또한 살해당하는데......

 

  1982년 책이라 그런지 꽤 고풍스럽다. 소설을 읽다보면 고토바 법황 유배길에 얽힌 전설이 꽤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일본사를 모르다보니 나야 그랬나보다 싶지만 만약 그에 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속도감은 없고, 상당히 한적한 분위기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시골역이 배경이고, 형사 혼자 정보를 찾아 돌아다니는 장면이 꽤나 많아서 그럴까.

 

  범행 자체는 센세이널하지만(역 한 가운데 뻥 뚫린 곳에서 사람이 살해당했으니) 기발하거나 잔인하지는 않다. 다만 이 사건에는 의아한 구석이 많다.

 

  1. 사라진 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2. 미야코는 왜 집으로 가던 도중 방향을 틀어 이 역으로 내려왔는가?

  3. 범인은 어떤 방식으로 도주했는가?

  4. 범인은 왜 그녀를 살해했는가? 

  5. 범인은 누구인가?

 

  노가미 형사는 차근차근 발품을 팔아가며 정보를 모은다. 책 초반의 주인공은 그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책 중반, 아사미 미쓰히코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탐정치고는 꽤나 늦은 등장이다. 총 378p 중에서 아사미는 138p가 되어서야 등장하고, 곧 사라졌다가, 196p가 되어서야 다시 등장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돕기 시작하니까 말이다.

 

  장편 추리소설이 으레 그렇듯, 이 소설에서도 도미노처럼 사람이 죽어나간다. 다만 이 죽음은 자살이나 교통사고로 위장되어 별로 특별해보이는 구석은 없고, 피해자를 보아 쇼호지 미야코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의심이 될 뿐이다. 용의자를 찾는 것 부터가 난항인데, 그 실마리가 되는 것은 아사미 미쓰히코가 들고 온 8년 전 사고의 숨겨진 진실이다. 8년 전 사건를 찾아가면서 현재 사건도 점점 베일을 드러낸다.

 

  범인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고, 딱히 놀랄 만한 반전이 있지도 않다. 하지만 차근차근 수사해서 추리의 재료를 모으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와 8년 전 사고가 현재의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용의자를 추려낼 것인지 짐작하는 재미가 있다.

 

  현재의 일상이 8년 전 일어났던 일로 인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네 건의 살인사건을 통해 유추해 볼 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가해자의 행보는 어쩐지 매그레 시리즈 중에서 <생폴리앵에 지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인상이었다. 100편이 넘는 시리즈의 주인공이 된 탐정의 시작점이라고 보기엔 좀 조용한 느낌도 든다. 작가가 쓴 후기를 보면, 뒤의 시리즈가 딱히 기발하고 소란하고 잔인하고 반전돋고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조용한 듯 해도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히는 장점이 있으니, 미쓰히코의 다음 시리즈를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201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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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어디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1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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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니름 있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을 읽고, 다른 글도 찾아보았다. 몇 권이 더 국내에 들어와 있었는데(생각보다 많았다), 그 중에서 요네자와 호노부가 일상 미스터리에서 본격 미스터리로 가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는 <개는 어디에>를 골랐다.

 

 <개는 어디에>라는 제목을 보고 아무래도 개를 찾는 미스터리같다는 선입견을 가졌는데, 실제로는 개가 거의 안 나온다는 게 함정. 설정은 상당히 코믹하다.

 

  고야 조이치로는 사회복귀를 위한 재활능력 차원에서 조사 사무소를 연다. 개를 찾을 심산으로 사무실을 열었는데, 들어온 의뢰는 도쿄에서 실종된 미인 찾기 & 고문서 유래 찾기. 때마침 고용해달라 찾아온 고등학교 후배(탐정 지망생!) 한다 헤이키치와 함께 각각 조사에 착수하는데.......

 

  지방의 조그마한 시와 촌이 배경이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의뢰는 고야가 원하던 개를 찾는 의뢰가 아니긴 하지만, 의뢰 자체는 단순하다. 도쿄에서 스스로 행적을 감춘 손녀를 찾는 의뢰가 하나고, 마을의 절에 대대로 내려온 고문서의 유래를 찾아달라는 의뢰가 하나다. 별로 어려운 의뢰는 아닌 듯 하고, 그런 만큼 글은 가벼운 분위기로 시작한다.

