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미스터리 2011.가을 - 33호
청어람M&B 편집부 엮음 / 청어람M&B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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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미스터리 2011년 가을 호의 구성은 크게 특집기사 / 국내외소설 / 신간안내로 되어 있다. 특집기사로는 김내성의 소설과 칼럼, 그리고 번역가 정태원 추모, 2011 여름 추리소설 학교가 있고, 단편으로는 국내단편 4퍈. 국내장편(중편?) 2편, 그리고 해외단편 1편이 실려있다.

 

  소설의 비중도 높고, 보기에도 잡지라기보다는 두툼한 단행본같은 느낌이다. 책 뒷면 표지의 광고만 빼면 그냥 단편집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그러고보니 본문 중에 광고 페이지가 없다. 그래서 집중도가 높아진 듯 하다. 매우 좋다.)

 

  책을 읽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것은 국내 단편 2편 - 킬힐, 우리동네 살인마 - 였는데, 실제로는 김내성 특집이 제일 재미있었다. 단편인 <제일석간>보다 그의 칼럼 쪽이 더 좋았는데, 그건 미스터리에 대한 그의 감각을 엿볼 수 있음과 더불어 미스터리에 대한 나의 미약한 지식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국내 단편들은 기대보다 밍밍했다. "자아, 놀랐지?"라고 작가는 물어보는데 나는 "아, 여기가 놀랄 부분인가요?"라고 되묻는 기분이었다. 뭔가 내 나름의 짐작을 해야 짐작이 어긋났을 때 놀랄 텐데, 짐작할 만한 실마리를 잡기가 좀 힘들었다. 독자가 반전을 눈치챌까봐 떡밥을 아껴 재미가 덜해졌다는 느낌이다.

 

  국내 단편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미스터리 신인상 수상작인 <위험한 호기심>이었다. 플롯이 제일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캐릭터가 다소 밋밋해서 아쉬웠다. 캐릭터를 보는 맛은 <우리동네 살인마>가 더 있었던 것 같다. 단편 중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막다른 골목>이었는데, 두어 번 더 읽어도 흐름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외 단편으로는 도로시 세이어스의 피터 윔지 경 시리즈인 '알리바바의 주문'이 실렸는데, 요즘 도로시 세이어스의 이름을 자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읽었다. "됐네, 걱정할 건 없네!" 윔지가 말했다. "살아있으니까, 재판은 받을 수 있을 거야."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윔지 경 시리즈는 이렇게 냉소적으로 툭 치고 지나가는 부분이 좋다. 윔지 경은 여전히 유쾌하구나 싶으면서도 이야기의 축이 추리보다는 모험에 치우쳐있어 조금 아쉬웠다.

 

  계간인 만큼 페이지도 많고 읽을 거리가 빵빵해서 야금야금 읽어가는 재미가 있다. 전체적으로 책 같은 이미지인 <2011 계간 미스터리 가을호>에도 매우 잡지 같은 부분이 있는데, 그건 '연재소설'이 있다는 점이다. 국내 장편(중편?)인 <미지의 속삭임>과 <시몬느와 테러리스트들>은 앞부분을 읽지 않아서 내용을 가늠하기 힘들었는데, 그게 좀 아쉬웠다. 등장인물과 줄거리 소개라도 좀 있었으면 내용을 좀 가늠할 수 있었을 텐데 싶다.

 

  신간 안내 부분은 매번 나오는 책을 체크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할 것 같다. 표지와 간단한 소개가 나와있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러 책을 한번에 훑는 느낌이랄까.

 

  미스터리에 대한 잡지를 처음 보는 거라 어떨까 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디자인과 내용이 깔끔하고 빵빵했다는 게 결론이다. 다 읽고 나니 배부른 느낌이 들었다. 계간 미스터리가 월간 미스터리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2011.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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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조현 지음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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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세 개 하고 반.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 

  (미리니름 있습니다) 

 

*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 

  표제작. 맥도널드 햄버거 중 '마이클 버거'라는 이름의 친환경적이고 친문화적인 먹거리(이 햄버거를 구입할 시, 맥도널드사가 독점공급하는 시를 한 수 증정받을 수 있다. 나만의 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추적하는 글이다. 

