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패트롤 - 타임 패트롤 시리즈 1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4
폴 앤더슨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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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 여행 좋아한다. 왠지 두근두근한 설정이다. 역사도 좋아한다. 옛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다. 그런 점에서 <타임 패트롤>은 내가 여러 모로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이 책을 안 읽은 이유는 초반 30페이지에서 번번히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초반 30페이지 즈음까지는 심드렁하니 읽었다. 그 이후로는 책장에서 눈을 못 떼고 읽(었다면 조금 거짓말이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좀이 쑤신 정도)었지만. 

  <타임 패트롤>은 단편집이다.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고, 모두 맨스 에버라드라는 타임 패트롤 요원이 주인공이다. 그는 1954년에 타임 패트롤에 들어간 이후, 첫 사건에서 무임소요원이 되어 이 시간 저 시간으로 돌아다니면서 역사가 원래의 시간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거나 실종된 요원들을 찾거나 하며 활약한다.  

 

  타임 패트롤 : 맨스 에버라드는 기술연구소에 지원하여 합격하고, 그 곳이 사실은 기술자가 아닌 타임 패트롤 요원을 모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교육을 받은 후 자신의 시간대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심심해서 옛 기록을 뒤지다가 1894년의 기묘한 소장품 얘기를 발견한다. 맨스는 친구 찰스 위트콤과 함께 소장품이 매장되었을 464년으로 점프하는데....... 

  -> 타임 패트롤 시리즈를 여는 단편. 맨스 에버라드가 아직 풋풋하다. 전체적인 역사 개변과 개인적인 시간 수정에 관한 이야기다. 첫 편이다 보니 설명하는 부분이 꽤 있지만 진행속도가 꽤 빨라서 지루하지는 않다. 맨스와 찰스가 1894년으로 잠시 점프했을 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립탐정이 이름만 빼놓고 언급되는데, 작가도 이 탐정 팬이구나 싶어서 보면서 좀 웃었다. 

 왕과 나 : 맨스는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자 친구 키이스 데니슨의 부인인 신시아로부터 키이스가 기원전 558년의 이란으로 갔다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원전 542년으로 가서 키이스의 행방을 찾는다. 얀산의 페르시아 왕 키루스를 만난 맨스는 그가 키이스임을 알고 경악한다. 키이스는 신시아를 그리워하고, 맨스에게 자신을 20세기로 데려가 줄 것을 부탁하는데... 

  -> 앞편에 비해 맨스가 잔뜩 스트레스를 받아 퍽퍽한 성격이 된 느낌이다. 맨스가 삼각관계의 한 축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역사 개변 없이 어떻게 키이스를 20세기로 데려갈 것인가가 관건. 키이스가 B.C. 542년에 남으면 홀로 될 신시아가 욕심나면서도 키이스를 20세기로 데려올 아이디어를 내는 맨스가 멋있다. 그러나 돌아온 키이스가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 없다. 14년의 부인에서 8개월의 부인 곁으로 돌아온 키이스는 행복했을까?  

 지브롤터 폭포에서 : 톰 노무라는 펠리즈 아 라흐를 짝사랑한다. 톰과 펠리즈 둘이서 지브롤터 폭포를 기록하러 나간 어느 날, 펠리즈가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그녀가 소속된 패트롤 지부에 연락을 해 보지만 그녀는 복귀하지 않았다는 기록만 있다. 절망한 톰은 타임 호퍼와 함께 지브롤터 폭포를 향하는데...... 

  -> 역사 개변이 개입되지 않아서인지 그저 그랬던 이야기. 맨스 에버라드는 이 단편에서는 조연이다. 톰과 펠리즈의 사랑 이야기, 라고 하면 듣기 좋지만 펠리즈가 톰을 사랑하는 걸까에 대해서는 살짝 아리송하다. 타임 호퍼의 다양한 활용법 중 하나가 소개된 느낌이다. 

  사악한 게임 : 맨스 에버라드는 연구원 존 샌도벌과 함께 1280년의 아메리카 대륙에 간다. 원 왕조의 쿠빌라이 칸이 원정대를 아메리카로 보냈는데 그 원정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은 원정대 대장인 톡타이를 겁주어 돌려보내려 하지만, 오히려 사로잡히고 만다. 