 

  고야와 한다가 각각 사람 혹은 고문서 유래를 찾기 위해 취한 방법은 지극히 일반적이다. 전화돌리기, 들개 물리치기, 사진 찍기, 도서관 가기 등등. 이런 단순한 작업들로 인해 하나씩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고 글은 다소 심각성을 띠기 시작한다. 고야는 그저 의뢰받은 미인의 행적을 알아내고 싶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연찮게 그녀의 행동의 원인을 알게 되고, 거기서 못본척 하지 못하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막기 위해 달려간다. 여기까지는 꽤 일반적인 전개다.

 

  그런데 이 글은 거기서부터 크게 한 번 비틀린다. 이 반전과 결말이야말로 <개는 어디에>를 개성적이고 쉽게 잊지 못하게 만든다.

 

328p

  도코도 지금쯤 불안할까. 그 탐정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싶어 불안할까.

  '야나카 성'이 있는 산 어딘가에 파묻은 것이, 빗물 때문에 드러나지는 않을까 싶어 불안할까.

  비가 올 때마다 나도 불안하다.

  묻힌 것이 나오면 교착 상태는 무너진다. 도코는 마카베 때문에 무엇 하나 잃을 마음이 없을 것이다.

  당분간 나는 나이프를 떼어놓을 수 없다.

  이번에 받은 보수로 감시견을 살까 생각중이다.

 

  도코가 돌아온 것은 도망친 것이 아니라 범행을 위해서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도코는 살인도 거리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고야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이 소설의 마지막에 굉장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 범행이 드러났을 수도 있고,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도코가 고야를 제거하려 했을 수도 있고, 고야가 먼저 도코를 신고했을 수도 있다. 수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이 왜 그렇게 강렬했을까 생각해봤다. 그건 사건의 제3자로 기능하던 탐정이 가해자 혹은 피해자의 입장으로 끌어내려졌기 때문인 듯 싶다. 남의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의 충격. 생각해보면 탐정이라고 반드시 범행에서 제외되지는 않는 것이다. 인간이니까.

 

  <개는 어디에>의 결말은 글 전체에서 결말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결말 하나로 글의 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책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이 소설은 고야의 1인칭과 한다의 1인칭을 번갈아 취하고 있는데, 시점이 바뀔 때 어떤 표시도 없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부던히 헛갈렸다. 그것만 빼고는 만족스럽다.

 

 

201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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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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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2세기 영국 솔론제도 + 판타지 + 추리 = ?

 

  상당히 취향을 탈 것 같은 조합이지만, 그 조합이 모두 취향에 맞아 떨어져서 출간 전부터 체크해놓았던 소설이다. 팔크 피츠존이 나오기 전 처음 몇 페이지에서 좀 방황했는데(묘사와 설명이 나오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그 페이지를 넘기자 진도가 놀라울 정도로 쭉쭉 빠졌다.

 

  크게 보면 미션은 두 가지다.

 

1. 영주를 죽인 범인을 찾아낸다.

2. '저주받은 데인인'의 습격을 막아낸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누가 범인이고, 어떻게 범행했으며, 왜 범행했는지를 밝혀내는 게 목표다. <부러진 용골>에서는 솔론제도의 영주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부러진 용골>의 독특한 점은, 영주 살해의 범행에 '마술'이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범인은 자신의 의지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마술에 걸려서 범행을 사주받았다(누가 마술을 걸었는지는 이미 밝혀져 있다). 따라서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범인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며, 범행 수법을 찾는 이유는 그것이 범인을 잡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심리전과 심문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데, 범인은 마술에 의해 범행을 저지른 뒤 그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타지'이기 때문에 통상과 다른 룰이 적용되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p. 155

"모든 마술을 알지 못하는 한, 스승님도 누가 '미니온'인지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팔크는 결연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설령 누가 마술사라 해도, 또 어떤 마술을 사용했더라도, '미니온'이 바로 그자이거나 혹은 그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가 배경일 경우 하나의 위험요소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을 독자에게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야기가 진척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부러진 용골>은 배경 설명을 하는데 상당히 공을 들인다. 솔론제도의 지형, 암살기사의 설명, 왜 탐정인 피츠존은 암살기사를 추적하는지, 마술이란 무엇인지.