  그냥 햄버거 하나일 뿐이지만, 이 햄버거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조연이 등장한다. 시인보다 번역가로 이름높았던 마이클 햄버거, 아픈 첫사랑을 간직한 펭귄사 편집인 이본 마멜,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에 대항하기 위해 서점에서 햄버거라는 제목의 책을 모두 끌어모은 마틴 커닝스, 군인이 되어 한국으로 오면서 마이클 햄버거의 시집을 한국으로 가져온 커닝스 주니어, 그리고 마이클 햄버거의 시집에서 영감을 받아 맥도널드의 '마이클 버거'를 기획한 광고회사 C기획 사원 김경주. 그들 개인의 역사와 우연이 겹쳐 마이클 버거는 탄생한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지만, 그 역사는 평행우주의 패스트푸드업계를 뒤바꾸어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을 비롯한 문화도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며 '마이클 버거'를 상상하고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책 속에서 사실 그동안 맥도날드를 향한 비판이 사회학자나 심리학자, 심지어는 예술가나 철학자 사이에서까지(환경론자나 동물 애호가들은 원래 그러했으니 논외로 치고) 꾸준히 제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맥도날드 경영진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저술하는 비판 서적의 영향력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원래 아는 것이 많으면 불평도 많은 법이며 하물며 현대인들이 도대체 책 따위를 읽기는 읽느냐 하는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막강한 영향력과 심리적 효과를 과시하는 방송에서 비판을 개시한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p20~p21) 라는 부분이 기억에 콱 틀어박혔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시를 증정받는 상상도 기분 좋지만, 시와 문학이 깊이 뿌리내려 경제와 함께 자라나는 사회에 대한 상상이 무척이나 기분 좋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작가의 적절한 뻥을 사실에 섞어놓은 기막힌 솜씨가 큰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책을 읽다보면 진짜로 마이클 버거가 맥도날드에 있을 것 같다-라고 작가의 뻥을 뻥으로 받아들이려는 순간(맥도널드에 가서 마이클버거를 찾아봤자 이상한 사람 취급만 받을 테니까), '이건 비틀즈의 멤버가 5명인 평행우주에서 벌어진 일'이라면서 작가는 마지막 변화구를 던진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이 소설을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우리가 확답할 수 없는 차원으로 이야기를 옮겨놓는다. 이 글이 뻥이 아니라 어딘가에서는 사실일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이 나를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

  읽으면서 제일 즐거웠던 단편. 이 글은 T.S.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에 엘리엇의 연인인 메리 설리번이 쓴 글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 미친 영향을 고찰하는 논문(인척 하는 소설)이다. 논문이기 때문에 서술자의 어조는 굉장히 진지하지만, 그 안에는 큰 웃음이 내포되어 있다. 이 논문을 쓴 서술자는 다름아닌 휴머로이드이기 때문이고, 또 휴머노이드들이 인류의 문명을 고찰하며 범하는 오류들이 산재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시인이라는 직업을 고대의 예언자나 마술사와 동일 선상에 놓는다던가). 

  그러나 이 단편이 종국에 말하는 것은 메리 설리번과 그녀의 저술에 대한 감탄도 아니고, 휴머노이드와 인류 사이에 놓인 간격이 불러오는 웃음 아니고, 결국에는 문화/문화의 확산과 그에 관련된 인간의 심리이다. 

