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친구 바벨의 도서관 11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지음, 정창.이승수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죽음의 친구', '키 큰 여자' 두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죽음의 친구' 보다는 '키 큰 여자' 쪽이 조금 더 흥미롭다. 두 소설이 하는 이야기(다루는 소재)는 비슷하다. 그래서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서술방식이나 문체는 좀 취향이 아니었다.

 

 

* 죽음의 친구

 

  읽으면서 줄곧 민담 하나가 생각났다. 거기서는 죽음과 친구가 된 남자가 누가 죽을지와 죽지 않을지를 알게 되고 (죽음이 침대 발치에 있으면 회복되는 병이고 머리맡에 있으면 죽을 병에 걸린 것이다) 그 능력으로 공주와 결혼하게 되지만, 죽음을 속여먹은 죄로 파멸한다는 결말이었다.

 

  이 소설도 기본은 그 민담과 비슷하다. 힐 힐은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가 사망한 후 리오누에보 백작이 거둬 키워 훌륭하게 자란다. 힐은 공작의 딸 엘레나를 사랑하게 되지만 리오누에보 백작의 죽음으로 성에서 쫓겨나 아버지처럼 구두장이로 일하게 된다. 어느 날 교회에서 엘레나와 만난 힐 힐은 리에누에보 백작부인의 폭로에 상심하고 앓아 누웠다가, 약값으로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잃고 죽으려고 황산을 마신다. 그 때 죽음이 그를 친구라고 부르며 접근한다.

 

  1부는 민담처럼 힐 힐이 의원이 되고 진짜 신분도 찾고 재산도 얻고 엘레나와 결혼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2부가 시작된다. 2부는 죽음이 왜 힐 힐에게 접근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내용이다.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2부였음이 틀림없다.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파우스트>와 같은 라인의 이야기인데, 성경의 종말론과 엮여서 색다른 느낌이 든다. 1부에 힐 힐과 죽음의 만남에서 쓸데없이 구체적이거나 쓸데없이 등장한 말이 많아서 왜 그런가 했는데 2부를 위한 복선이었다. 이 글이 힐 힐의 1인칭 시점이 아니라 전지적 작가시점인 이유도 그렇다. 비꼬는 척 늘어놓은 설명들이 이야기의 복선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꽤 교훈적인 내용이었는데, 관심이 간 건 글의 메시지보다는 힐 힐과 죽음의 관계였다. 죽음은 친근하게 힐을 대하지만, 힐은 겉으로는 친구라고 말하면서도 죽음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며 피하려고 한다. 죽음이 그런 힐을 비난해도 힐은 태도는 바꾸지 않는데, 이 관계만 보면 힐이 굉장히 배은망덕하고 나쁜 놈 같다. 하지만 필멸자와 죽음이라는 관계에서 보면 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쌓아놓은 것을 한 순간 끝장낼 수 있는 죽음을 필멸자가 경멸하고 혐오하고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건 당연한 본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살아있는 것에게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죽음은 힐 힐에게 비난받아야 할 것은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삶이라고 항변하는데,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죽음-삶-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이야기해주었으면 했는데 아쉬웠다.

 

 

* 키 큰 여자

 

  텔레스포로 10세가 겪은 일을 가브리엘에게 하고, 가브리엘이 몇 명의 사람들(그 중에 화자 '나'도 섞여있다)에게 그 일을 이야기해주는 구조.

 

  텔레스포로가 '키 큰 여자'를 본 날, '키 큰 여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낀 뒤에,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부고를 듣는다. 그리고 3년 후 다시 그 키 큰 여자를 만난 몇 시간 후, 그는 약혼녀 호아키나의 부고를 듣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텔레스포로는 사망하는데, 가브리엘은 텔레스포로의 장례식장에서 텔레스포로가 묘사한 것과 똑같은 키 큰 여자를 본다.

 

p.150.

  '왜 이래?'

  그 말에 내 공포심은 더욱 커졌고 내 노기는 꼬리를 내리더군.

  '당신은, 당신은 진작부터 나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번에는 내가 소리쳤어.

  '그렇지.'그녀가 비꼬더군. '3년 전 산 에우세니오 날 밤, 하르디네스 가였던가......!'

  나는 골수까지 파고드는 공포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었어.

  '누구요? 대체 당신 누구요?' 나는 멱살을 붙잡은 채 물었지. '왜 내 뒤를 밟는 거요? 그래서 날 어쩌겠다는 거요?'

  '왜 이래? 나는 연약한 여자라고.......' 그녀가 악마처럼 내뱉더군. '그대는 이유없이 나를 증오하고, 이유없이 나를 두려워하고 있군! 어이, 신사 양반, 그게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보시지 그래. 나를 처음 봤을 때, 왜 그렇게 놀랐던 거야?'

  '태어났을 때부터 당신을 증오했으니까! 당신은 내 삶에 있어 악마니까!'

  '그렇다면 그대도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거네! 하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를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였지?'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였지. 그래서 3년 전에 그대가 내 옆을 지나자 속으로 오호, 바로 그 자로구먼, 했었지!'

  '대체 당신에게 나는 뭐요? 나에게 당신은 뭐요?'

  '뭐긴 뭐야? 악마지!'

 

  이 글에서는 끝까지 '키 큰 여자'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여자는 무엇이었을까 되묻는 말로 끝난다. 그러나 '죽음의 친구'에서 나온 죽음에 대한 표현과 '키 큰 여자'를 비교해보면, 여기에 나오는 여인의 정체가 죽음이 아닐까 하는 게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하다.

 

  '죽음의 친구'가 누군가의 입에서 옛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처럼 흘러갔다면, '키 큰 여자'는 흡사 공포물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다. 개인적으로는 구성이라던가 글을 끌어가는 솜씨 같은 것에서 '키 큰 여자'가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소설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 읽을 때는 재미있었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 글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12. 8. 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