 

  이 글의 또다른 특징은 탐정이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의 틀 안에 '저주받은 데인인의 습격'을 막아내는 모험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어느 지점에서는 모험이 오히려 추리를 압도한다. 이 스타일의 장점은 끊임없이 추리할 단서를 찾아가는게 지루하지 않다는 점과 범인 혹은 범인이 아니라는 단서를 자연스럽게 글에 녹여넣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 동안 추리하던 것을 잊어버리고 신나는 모험의 세계에 빠져서 글의 논점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점이다.

 

  공정한 추리를 위하여 단서를 차분히 심어놓은 글들이 종종 그렇듯이, <부러진 용골>에서 범인을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잘 표현된 배경, 생생한 캐릭터들(개인적으로 니콜라가 좋았다), 그리고 무리하지 않은 진행 때문인 것 같다. 글의 요소가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져서 끝까지 읽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이 12세기 솔론제도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읽은 것처럼, 이 책이 12세기 솔론제도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기피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었지만 취향에 따라 꽤 영향이 있을 것 같은 글이다.

 

 

  참고로 책을 읽으며 발견한 오타 둘.

 

p.254

  입으로 거짓을 말하는 비열할 사내는 무기를 들도 비열하게 싸운다.

  -> 입으로 거짓을 말하는 비열한 사내는 무기를 들어도 비열하게 싸운다(?).

 

 

2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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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친구 바벨의 도서관 11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지음, 정창.이승수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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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죽음의 친구', '키 큰 여자' 두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죽음의 친구' 보다는 '키 큰 여자' 쪽이 조금 더 흥미롭다. 두 소설이 하는 이야기(다루는 소재)는 비슷하다. 그래서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서술방식이나 문체는 좀 취향이 아니었다.

 

 

* 죽음의 친구

 

  읽으면서 줄곧 민담 하나가 생각났다. 거기서는 죽음과 친구가 된 남자가 누가 죽을지와 죽지 않을지를 알게 되고 (죽음이 침대 발치에 있으면 회복되는 병이고 머리맡에 있으면 죽을 병에 걸린 것이다) 그 능력으로 공주와 결혼하게 되지만, 죽음을 속여먹은 죄로 파멸한다는 결말이었다.

 

  이 소설도 기본은 그 민담과 비슷하다. 힐 힐은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가 사망한 후 리오누에보 백작이 거둬 키워 훌륭하게 자란다. 힐은 공작의 딸 엘레나를 사랑하게 되지만 리오누에보 백작의 죽음으로 성에서 쫓겨나 아버지처럼 구두장이로 일하게 된다. 어느 날 교회에서 엘레나와 만난 힐 힐은 리에누에보 백작부인의 폭로에 상심하고 앓아 누웠다가, 약값으로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잃고 죽으려고 황산을 마신다. 그 때 죽음이 그를 친구라고 부르며 접근한다.

 

  1부는 민담처럼 힐 힐이 의원이 되고 진짜 신분도 찾고 재산도 얻고 엘레나와 결혼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2부가 시작된다. 2부는 죽음이 왜 힐 힐에게 접근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내용이다.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2부였음이 틀림없다.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파우스트>와 같은 라인의 이야기인데, 성경의 종말론과 엮여서 색다른 느낌이 든다. 1부에 힐 힐과 죽음의 만남에서 쓸데없이 구체적이거나 쓸데없이 등장한 말이 많아서 왜 그런가 했는데 2부를 위한 복선이었다. 이 글이 힐 힐의 1인칭 시점이 아니라 전지적 작가시점인 이유도 그렇다. 비꼬는 척 늘어놓은 설명들이 이야기의 복선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꽤 교훈적인 내용이었는데, 관심이 간 건 글의 메시지보다는 힐 힐과 죽음의 관계였다. 죽음은 친근하게 힐을 대하지만, 힐은 겉으로는 친구라고 말하면서도 죽음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며 피하려고 한다. 죽음이 그런 힐을 비난해도 힐은 태도는 바꾸지 않는데, 이 관계만 보면 힐이 굉장히 배은망덕하고 나쁜 놈 같다. 하지만 필멸자와 죽음이라는 관계에서 보면 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쌓아놓은 것을 한 순간 끝장낼 수 있는 죽음을 필멸자가 경멸하고 혐오하고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건 당연한 본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살아있는 것에게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죽음은 힐 힐에게 비난받아야 할 것은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삶이라고 항변하는데,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죽음-삶-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이야기해주었으면 했는데 아쉬웠다.

