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조현 지음 / 민음사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별 세 개 하고 반.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 

  (미리니름 있습니다) 

 

*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 

  표제작. 맥도널드 햄버거 중 '마이클 버거'라는 이름의 친환경적이고 친문화적인 먹거리(이 햄버거를 구입할 시, 맥도널드사가 독점공급하는 시를 한 수 증정받을 수 있다. 나만의 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추적하는 글이다. 

  그냥 햄버거 하나일 뿐이지만, 이 햄버거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조연이 등장한다. 시인보다 번역가로 이름높았던 마이클 햄버거, 아픈 첫사랑을 간직한 펭귄사 편집인 이본 마멜,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에 대항하기 위해 서점에서 햄버거라는 제목의 책을 모두 끌어모은 마틴 커닝스, 군인이 되어 한국으로 오면서 마이클 햄버거의 시집을 한국으로 가져온 커닝스 주니어, 그리고 마이클 햄버거의 시집에서 영감을 받아 맥도널드의 '마이클 버거'를 기획한 광고회사 C기획 사원 김경주. 그들 개인의 역사와 우연이 겹쳐 마이클 버거는 탄생한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지만, 그 역사는 평행우주의 패스트푸드업계를 뒤바꾸어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을 비롯한 문화도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며 '마이클 버거'를 상상하고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책 속에서 사실 그동안 맥도날드를 향한 비판이 사회학자나 심리학자, 심지어는 예술가나 철학자 사이에서까지(환경론자나 동물 애호가들은 원래 그러했으니 논외로 치고) 꾸준히 제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맥도날드 경영진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저술하는 비판 서적의 영향력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원래 아는 것이 많으면 불평도 많은 법이며 하물며 현대인들이 도대체 책 따위를 읽기는 읽느냐 하는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막강한 영향력과 심리적 효과를 과시하는 방송에서 비판을 개시한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p20~p21) 라는 부분이 기억에 콱 틀어박혔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시를 증정받는 상상도 기분 좋지만, 시와 문학이 깊이 뿌리내려 경제와 함께 자라나는 사회에 대한 상상이 무척이나 기분 좋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작가의 적절한 뻥을 사실에 섞어놓은 기막힌 솜씨가 큰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책을 읽다보면 진짜로 마이클 버거가 맥도날드에 있을 것 같다-라고 작가의 뻥을 뻥으로 받아들이려는 순간(맥도널드에 가서 마이클버거를 찾아봤자 이상한 사람 취급만 받을 테니까), '이건 비틀즈의 멤버가 5명인 평행우주에서 벌어진 일'이라면서 작가는 마지막 변화구를 던진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이 소설을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우리가 확답할 수 없는 차원으로 이야기를 옮겨놓는다. 이 글이 뻥이 아니라 어딘가에서는 사실일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이 나를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

  읽으면서 제일 즐거웠던 단편. 이 글은 T.S.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에 엘리엇의 연인인 메리 설리번이 쓴 글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 미친 영향을 고찰하는 논문(인척 하는 소설)이다. 논문이기 때문에 서술자의 어조는 굉장히 진지하지만, 그 안에는 큰 웃음이 내포되어 있다. 이 논문을 쓴 서술자는 다름아닌 휴머로이드이기 때문이고, 또 휴머노이드들이 인류의 문명을 고찰하며 범하는 오류들이 산재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시인이라는 직업을 고대의 예언자나 마술사와 동일 선상에 놓는다던가). 

  그러나 이 단편이 종국에 말하는 것은 메리 설리번과 그녀의 저술에 대한 감탄도 아니고, 휴머노이드와 인류 사이에 놓인 간격이 불러오는 웃음 아니고, 결국에는 문화/문화의 확산과 그에 관련된 인간의 심리이다. 

  궁극적으로 문화의 보급은 노동계급에 대한 교양의 보편화를 의미한다. ..(중략).. 그러나 자원고갈보다도 나쁜 것은 무조건적인 복제나 추종에 따른 문화의 보편화가 필연적으로 그 문화의 타락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다. (p.48)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가 긍정적인 평행우주를 묘사했다면,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은 휴머노이드 문명 조차도 인류와 비슷한 지경에 몰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함으로써 다소 부정적인 미래를 묘사한다. 그 과정에서 시와 문화, 그리고 문화의 확산에까지 생각이 뻗어나간다. 주체의식 없이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는 것, 그래서 고급 취향이 종국엔 천박한 취향으로 변모하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막을 수 없는) 일일까? 