  -> 패트롤이 정의의 조직이 아니고 그저 이기적인(데이넬리아 인들이 존재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목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이 에피소드로 인해 세계관이 더 풍부해진 것 같다. 맨스와 샌도벌은 시간여행자가 개입된 역사개변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선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에 개입한다는 데에 혼란을 느낀다.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더불어 미래의 어떤 것도 과거에서는 때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델렌다 에스트 : 휴가를 즐기던 맨스 에버라드는 친구인 피엣 반 사라와크에게 20세기의 뉴욕에서 같이 놀자고 제안한다. 1960년의 맨해튼으로 타임 호퍼를 맞추었지만, 타임 호퍼가 그들을 데려다 준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세계였다. 

  -> 역사 개변이 일어난 세계를 원래의 시간선으로 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맨스가 나온다. 현재와 아주 다른 느낌을 주는 켈트족의 세계가 신기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맨스는 시간선을 돌리기 위해 고민하는데, 그건 정의감이 아니라 이기적인(자신이 아는 세계로 돌리고 싶다는) 욕망에 가깝다. 결국 맨스는 사악한 게임에 손을 담근 것 같다. 제목이 무슨 뜻인가 궁금했는데 'Carthago Delenda est'를 줄인 말이라고 한다.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 

 

  타임 패트롤 시리즈는 1950년대에 처음 스여져서 1990년대까지 이어진 시리즈라고 한다. 꽤 옛날 글인데도 옛날 티를 별로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시간 여행보다는 조금 더 큰 흐름, '역사'에 주목하고 있는 듯 하다. <타임 패트롤>에서의 시간은 매우 탄력적이고 유동적이다. 마치 거대한 강 같다고 할까. 물방울 몇 개를 흐트린다고 해서 강이 바뀌지는 않지만, 강의 흐름이나 모습이 달라지는 포인트는 존재한다. 

  다섯 편의 단편 모두 재미있었지만, 굳이 순서를 따지라면  왕과 나, 델렌다 에스트 > 사악한 게임 > 타임 패트롤 > 지브롤터 폭포에서  순이었다. '왕과 나'와 '델렌다 에스트'는 정말 좋았다(델렌다 에스트에 나오는 반 사라와크는 좀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작가의 역사감각과 지식이 대단하다. 역사 개변이라는 개념이 타임 패트롤 시리즈의 흥미를 더 돋우는 것 같다. 시리즈 뒷 이야기인 <바다의 별>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도 얼른 읽어야겠다. 

 

2011.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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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전쟁 샘터 외국소설선 1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 샘터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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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행성>을 재미있게 읽어서 그 전 시리즈를 읽기로 했다. 먼저 시리즈 1편인 <노인의 전쟁>을 손에 들었다. 제목부터 꽤 독특하다. 노인이 무슨 전쟁을 한다는 말인가? 

  줄거리 : 

  존 페리는 75세가 되던 해 우주개척방위군(CDF)에 입대한다. 그는 우주개척방위군 훈련을 받는 곳에서 여섯 명의 친구를 만나 '늙은 방귀쟁이들'이라는 모임을 결성한다. 전선에 각자 배치되어 헤어진 뒤, 그들은 가혹한 전투에서 한 명씩 사망한다. 존도 코랄 전투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노인의 전쟁>은 존 페리의 1인칭으로 진행된다. 세계관이 독특하고 인물들도 매력있어서 보기에 지루하지 않다. 한 권을 순식간에 읽을 만큼 재미있다. 생각보다 <마지막 행성>과의 연관성은 많지 않았다. 콘수와의 회담 얘기가 조금 언급된 정도다.

  <노인의 전쟁>을 한 줄로 정리해보면 "존 페리의 CDF 체험기" 정도가 될 것 같다. 심각하려면 심각한 내용인데(사람이 막 죽어나가니) 존 페리가 유쾌해서 좋았다. 노인만 입대하는 군대라는 설정도 재미있고 외계인이 참 다양해서 신기했다.

  그러나 소설 자체는 머리가 너무 큰, 기형적인 모습이 보인다. 핵심 사건이라고 할 만한 코랄 전쟁은 이 책의 1/3에 불과하고 그 전에 이 사건을 암시하는 사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2/3은 그냥 존 페리의 생활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배경과 인물이 사건을 잡아먹은 느낌이다.