 

 

* 키 큰 여자

 

  텔레스포로 10세가 겪은 일을 가브리엘에게 하고, 가브리엘이 몇 명의 사람들(그 중에 화자 '나'도 섞여있다)에게 그 일을 이야기해주는 구조.

 

  텔레스포로가 '키 큰 여자'를 본 날, '키 큰 여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낀 뒤에,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부고를 듣는다. 그리고 3년 후 다시 그 키 큰 여자를 만난 몇 시간 후, 그는 약혼녀 호아키나의 부고를 듣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텔레스포로는 사망하는데, 가브리엘은 텔레스포로의 장례식장에서 텔레스포로가 묘사한 것과 똑같은 키 큰 여자를 본다.

 

p.150.

  '왜 이래?'

  그 말에 내 공포심은 더욱 커졌고 내 노기는 꼬리를 내리더군.

  '당신은, 당신은 진작부터 나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번에는 내가 소리쳤어.

  '그렇지.'그녀가 비꼬더군. '3년 전 산 에우세니오 날 밤, 하르디네스 가였던가......!'

  나는 골수까지 파고드는 공포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었어.

  '누구요? 대체 당신 누구요?' 나는 멱살을 붙잡은 채 물었지. '왜 내 뒤를 밟는 거요? 그래서 날 어쩌겠다는 거요?'

  '왜 이래? 나는 연약한 여자라고.......' 그녀가 악마처럼 내뱉더군. '그대는 이유없이 나를 증오하고, 이유없이 나를 두려워하고 있군! 어이, 신사 양반, 그게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보시지 그래. 나를 처음 봤을 때, 왜 그렇게 놀랐던 거야?'

  '태어났을 때부터 당신을 증오했으니까! 당신은 내 삶에 있어 악마니까!'

  '그렇다면 그대도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거네! 하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를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였지?'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였지. 그래서 3년 전에 그대가 내 옆을 지나자 속으로 오호, 바로 그 자로구먼, 했었지!'

  '대체 당신에게 나는 뭐요? 나에게 당신은 뭐요?'

  '뭐긴 뭐야? 악마지!'

 

  이 글에서는 끝까지 '키 큰 여자'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여자는 무엇이었을까 되묻는 말로 끝난다. 그러나 '죽음의 친구'에서 나온 죽음에 대한 표현과 '키 큰 여자'를 비교해보면, 여기에 나오는 여인의 정체가 죽음이 아닐까 하는 게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하다.

 

  '죽음의 친구'가 누군가의 입에서 옛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처럼 흘러갔다면, '키 큰 여자'는 흡사 공포물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다. 개인적으로는 구성이라던가 글을 끌어가는 솜씨 같은 것에서 '키 큰 여자'가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소설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 읽을 때는 재미있었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 글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1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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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구역 서울
정명섭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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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 세 개 반 정도.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 한국 좀비 소설. <목련이 피었다>에 수록된 단편소설 'ZOMBIE, 2011 in Seoul'까지 합치면 세 번째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핵폭탄이 터져 좀비가 발생해 폐쇄된 서울에서 물건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는 트레저헌터인 현준이 부정하던 과거를 마주하고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이야기다. (중간에 음모론이라던가 화학탄이라던가 쿠데타라던가 이것저것이 많이 끼어드는 바람에 핵심이 좀 흐려지긴 했지만.)

 