  궁극적으로 문화의 보급은 노동계급에 대한 교양의 보편화를 의미한다. ..(중략).. 그러나 자원고갈보다도 나쁜 것은 무조건적인 복제나 추종에 따른 문화의 보편화가 필연적으로 그 문화의 타락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다. (p.48)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가 긍정적인 평행우주를 묘사했다면,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은 휴머노이드 문명 조차도 인류와 비슷한 지경에 몰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함으로써 다소 부정적인 미래를 묘사한다. 그 과정에서 시와 문화, 그리고 문화의 확산에까지 생각이 뻗어나간다. 주체의식 없이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는 것, 그래서 고급 취향이 종국엔 천박한 취향으로 변모하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막을 수 없는) 일일까? 

  우리의 문명은 상징보다는 항상 재생하는 행동에 의해 종말을 유예할 수 있다. (p.57)

( 가벼운 덧붙임 :  이 글을 읽으면서 <트렌드를 읽는 기술>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무엇이 fad를 넘어 trend가 되는가에 대해 쓴 책인데, 아무래도 문화의 확산이라는 부분과 공통점이 있어 그런 듯 하다. )

 

옛날옛적 내가 초능력을 배울 때 /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 / 돌고래 왈츠

: 개인적으로 <옛날옛적 내가 초능력을 배울 때>/<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돌고래 왈츠>는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서 같이 묶었다(물론 줄거리는 전혀 다르다).

  이 세 편의 단편에는 '모호하게 처리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세 단편에서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이들은 '초능력을 배웠다고 주장' 혹은 '목성의 제 8위성 가니메데에서 왔다고 주장'하거나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미래와 우주에서의 나를 안다고 주장'하거나 '고향행성의 석양을 지구말로 번역하고 싶은데 그걸 도와줄 돌고래를 위해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못 받아들일 것도 아니지만(어딘가에는 진짜 인간 사이에 숨어하는 우주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의심쩍어지는 것이다. 이들의 이 말은 진짜일까? 일종의 도피적 은유나 위장은 아닐까? 하고. 부모님에게 혼난 날 대문 앞에서 훌쩍이면서 '나는 사실 주어온 아이고 먼 나라의 왕족일거야'라는 식의 상상을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이런 의심이 든 순간 세 단편에 깃들어져 있는 SF적 소재는 정신질환이라는 소재로 변한다. 이건 마치 소녀-노파 그림같다. 같은 종이지만 보기에 따라 소녀도 되고 노파도 되는.

 오히려 사물의 얼룩이나 정신의 쇠약은(쇠약이라는 말 자체가 편견이긴 하지만) 존재를 각성으로 이끄는 주요한 도구가 되는 거야. 마치 로르샤흐의 카드 열 장이 한 인간의 심연에 그물을 던져 영혼의 깊은 곳에 부유하는 심상을 건져올리듯, 사물이나 정신의 얼굴은 우리가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참조해야 할 교통 표지판과 같은 거야. 정신이 미약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인 셈이지.(p.110) 

   

*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 

: 도제와 나는 소울마스터(다른 지성체의 영혼을 조율함으로써 스스로의 심령을 연마하는)다. 과거의 잘못으로 라파엘 오블리가도 혹은 파야도르라고 불리는 몸으로 전이되는 벌을 받은 '그'는 유형 연장을 신청하고, 도제와 나는 그것을 심사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의 노래를 듣는데....... 

  자신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균류를 파괴한 '그'는 라파엘 오블리가도가 되어 평생 평야를 떠돈다. 그리고 그 평야를 사랑하고, 유형을 연장하길 바란다. 그러나 이 글이 교훈적이고 드라마틱한 글로 남지 않는 것은 고향행성에서 보내온 조언 덕분이다. 

  마지막을 읽고 나서, '그'가 자신이 파괴한 균류의 아픔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았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그것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 정도는 들었던 것 같다. 유형의 연장을 요청한 것을 보면 말이다.