  <노인의 전쟁>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짜여져 있던'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의 머릿속에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코랄은 최소한 1/3 지점에서는 시작했을 것이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우주개발연맹과 우주개척방위군의 시스템이지, 어떤 특정한 사건은 아니었던 것 같다. 

  <노인의 전쟁>은 재미있었지만 빈말로라도 구성이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는 못하겠다. <마지막 행성>에서도 이야기가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려는 기미가 있기는 했는데(원주민 얘기하다가 콘클라베 얘기로 급선회한다던가), <노인의 전쟁>의 경우는 한층 심하다. 갑자기 코랄 전쟁이라는 사건을 떡하니 투척해놓았다. 페이지수의 제한 때문인지 코랄 전쟁에 들어서서 간단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많아 아쉬웠다. 차라리 앞의 신병 체험기를 확 줄이고 코랄 전쟁을 자세히 말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노인의 전쟁>은 CDF를 이해하기 위해 놓아둔 디딤돌, 혹은 프롤로그라는 느낌이다. 내 생각에는 노인의 전쟁을 읽지 않고 바로 <유령 여단>으로 가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존 페리와 유쾌한 '늙은 방귀쟁이들'을 못 만날 테니, 좀 아쉬운 일이긴 하다. 

 

  덧붙임. 

  책 뒤의 작가 이력을 보니 원래 2002년 블로그 연재를 시작, 입소문이 퍼져 출간까지 하게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걸 보고 다소 납득했다.  

  사람들은 전자기기의 발전을 보고 종이책의 종말을 논하지만, 나는 종이책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나무가 멸종해서 없어질 수는 있겠지만). 웹으로 할 수 있는 체험과 종이로 할 수 있는 체험은 확실히 다르다. 블로그 같은 경우, 이야기의 전체적인 짜임보다는 즉각적인 것(인물, 대사, 독특한 개성)에 집중하게 된다. 설명의 길이가 길어도 스크롤을 내려버리면 되니까 이야기의 길이에 무감각해진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단서를 잘 놓치게 된다. 따라서 이야기의 구성이나 플롯의 중요성이 낮아진다. 그에 비해 종이에 써진 이야기는 조금 더 조직화해서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노인의 전쟁>은 재미있지만, 역시 처음부터 플롯을 잘 짜놨으면 더 굉장한 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유령 여단>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2011.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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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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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트>를 읽기 전, 이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복수극이었다. 사랑하는 딸을 연쇄강간살인범에게 잃은 아버지가 연쇄강간살인범을 살해하는, 그런 복수극. 몇 년 전에 개봉한 영화 <테이큰>의 이미지가 조금 개입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프레데리크의 행동은 단순히 마리를 죽인 놈에 대한 개인적 복수가 아닌, 사회 구성원이 사회를 위해 행한 '위험요소 제거 작업'에 가까웠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뭐라고 이 책을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문기자와 전직 범죄자라는 조합은 굉장히 실감나는, 바로 옆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그래서 마치 현실처럼 무엇이 옳고 어떻게 행동해야 했는지 판단하기 까다로운, 그런 괴물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계속 가슴이 먹먹했다.

   <비스트>가 괴물같은 이유는 어떤 생각 하나를 쉽게 편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을 보고도, 단순하게 '성범죄자는 모두 죽여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래도 모든 생명은 소중해. 사람 몇을 죽인 범죄자라고 해도.'라고 초지일관 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사항은 명확하다. 룬드는 개자식이다. 짐승이고, 짐승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아주 위험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개인적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한 부분. 극중에 등장하는 유능한 변호사는 프레데리크의 정당방위와 무죄방면를 주장하기 전에 룬드와 같은 급으로 논 아동성폭행범의 형량을 고작 1~2년으로 줄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식으로 모순된, 아이러니한, 그런 상황과 인물이 끝없이 이어진다.

  <비스트>는 '프레데리크가 룬드를 살해'하는 부분보다 그 일의 앞과 그 일의 뒤를 더욱 치밀하게 보여준다. 연쇄강간살인범을 피해자 아버지가 살해했다는 사건이 한 가지 사건으로 단순히 끝나지 않고 수없이 많은 여파를 사회에 미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그 여파의 어디에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할지 판단하는 일은 아주 까다롭다. <비스트>가 보여주려는 건 어떤 개인이나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 사회인 듯 하다. 그리고 이제 범죄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는 듯 하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묵직한 내용을 가진 소설이었다. 그런데도 읽기가 버겁지 않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손을 떼지 못하고 보게 된다. 한 번 잡고 끝까지 읽어버렸다. 비스트에서 이어지는 시리즈가 몇 권 더 있다고 하는데, 얼른 한국어로 번역되어 들어왔으면 좋겠다.