  서울에 좀비가 득시글거리게 된 이유는 북한이 핵폭탄을 서울에 쏘았기 때문인데, 좀비가 등장한 이유를 한반도의 현실과 꽤 현실감있게 엮어서 좋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누구는 좀비가 되고 누구는 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방사능에 노출이 되어서 그렇다면, 서울에서 밖으로 탈출한 사람들은 방사능에 전혀 노출이 되지 않았다는 걸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서울 밖에 이송된 사람들이 서서히 좀비로 변하는 일도 가능할 법 한데 말이다. 뭔가 납득이 가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설정이다. 하지만 <폐쇄구역 서울>에서 중요한 것은 좀비가 아니니 설정은 너무 파고들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과 <ZOMBIE, 2011 in Seoul>, <폐쇄구역 서울>에 이르기까지 '좀비는 특정한 장소에만 있다'는 점이다.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에서는 대학로 일대였고, <ZOMBIE, 2011 in Seoul>은 건물 안, 그리고 <폐쇄구역 서울>에는 서울에만 좀비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지역만 피한다면 좀비에게서 안전하다는 소리다. 따라서 긴장감이 좀 덜하다. 왜냐하면 '이 곳만 빠져나가면' 안전지대기 때문이다. 이 차이 때문에 한국 좀비물은 약간 게임을 하는 느낌도 드는데,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데도 들어가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좀비물을 보면 보통 모든 세계가 좀비에게 점령당한 것으로 시작한다. 좀비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지역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외국의 좀비물은 '좀비들 사이에서 좀비가 되지 않고 살아남자!'가 목표이다.

 

  그런데 내가 본 한국 좀비물들은 생존 외의 다른 목표가 부각된다.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에서는 좋아하는 여자를 구해 나오려고 대학로로 잠입하는 남자가 나오고, 따라서 이 소설의 핵심은 '좋아하는 여자를 무사히 구해서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인가'이다. <ZOMBIE, 2011 in Seoul> 같은 경우에는 일단 좀비를 피해서 밖에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말해서 좀비보다 밖이 더 싫다는 소리고, 자연스럽게 왜 밖이 더 싫은가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폐쇄구역 서울>로 말하자면 의뢰인이 서울에 두고 온 물건을 가져다줌으로써 돈을 벌기 위해 좀비들 사이로 뛰어든다. 따라서 부각되는 것은 '좀비'가 아니고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안에 들어가게 만드는 '돈과 추억'이다.

 

  p. 116.

  "핵폭발은 좀비를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에게서 다른 것들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때 없어진 게 뭔 줄 아십니까? 명함에 찍혀있는 회사나 직책, 월급봉투, 대학 졸업장 같은 겁니다. 그리고 그런 허물들이 벗겨지면서 사람들은 더 끔찍해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먹고 사는 것뿐이죠. 사람들은 천박하고 비겁해졌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부모가 아이들을 버린 게 지극히 정상적인 게 되어버렸습니다. 핵폭탄이 진짜 날려버린 건 인간성입니다. 우린 어쩌면 폐쇄구역을 떠도는 좀비들보다 더 하등동물이 된 건지도 모르죠."

 

  p. 164.

   "사람들은 옛날부터 사진이나 결혼반지 같은 추억이 될 만한 것들을 위해 기꺼이 큰돈을 썼어요. 갑자기 헤어진 가족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요."

  "난 그 추억들을 버렸어. 저 폐쇄구역 안에다가."

  "그럼 가서 찾아와요. 그게 직업이잖아요."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서울에 핵폭탄이 떨어진 이후 살아남은 살마들이 겪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이다. 초반에는 사람들의 외상후스트레스와 인간성에 대한 고찰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현준이 '소소한 일' 담당으로 좌천되면서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그 물건을 가져다주는 형식이므로), 중간에 화학탄이며 서울에서 목격된 일반인이며 쿠데타며 그런 게 엮여들어가서 마지막에는 엉뚱한 쪽으로 빵 하고 날아가버렸다. 뒷부분의 이야기는 액션물 보듯 보기는 좋지만, 뭔가를 생각하게 했던 앞부분과는 달리 아무 생각 없이 총을 쏘고 피하고 도망치고 하는 내용이라 앞부분에서 공들여 쌓아놓은 돈과 추억과 인간성과 상처라는 주제를 잡아먹어버렸다.

 

  읽을 때는 속도감 있게 읽혀서 좋았지만, 읽고 나니 아쉬움이 남는 글이다. 조금 더 방향을 잘 가늠했으면 더 좋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렇다. 캐릭터보다는 스토리 중심이고(캐릭터들은 꽤나 전형적이고 다들 지적이다), 영화를 보듯 시각화가 뛰어난 작품이다. 어찌되었건 간에 여름밤에 읽기에는 꽤 좋다.

 

 

p.s. 덧붙여 아쉬운 점 한가지 더. 작가가 자기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스토리를 통해서가 아닌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말하는 기미가 있다. 캐릭터가 아닌 작가가 말하는 게  티가 나서 아쉬웠다.

 

 

 

201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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