 

* 초설행 

: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사건은 내 생각보다 꽤 깊이 조선왕조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 같다. 초설행에 나온 임금은 성종이지만, 세조가 벌인 일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다. 노비가 된 스승의 딸에게 관의 곡식을 내어주었다가 파관된 아버지로 인해 김우겸이 벼슬길에 나설 가능성은 막힌다. 김우겸은 뛰어난 시를 지어 왕에게 바치고 벼슬길에 오를 권리를 얻었으나, 신하들은 김우겸의 아버지의 일을 들어 반대한다. 

  이 단편은 김우겸이라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세조-예종-성종 시기의 휘몰아치는 뒤끝인 것 같다. 결국 김우겸은 절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지만, 그가 남긴 미련이 자신의 재주나 시 혹은 야망이나 성공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쓸쓸하지만 서럽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에 담긴 단편들을 읽으며, 작가는 정말 대단한 거짓말쟁이로구나 감탄했다. 7편의 단편 중 어느 것이나, 작가는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내서,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그 흐릿한 세계로 사람을 잡아 끈다. 거기에 덧붙여 서술자를 숨기거나('누구에게나~'/'종이냅킨~'),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활용하거나(서술자를 믿느냐 마느냐를 택함에 따라 글의 느낌이 달라진다) 하여 경계를 더욱 흐린다.

  인물이나 배경이나 사건이 아닌, 등장인물이 하는 말이나 관념에 더 주의가 쏠린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직감적으로 와닿는 것은 있지만 그걸 말로 풀어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느낌은 마치 시와 같다. 은유와 비유로 조리해내서 척 보면 알기 힘들고 다소 깊이 사색하며 곱씹어야 진가를 알 수 있는. 

  그래서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몇 번 되돌아가 다시 읽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와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 그리고 <돌고래 왈츠>가 좋았다. 나머지 글들은 아무래도 아직 다 소화시킨 것 같지가 않다.

  

201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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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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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는 별 네 개 반.

  나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좋아하고, 그래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도 읽어봤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읽어본 적은 없다. <일리아드>에도 아이네아스는 나오지만, 포스가 막강한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등등에 눌려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네아스에 대해 앙키세스와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프로디테가 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가끔 개입하고, 싸우는 능력은 그럭저럭 중간이고, 엄마 닮아 미남이고,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표류하다 로마에 도착해 시조가 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라비니아>에 관심을 가진 건 애초에 서사시 <아이네아스>나 인물 '아이네아스'에 대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기반으로, 거기에서 주목받지 못한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 시점으로 풀어낸 이야기라는 데에 흥미를 느꼈다. 고전의 재해석은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다. 

  <라비니아>는 꽤 독특하다. 일단, 이 글은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의 1인칭 시점이다. 그러나 라비니아는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한' 캐릭터이고 그래서 그녀는 관찰자같은 느낌을 풍긴다. 더군다가 이 이야기에는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서사시에 대해 라비니아에게 말해준다. 라비니아는 처음부터 자신이 서사시 속의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런 모호한 정체성은 서사시의 등장인물이 당시 상황을 다시 읊어주는 느낌을 획득한다. 그래서 <라비니아>는 원작의 재해석이라기보다는, 마치 원작에 딸린 주석과 같다.

  <라비니아> 속의 아이네아스는, (내가 호메로스의 시를 보며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그다지 위대한 장수는 아니다.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남자다움이란 곧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때,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전쟁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이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과 싸웠다면 아마 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아이네아스는 쟁쟁한 영웅들 사이에서는 좀 초라한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라비니아>에서 아이네아스는 다른 종류의 영웅적 면모를 보여준다. 사람들을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로써의 모습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써도 자신에게 부끄러움 없이 살려는 "경건한" 모습 말이다. 그는 침묵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인내할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줄도 안다. 그런 아이네아스를 보며 남자다움, 영웅다움이란 싸움에서 이기는 것 이상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비니아>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에는 여전히 아이네아스가 놓여 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와 함께 이야기의 주춧돌로 놓여있기는 하지만 등장횟수 자체는 그다지 보잘 것 없다(더구나 이 이야기는 그의 모험의 끝부분-라티움으로 와서 아이네아스 일행이 정착하는-에 해당한다). 아이네아스가 와서 라티움의 왕이 된 이야기보다, 그 전/후의 이야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핵심은 여전히 아이네아스이다. 아이네아스가 사라진 후에도 그가 미치는 영향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야기 흐름에서 조금 뒤에 물러나 있는 것은 아이네아스 뿐만이 아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앞에서 이야기를 끌고갔던 신들 또한 <라비나아>에서는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다. 그들은 직접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일에 개입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징조와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나타난다. <라비니아> 속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에는 종교가 깊이 개입되어 있고, 그리하여 이러한 간접적인 입김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 