 

  덧붙임.

  역자의 말을 읽고 기분이 상했다. 편집자와의 상의 끝에 반복되는 잔인한 묘사와 강한 욕설을 잘라냈다고 한다. 어쩐지, 이상하게 묘사가 있을 것 같은 부분에 묘사가 없더라. 그런 부분을 삭제했기에 불편한 기분은 확실히 덜했겠지만(하기야 그런 묘사를 읽지 않아도 충분히 상황은 '엿같아'보인다), 작가가 의도한 게 바로 그 불편한 기분은 아니었을까. 

 

201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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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피었다 - 2011 올해의 추리소설 황금펜 클럽 Goldpen Club Novel
강형원 외 지음 / 청어람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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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세 개 반. 네 개 까지는 아닌 듯 해서 세 개 반으로 안착. 단편집이다보니 작품마다 기복이 있다.

  한국 미스터리는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도진기의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와 한동진의 '경성 탐정록' 뿐이다('이상은 왜?'에도 미스터리 요소가 있긴 하지만 내 생각에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아서 뺐다). 그래서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더 큰 호기심을 가지고 <목련이 피었다>를 읽게 된 게 사실이다. 11명의 다른 작가가 쓴 11편의 미스터리라니, 한국 미스터리의 다양함을 맛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다양한 작품색이 보여 좋았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아쉬운 점이 많이 눈에 띈다. 소재는 참신하고 재미있는데 끝마무리가 제대로 안 된 이야기, 혹은 납득할 정도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소설이 다 그렇지만, 미스터리는 특히 독자의 '납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독성이 좋고 나름 재미도 있었지만 그 때문에 읽고 나서 뒷맛이 좋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상상력과 소재는 좋은데 조리하는 솜씨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너무 많이 담으려 하거나 너무 건너 뛰거나 너무 억지로 이야기를 이끌거나 너무 어정쩡하게 멈춘 느낌. 다듬어진다면 더 좋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을까. 

  재미있게 읽었던 글은 <목련이 피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독거미의 거미줄>, <포인트>, <개티즌>이다. 이 중에서 <개티즌>이 제일 좋았다. 재미도 있고 잘 다듬어진 미스터리다(개인적으로 11편 중 가장 흐름과 결말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여섯 편은 다소 시들시들 하긴 했지만, 읽기 싫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은 없었다. <섬머 킬러는 슬프다>만 빼고(이 작품은 읽고 나서 왠지 슬픈 느낌마저 들었다;).

 

*  살아있는 전설 : 굵직한 사건들을 예언한 남자 '수'.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도망다니며 살던 그가, 북한의 핵공격 날짜를 예언하고 나서는데.......!

->  설명조로 이야기를 끌어 나간 게 글의 맛을 죽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주인공의 태도 변화가 너무 극적(이고 계기가 너무 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언자라니 흔한 소재지만 역사랑 엮이니 또 다른 맛이 나서, 장편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혼자 해 보았다.

 * 노끈 : 치과의사 라동진 앞에 나타난 윌셔 홈즈. 윌셔 홈즈는 라동진에게 자신의 조수가 되어 노끈에 얽힌 비밀을 풀고 연쇄살인사건을 함께 해결해보자고 제안한다.

-> 나는 셜록 홈즈를 좋아한다. 그래서 홈즈가 언급되는 작품들도 기본적으로 꽤 좋아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지나치게 홈즈와 엮으려고 노력한 나머지 이야기 자체가 훼손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결말을 읽고 난 뒤 남은 의문이 지나치게 많았다(범인이 직접 편지까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조차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 이것도 단편이라기보다 장편이었으면 좋았을 듯 하다.

 * 강박관념 : 아들의 사고로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 소설가 '나'는 소설을 쓰러 내려간 마을에서 사이코패스 기질을 보이는 소년 '은수'를 만난다.

