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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2세기 영국 솔론제도 + 판타지 + 추리 = ?
상당히 취향을 탈 것 같은 조합이지만, 그 조합이 모두 취향에 맞아 떨어져서 출간 전부터 체크해놓았던 소설이다. 팔크 피츠존이 나오기 전 처음 몇 페이지에서 좀 방황했는데(묘사와 설명이 나오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그 페이지를 넘기자 진도가 놀라울 정도로 쭉쭉 빠졌다.
크게 보면 미션은 두 가지다.
1. 영주를 죽인 범인을 찾아낸다.
2. '저주받은 데인인'의 습격을 막아낸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누가 범인이고, 어떻게 범행했으며, 왜 범행했는지를 밝혀내는 게 목표다. <부러진 용골>에서는 솔론제도의 영주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부러진 용골>의 독특한 점은, 영주 살해의 범행에 '마술'이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범인은 자신의 의지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마술에 걸려서 범행을 사주받았다(누가 마술을 걸었는지는 이미 밝혀져 있다). 따라서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범인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며, 범행 수법을 찾는 이유는 그것이 범인을 잡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심리전과 심문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데, 범인은 마술에 의해 범행을 저지른 뒤 그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타지'이기 때문에 통상과 다른 룰이 적용되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p. 155
"모든 마술을 알지 못하는 한, 스승님도 누가 '미니온'인지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팔크는 결연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설령 누가 마술사라 해도, 또 어떤 마술을 사용했더라도, '미니온'이 바로 그자이거나 혹은 그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가 배경일 경우 하나의 위험요소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을 독자에게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야기가 진척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부러진 용골>은 배경 설명을 하는데 상당히 공을 들인다. 솔론제도의 지형, 암살기사의 설명, 왜 탐정인 피츠존은 암살기사를 추적하는지, 마술이란 무엇인지.
이 글의 또다른 특징은 탐정이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의 틀 안에 '저주받은 데인인의 습격'을 막아내는 모험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어느 지점에서는 모험이 오히려 추리를 압도한다. 이 스타일의 장점은 끊임없이 추리할 단서를 찾아가는게 지루하지 않다는 점과 범인 혹은 범인이 아니라는 단서를 자연스럽게 글에 녹여넣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 동안 추리하던 것을 잊어버리고 신나는 모험의 세계에 빠져서 글의 논점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점이다.
공정한 추리를 위하여 단서를 차분히 심어놓은 글들이 종종 그렇듯이, <부러진 용골>에서 범인을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잘 표현된 배경, 생생한 캐릭터들(개인적으로 니콜라가 좋았다), 그리고 무리하지 않은 진행 때문인 것 같다. 글의 요소가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져서 끝까지 읽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이 12세기 솔론제도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읽은 것처럼, 이 책이 12세기 솔론제도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기피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었지만 취향에 따라 꽤 영향이 있을 것 같은 글이다.
참고로 책을 읽으며 발견한 오타 둘.
p.254
입으로 거짓을 말하는 비열할 사내는 무기를 들도 비열하게 싸운다.
-> 입으로 거짓을 말하는 비열한 사내는 무기를 들어도 비열하게 싸운다(?).
201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