  21C를 살아가는 나에게 이들의 삶의 방식이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삶은 운명적이다. 징조와 계시로 나타나는 것들을 그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네아스는 운명에 의해 방랑하다 라티움에 와 정착했고, 라비니아는 운명에 의해 투르누스가 아닌 아이네아스(라티움의 남자가 아닌 이방인)과 결혼했다. 이러한 운명 또는 숙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은 생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비니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푹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일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만(징조는 모두 현실이 된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과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과 선택 한가운데에 '경건함'이라는 단어가 있다. 인내, 용기, 순응, 믿음- 어떤 단어로 "경건함"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경건함"은 아이네아스에게도 라비니아에게도 그리고 실비우스에게도 있었다. <라비니아>에는 이러한 "경건함"을 갖춘 사람과 "경건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 대한 대비가 두드러지는데, 대체로 "경건함"을 갖춘 사람은 옳은 방향으로 그리고 "경건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나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라비니아의 아버지 vs 라비니아의 어머니, 아이네아스 vs 투르누스, 아스카니우스 vs 실비우스.

  그러나 이 인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이네아스가 투르누스를 격정에 의해 죽이고 운명과 양심에 대해 고민한 것을 보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이러한 아이네아스의 고민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네아스의 고민은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 라비니아와 실비우스에게는, 이러한 갈등을 야기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운명과 경건함, 따르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이 삶과 인간과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던 이야기가 발만 살짝 담그고 빠져나온 느낌이라 무척 아쉬웠다.

  <라비니아>는 로마가 형성되기 전, 조금은 생소한 작은 세계를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라비니아>는 모험보다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모험이 시작되기 전에도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것임을 알게 해 준다. <라비니아>는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쳐들었을 때부터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라비니아나 아이네아스 등의 인물 뿐 아니라, 라티움의 사람들, 그들의 삶과 종교 등이 더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라비니아>는 아주 매혹적이고, 그래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어슐러 르귄 여사는 저자후기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를 현대어로 옮겼을 때 그 매력을 완벽히 살릴 수 없다면, 서사시라는 장르를 소설이라는 장르로 옮기는 변화를 주어 <아이네아스>를 되살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별 관심 없던 서사시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냈으니, 그녀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하다.

  

p.s.

  실비우스와 아스카니우스의 이야기가 더 보고 싶었는데 축약되어 아쉽다. 하지만 라비니아의 이야기니까 어쩔 수 없나 싶다.  

 

201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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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업 -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들이 창조한 위대한 탐정 탄생기
켄 브루언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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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 탐험가들>을 읽고 나서, 데이비드 모렐의 다른 책은 없나 검색해보다가 알게 된 책이다. 이 책이 탄생한 비화는 꼭 한 편의 소설 같다. 스릴러 전문 서점을 경영하던 오토 펜즐러는 경영난이 닥치자 어떻게 서점의 수익을 올릴까 궁리하던 와중에, 유명한 범죄소설 주인공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엮어내어 독자에게 제공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그 기획은 성공했고, 기획의 결과물들을 엮어낸 책이 바로 이 <라인업>이다.