-> 책을 다 읽고 '악마의 탄생'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런데 그렇다기엔 시점이 '나'에게 너무 쏠려 있다. 그렇다고 '나'의 심리 서스펜스라고 하기에는 초점이 '나'에게 와 있지 않아서 좀 혼란스럽다. 이 글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읽어보고 해야겠다.

 * 목련이 피었다 : 유경은 친구 은수의 실종을 마음에 품고 모교로 돌아온다. 유경의 등장에 차동주 선생은 바짝 긴장하며 은수가 실종되던 해를 떠올린다. 

-> 다 읽고 나서 그래서? 라는 느낌이 든 작품. 재미있기는 한데 끝이 굉장히 미진하다. 딱 예상할 수 있는 선에서 멈춰서 더 나가지 않았다. 유경에서 차동주 선생 입장으로 서술이 바뀌면서부터 긴장감이 확 떨어져 추리할 게 없이 평이한 글이 된 듯 하다. 처음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더욱 아쉽다.

ZOMBIE, 2011 in Seoul : 실패한 의사 성민과 재민은 괴짜 천재 종우의 초대를 받고 한 병원 지하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종우의 실패를 목격하는데....... 

-> 요즘 좀비 이야기가 땡겼던 터라 개인적으로 기대한 작품. 그런데 좀비의 설정이 약하지 않았나 싶다(비틀거리는 남자의 이미지라 무섭지가 않다. 좀비가 전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평이했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그 느낌이 확 깎였다. 작품 마지막에 '2011년 서울은 좀비보다 무섭다'는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행동이나 묘사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  그녀는 알고 있다 : 소설가인 나는 아내의 외도를 알고, 아내에게 경고하기 위해 아내가 외도한 남자들을 차례로 살해하려 한다.

-> 반전이 강하다. 소설가가 아내의 외도남을 살해하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마지막은 혼란의 도가니...... 그게 그거일 줄은 몰랐다.

*  섬머 킬러는 슬프다 : 연수원에서 여사원이 가슴에 자상을 입은 채 숨진 채로 발견된다.

-> 전형적인 범인찾기. 11편의 단편 중에서 제일 별로였다. 단서가 공정하지도 않고, 중간에 수사 부분이 뭉텅이로 잘려나간 느낌이다. 특히 마지막의 범인의 고백이 어설펐다. 작위적이랄까.

* 독거미의 거미줄 : 부유한 집에서 자란 뚱보 동우는 첫사랑과 헤어진 후 더 열심히 자기 삶을 살기로 한다. 동우는 헬스클럽에서 소영을 만나 결혼까지 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데....... 

-> 재미있었다. 평이한 이야기였는데 마지막에 추리 요소가 몰아친다(조금 당겨졌으면 더 흥미로웠을까?). 마지막 반전의 연결고리가 앞부분에 보이지 않아서 아쉽다.

포인트 : 원룸텔에서 한 사형집행관이 밀실 안에서 사형수와 같은 모습으로 살해된다. 

-> 밀실이 나오고 범인찾기가 나오고 알리바이 트릭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추리 종합 선물세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트릭을 한 편에 담다 보니 현실성이 좀 깎여나가기는 했지만 속도가 빨라 그런지 이야기가 울퉁불퉁해지지는 않았다.

브로드웨이의 비명 : 할로윈 행진 중, 앤디가 오른쪽 옆구리에 총격을 입고 사망한다. 다들 가면을 쓰고 폭죽을 터트리던 상황이라 범인을 잡아내기가 힘든데...

-> 제임스 츄 경관이 단서를 찾아 범인을 잡아내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어안이 벙벙한 사이 갑자기 범인의 고백이 튀어나왔다. 문제는 범인의 고백에서 엿보이는 심리가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 개티즌 : 2박 3일을 촬영하기 위해 모인 게스트들은 바다가 거칠어서 섬의 등대에 모여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그 와중에 2층 창문을 닫으러 올라간 김내성 씨가 칼에 찔려 사망한다. 

-> 읽으면서 제일 즐거웠던 작품이다. 클로즈드 서클에서의 살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삘로 시작을 해서 중간에 큰 반전을 하나 겪는다. 이야기의 매력이 잘 살아있다. 개인적으로 결말이 남기는 여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대개 단편은 장편보다 잘 쓰기가 힘든 것 같다. 소화할 수 있는 배경, 트릭, 인물의 양이 한정되기 때문에 많이 꼬아놓을 수가 없어서 그런 걸까. <목련이 피었다>의 11편의 단편 중에서도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이야기가 몇 개 있었다. 