  우리의 문명은 상징보다는 항상 재생하는 행동에 의해 종말을 유예할 수 있다. (p.57)

( 가벼운 덧붙임 :  이 글을 읽으면서 <트렌드를 읽는 기술>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무엇이 fad를 넘어 trend가 되는가에 대해 쓴 책인데, 아무래도 문화의 확산이라는 부분과 공통점이 있어 그런 듯 하다. )

 

옛날옛적 내가 초능력을 배울 때 /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 / 돌고래 왈츠

: 개인적으로 <옛날옛적 내가 초능력을 배울 때>/<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돌고래 왈츠>는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서 같이 묶었다(물론 줄거리는 전혀 다르다).

  이 세 편의 단편에는 '모호하게 처리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세 단편에서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이들은 '초능력을 배웠다고 주장' 혹은 '목성의 제 8위성 가니메데에서 왔다고 주장'하거나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미래와 우주에서의 나를 안다고 주장'하거나 '고향행성의 석양을 지구말로 번역하고 싶은데 그걸 도와줄 돌고래를 위해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못 받아들일 것도 아니지만(어딘가에는 진짜 인간 사이에 숨어하는 우주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의심쩍어지는 것이다. 이들의 이 말은 진짜일까? 일종의 도피적 은유나 위장은 아닐까? 하고. 부모님에게 혼난 날 대문 앞에서 훌쩍이면서 '나는 사실 주어온 아이고 먼 나라의 왕족일거야'라는 식의 상상을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이런 의심이 든 순간 세 단편에 깃들어져 있는 SF적 소재는 정신질환이라는 소재로 변한다. 이건 마치 소녀-노파 그림같다. 같은 종이지만 보기에 따라 소녀도 되고 노파도 되는.

 오히려 사물의 얼룩이나 정신의 쇠약은(쇠약이라는 말 자체가 편견이긴 하지만) 존재를 각성으로 이끄는 주요한 도구가 되는 거야. 마치 로르샤흐의 카드 열 장이 한 인간의 심연에 그물을 던져 영혼의 깊은 곳에 부유하는 심상을 건져올리듯, 사물이나 정신의 얼굴은 우리가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참조해야 할 교통 표지판과 같은 거야. 정신이 미약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인 셈이지.(p.110) 

   

*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 

: 도제와 나는 소울마스터(다른 지성체의 영혼을 조율함으로써 스스로의 심령을 연마하는)다. 과거의 잘못으로 라파엘 오블리가도 혹은 파야도르라고 불리는 몸으로 전이되는 벌을 받은 '그'는 유형 연장을 신청하고, 도제와 나는 그것을 심사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의 노래를 듣는데....... 

  자신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균류를 파괴한 '그'는 라파엘 오블리가도가 되어 평생 평야를 떠돈다. 그리고 그 평야를 사랑하고, 유형을 연장하길 바란다. 그러나 이 글이 교훈적이고 드라마틱한 글로 남지 않는 것은 고향행성에서 보내온 조언 덕분이다. 

  마지막을 읽고 나서, '그'가 자신이 파괴한 균류의 아픔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았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그것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 정도는 들었던 것 같다. 유형의 연장을 요청한 것을 보면 말이다.

 

* 초설행 

: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사건은 내 생각보다 꽤 깊이 조선왕조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 같다. 초설행에 나온 임금은 성종이지만, 세조가 벌인 일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다. 노비가 된 스승의 딸에게 관의 곡식을 내어주었다가 파관된 아버지로 인해 김우겸이 벼슬길에 나설 가능성은 막힌다. 김우겸은 뛰어난 시를 지어 왕에게 바치고 벼슬길에 오를 권리를 얻었으나, 신하들은 김우겸의 아버지의 일을 들어 반대한다. 

  이 단편은 김우겸이라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세조-예종-성종 시기의 휘몰아치는 뒤끝인 것 같다. 결국 김우겸은 절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지만, 그가 남긴 미련이 자신의 재주나 시 혹은 야망이나 성공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쓸쓸하지만 서럽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에 담긴 단편들을 읽으며, 작가는 정말 대단한 거짓말쟁이로구나 감탄했다. 7편의 단편 중 어느 것이나, 작가는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내서,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그 흐릿한 세계로 사람을 잡아 끈다. 거기에 덧붙여 서술자를 숨기거나('누구에게나~'/'종이냅킨~'),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활용하거나(서술자를 믿느냐 마느냐를 택함에 따라 글의 느낌이 달라진다) 하여 경계를 더욱 흐린다.

  인물이나 배경이나 사건이 아닌, 등장인물이 하는 말이나 관념에 더 주의가 쏠린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직감적으로 와닿는 것은 있지만 그걸 말로 풀어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느낌은 마치 시와 같다. 은유와 비유로 조리해내서 척 보면 알기 힘들고 다소 깊이 사색하며 곱씹어야 진가를 알 수 있는. 

  그래서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몇 번 되돌아가 다시 읽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와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 그리고 <돌고래 왈츠>가 좋았다. 나머지 글들은 아무래도 아직 다 소화시킨 것 같지가 않다.

  

2011. 11. 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