  숨겨진 이야기들은 늘 흥미롭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혹은 캐릭터)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라인업>은 매우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내가 아는 시리즈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라고 생각하며 두근두근거리며 읽기보다는 "오, 이 캐릭터 설명을 보니 이 시리즈는 좀 재미있겠다.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이 책에는 21명의 작가와 시리즈가 등장하고 있는데, 국내에 소개되지 않거나 한두 편만 소개된 시리즈가 많다. 아예 그 작가 자체가 국내에 소개되어 있지 않기도 하다. (아래는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서 나온 정보다. 괄호 안이 작가의 책이 국내 소개된 총 권수, 괄호 안의 괄호는 <라인 업>에서 소개된 시리즈 권수. 막검색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마이클 코넬리와 제프리 디버 외의 작가들은 대부분 소개된 책이 몇 권 없었다. 그리고 절판된 소설은 대부분 1990년대 초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켄 브루언(1권), 리 차일드(4권(시리즈 1)), 존 코널리(3권(시리즈 1)), 로버트 크레이스(4권(엘비스 1, 조 1)), 콜린 덱스터(총 6권 중 3권 절판(시리즈 4권)), 존 하비(없음), 스티븐 헌터(1권(시리즈 1)), 페이 켈러맨(없음), 조너선 켈러맨(조나단 켈러맨? 4권 모두 절판), 존 레스크로아트(없음), 로라 립먼(1권), 데이비드 모렐(15권, 현재 14권 절판), 캐롤 오코넬(없음), 로버트 B. 파커(7권 모두 절판), 리들리 피어슨(3권 모두 절판, 다른 작가와 공저한 피터팬 시리즈 4권 존재), 앤 패리(없음),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3권(시리즈 2)), 이언 랜킨(2권(시리즈 1)), 알렉산더 매컬 스미스(7권(시리즈 5))

  상당히 슬픈 결과다. <라인업>에서 소개된 이 캐릭터를 더 보고 싶다, 라고 생각해도 볼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말하는 내용 자체는 흥미로웠다. 똑같이 자신이 쓴 시리즈물에 나온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집어내는 포인트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작가들마다 다르다. 아예 소설의 한 대목처럼 꾸며서 캐릭터의 약력을 짚어주는 작가도 있고, 그 캐릭터를 만들게 된 계기를 말하는 작가도 있고, 캐릭터의 특징을 말하는 거나 캐릭터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혹은 그 캐릭터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작가도 있다. 그리고, 작가는 범죄소설 주인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뿐이지만, 가만히 읽다 보면 작가의 생각, 환경, 삶이 엿보인다. 캐릭터가 어떻게든 작가의 일부를 이어받는다는 건 꽤 재미있는 발견이다.

  범죄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읽어봄직하다. 어떤 범죄소설이 취향에 맞을 것인가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즐길 수도 있고, 내가 작가라면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낼지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법한 책이다. 꽤 재밌었다.

 

201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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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독방의 문제 동서 미스터리 북스 55
잭 푸트렐 지음, 김우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안락의자 탐정을 좋아한다. 발로 뛰어다니면서 범인을 잡아내는 탐정도 매력적이지만, 앉은 자리에서 기묘한 사건을 단번에 풀어내는 안락의자 탐정에게는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다(천재란 언제 보아도 매력적인 단어다). <13호 독방의 문제>를 읽게 된 것은 이 책에 안락의자 탐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거스터스 S.F.X. 반 도젠 교수의 별명은 무려 '사고 기계'다. 그는 논리대로 풀어나가면 못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이성의 화신 같은 사람이다.

  <13호 독방의 문제>에는 표제작인 '13호 독방의 문제' 외에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단편이 '범행 수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언뜻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가 생각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13호 독방의 문제', '수수께끼의 흉기', '정보 누설', '절단된 손가락', '완전한 알리바이'가 재미있었다. 루벤스 도난사건과 수정점술사, 갈색 윗옷은 조금 시시했다.