 

2011.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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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 1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현정수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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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머 미스터리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많이 본 책이라 관심이 갔다. 나는 유머 미스터리라고 해서 왠지 코지 미스터리를 떠올렸는데, 캐릭터가 강조되고 사건이 심각한 축을 이루지는 않지만 의외로 탄탄한 트릭 위주의 미스터리였다. 

  나오는 사람은 셋. 신분을 자랑하는 '도련님' 가자마쓰리 경부, 신분을 감춘 '아가씨' 호쇼 레이코 형사, 그리고 레이코의 정체불명 집사 가게야마이다. 가자마쓰리 경부는 사건 소개될 때 가끔 나올 뿐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고, 간단한 사건의 진상을 모르냐며 레이코를 무시하는 가게야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게야마의 지혜를 빌릴 수밖에 없는 슬픈 아가씨 레이코가 주축이다. 

  개인적으로 레이코와 가게야마의 관계는 아가씨-집사라기보다는 덜떨어진 조카-짓궂은 삼촌의 조합을 보는 느낌이라 꽤 유쾌했다. 

* 살인 현장에서는 구두를 벗어주십시오 : 방 안에서 부츠를 신은 채 죽어있는 20대 여성. 집 안에는 발자국이 없다. 범인이 그녀를 옮긴 걸까?

-> 제목처럼 '왜 구두를 신은 채 죽어있는가'가 핵심이다. 범인찾기보다는 트릭을 밝히는 게 중심이다.

* 독이 든 와인은 어떠십니까 : 재혼을 반대 당하던 동물 병원 원장이 독극물 중독으로 죽었다. 앞에는 와인병과 와인잔이 있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 트릭과 범인찾기. 범행 수법은 와인병이 등장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범인이 셋 중 누구일까 하는 건 알지 못했다. 역시 흡연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트릭인가; 

* 아름다운 장미에는 살의가 있습니다 : 부호의 저택 안 장미정원에서 별채에 머물던 여성이 장미덩쿨에 얹힌 채 발견되었다. 그녀가 살해당한 곳이 장미정원 안은 아니다. 그녀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 트릭이 아닌 범인찾기. 살해동기는 짐작이 가능했는데 구체적인 정황은 짐작하기 힘들었다. 힌트는 고양이.

* 신부는 밀실 안에 있습니다 : 결혼식 피로연 중 신부가 괴한에게 습격당한다. 제 1발견자는 신부의 선배인 레이코, 그러나 레이코가 들어가기 전 방은 밀실이었는데....... 

-> 조금 시시.

* 양다리는 주의하십시오 : 집에서 전라로 발견된 젊은 남성. 그는 네 다리를 걸치는 중이었다. 범인은 네 명의 여성 중 누구일까? 

-> 제일 흥미진진했던 단편. 트릭과 범인찾기. 

* 죽은 자의 전언을 받으시지요 : 사채업자가 집에서 둔기로 얻어맞아 살해당했다. 곧이어 흉기에 의해 2층 창문이 깨지고, 그게 알리바이 트릭이라고 보기에는 용의자 모두 알리바이가 없다. 사채업자의 손 옆에는 다잉 메시지가 있었던 듯한 흔적이 있고...... 

-> 중간에 약간 억측이 아닌가 싶은 부분이 있기는 했는데, 재미있었다. 범인찾기. 

  가볍고 통통 튀는 이야기에 트릭을 엮어낸 모양새다. 트릭이라고는 해도 아주 기발하거나 공을 들인 복잡한 트릭은 아니다. 약간 만화같은 분위기라, 기분 전환하기 좋다. 소설의 포커스가 범인-피해자가 아니라 탐정-조수에게 가 있기 때문에 소설 내내 사건 이야기만 하면서도 어찌보면 추리소설이 아닌 분위기이긴 하다.

  나는 즐겁게 읽었는데 서점 리뷰들을 보니 평이 갈린다. 일단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가 꽤 취향에 맞아서,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다른 유머 미스터리도 볼까 생각하고 있다. 

 

2011.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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