 * 13호 독방의 문제 : 가루치약과 5달러짜리 지폐 1장, 10달러짜리 지폐 2장과 잘 닦인 구두만으로 밖으로 나가기까지 7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철통 보안의 교도소에서 일주일만에 탈옥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 반 도젠 교수가 등장하는 첫 단편. "정신은 물질에 우선한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교도소 탈옥을 해 보이는 반 도젠 교수의 솜씨가 재미있었다. 

 

* 사고 기계 조사에 나서다 : 3년 전, 노인으로 변장하여 한 소녀 앞에서 서류에 사인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것을 의뢰받았던 한 배우의 기묘한 경험을 듣고 반 도젠 교수는 범죄가 얽혀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배우는 의뢰한 사람도, 연기했던 장소도 모르는 상태이고 아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난 날짜 뿐이다. 반 도젠 교수는 어떻게 범인을 찾아낼까? 

-> "범인이 왜 그랬는지"는 한눈에 파악이 가능했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반 도젠 교수의 솜씨를 보면서 감탄했다. 이번에는 해친슨 해치를 시키는 게 아니라 반 도젠 교수가 직접 조사에 나서는 게 흥미롭다. 서술자인 '나'가 뒤에 나왔으면 좋을텐데, 이번 단편 앞에만 조금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져서 아쉽다. 

 

* 수수께끼의 흉기 : 바이올렛 던베리 양이 자택 방에서 사망한다. 앞에는 깨어진 유리잔이 있고, 입술에는 가볍게 맞은 듯한 흔적과 왼쪽 뺨에 작은 상처가 나 있다. '폐에 공기가 없어진' 것이 사망 원인이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결론내리려 하지만, 얼마 후 부둣가에서 일하는 헨리 샘너가 똑같은 증상으로 사망한다. 둘을 살해한 방법은? 

-> 범인을 짐작하기란 역시 쉽다. 그런데 범행 수법이 궁금했다. 학교 다닐 때 배워서 다 아는 건데 실제로 범행에 적용해서 번뜩! 하고 떠오르지를 않는다. 

 

* 불꽃에 휩싸인 유령 : 해친슨 해치 기자는 유령이 나온다는 웨스턴 저택에 취재를 갔다가 불꽃에 휩싸인 유령을 목격한다. 유령의 정체는 무엇인가? 

-> 불꽃에 휩싸인 유령에 대해 반 도젠 교수가 설명할 때, 어쩐지 '바스커빌 가의 개'가 생각났다. 

 

* 정보 누설 : 금융자본가와 그의 속기사 이외에는 모르는 정보가 매번 다른 투자자에게 빠져나간다. 그러나 속기사는 주식시장이 열리기 30분 전에야 이 정보를 알고, 방을 나가거나 전화를 걸거나 하지도 않고 꼼짝않고 책상에 앉아있다. 어떻게 정보가 누설되는 것일까? 

-> 소거법을 이용해보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백하지만, 대체 어떻게 정보 누설이 가능한지 감이 안 와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좋은 말로 포장하지만 금융자본가가 하는 일이 명백한 주가 조작이라 찜찜했는데, 마지막에 반 도젠 교수가 한 방 먹여줘서 시원했음! 

 

* 절단된 손가락 : 한 여인이 멀쩡한 손가락을 절단해달라며 찾아온다. 그녀가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한 이유는? 

-> 범행 수법이 아닌 동기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 익숙한 듯한 흐름인데도 재미있다. 

 

* 루벤스 도난사건 : 그림수집가에게 부탁해 그의 화랑에서 일주일 간 그림을 모사한 화가. 그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그림수집가와 화가, 둘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작품의 모사를 끝내고 화랑의 정리를 도우려던 때, 루벤스의 그림이 사라진 것이 발견된다! 

-> 이 작품은 범인은 물론 수법까지 짐작이 가능해서 좀 재미가 없었다. 

 

* 수정 점술사 : 한 사업가가 수정 점술가의 수정에서 자신이 자신의 서재에서 어떤 남자에게 살해되는 장면이 비치는 것을 목격한다. 사업가는 자신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없겠느냐며 반 도젠 교수를 찾아오는데....... 

-> 이 작품도 좀 별로였다. 반 도젠 교수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런 장치가 가능할까? 장치 설치비도 만만찮을 거 같은데, 동기가 아무래도 좀 약한 느낌이 든다. 

 

* 갈색 윗옷 : 은행에서 11만 달러를 훔친 도둑이 잡힌다. 그러나 돈을 숨긴 곳은 찾을 수 없고, 범인은 돈을 숨긴 곳을 알려주는 것을 빌미로 협상을 요구한다. 

-> "어디에 돈을 숨겼을까"가 포인트인데, 도둑이 부인에게도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반 도젠 교수는 그래도 결국 돈을 숨긴 곳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 사라진 목걸이 : 영국에서 유서깊은 진주목걸이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레이턴이라는 유력한 용의자의 뒤를 쫓아 콘웨이 주임경감이 레이턴과 같은 유람선을 타고 미국으로 온다. 그러나 유람선에 있는 시간동안 어디에서도 진주목걸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 콘웨이 주임경감이 목걸이를 찾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재미있었다; 

 

* 완전한 알리바이 : 청년실업가 포레스트가 아파트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그의 시신 곁에는 범행 시간과 범행 동기와 범인의 이름을 적은 쪽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체이스는 범행 시각인 새벽 2시에 치과의사의 치료를 받았다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 끝까지 다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읽으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처음에 읽을 때는 그냥 대충 지나가게 되어서... 어쨌든 단서는 다 앞에 있고, 다잉메시지는 거짓말이 아니다. 트릭은 사실 엄청 단순하다. 그런데 그 트릭이 수반하는 위험 때문에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다. 

 

* 빨강 실 : 밤마다 가스등을 켜놓고 자는 습관이 있는 젊은 주식중개인. 그러나 밀실인 방에서 가스등이 꺼지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어떻게 된 일일까?

->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인데, 반 도젠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또 쉬운 일 같다. 가스등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으면 트릭을 풀기는 힘들 것 같다. ㅎㅎ

  반 도젠 교수는 참 이성적인 성격이라 '사고 기계'라는 별칭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자주) 인간과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13호 독방의 문제>에서는 반 도젠 교수의 외모를 자주 묘사하는데, 왜소한 몸집, 작은 키, 주름살투성이의 얼굴, 넓은 이마와 부스스한 노란 머리카락 등의 묘사는 그를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학자이자 탐정으로 보이게 하기보다는 기인으로 보이게 한다. 가만히 보면 독자의 뇌리에 틀어박히게 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기묘하게 그를 설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2 더하기 2는 4이다. 이따금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반드시 그렇다."라는 게 반 도젠 교수의 입버릇인데) 이 말을 할 때의 반 도젠 교수나,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신경질을 내는 교수는 좀 귀엽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소위 말하는 '탐정의 조수' 역할인 해친슨 해치 기자와 반 도젠 교수와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보통 탐정에게 끌려다니거나 탐정을 경외하는 조수와 달리 이 둘은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해치는 특종 기사를 위해서 도젠 교수를 따른다(도젠 교수의 능력에 감탄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해치에게는 기사가 우선! 이랄까). 그리고 도젠 교수는 이런저런 일을 조사할 때 해치를 부려먹는다. 이런 건조하면서 밀착된 관계도 재미있다.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책이 그렇게 두껍지 않은데 생각보다 단편이 많이 들어 있어서 좋다. 하지만 번역은 좀 그렇다. 중간중간 문장이 꼬여서 몇 번 읽어야 문장 뜻을 알 수 있는 문장들이 보였다.  

 

2011.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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