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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버지의 고기잡이 ㅣ 한국대표시인 시선 2
김명인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1년 6월
평점 :
내가 좋아하는 김명인시인의 시를 읽었다.
이 시집은 김명인시인의 시선집 같은 책이다. 어떤 기준으로 시를 모았는지, 그 양이 작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모아진 시를 읽는 것은 행복이다. 더구나 e-book으로 아무때나 책을 꺼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읽을 수 있다니.
다만, 처음 e-book을 구매하며 아무 때나 어느 곳에서나 시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었다. 회의 중에 몰래 꺼내 읽는 시. 정말로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었다. 지루한 시간을 메우는 상상력의 그늘.
문제는 시를 그런 짧은 시간 내에 집중해서 읽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과 공간이 상상력의 세계로 빠져드는데 요구되었다. 따라서 회의중에 읽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따분한 오후의 칸막이 사이에서 당당하게 꺼내 읽을 수는 있었다. 책을 책상에 꺼내 놓고 읽는 건 상상할 수 없지만 스마트폰을 꺼내 읽을 순 있었다. 그런 정도는 사회에서도 허용되니까.
어쨋든 김명인시인의 시를 읽을 수 있는 오후의 시간은 자꾸만 따뜻해져서 좋았다.
1. 동두천II
내가 김명인시인의 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는 동두천II이다. 예전 이 시를 읽으며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그 가슴 아림은 여전히 나를 떨리게 한다. 슬픈 현실에서 갑자기 빠져들던 환상의 또다른 슬픈 세계. 특히 3연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화가 나 나는 반장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니
이빨이 부러졌고
함께 울음이 되어 넘기던 책장이여 꿈꾸던
아메리카여
무엇을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없어서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와
무서워서 아무도 깨뜨리지 않으려던 저 깊은 침묵
오래지 않아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떠나왔다
('동주천II'에서 2연 마지막 2행 ~ 3연 ~ 4연 첫행)
리듬, 이미지, 메시지 모두 빼어난 저 3연은 철저한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 김명인시인을 만났을 때 일이었다.
2. 푸른 강아지와 놀다
다른 시를 더 소개하자면, '푸른 강아지와 놀다'를 들고 싶다.
이 시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다른 시들도 좋기에 이 시가 특출나다고 말할 능력도 없지만
김명인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상에 빠지기 좋은 시 같았다.
거리 끝에는 구름 사이로 드리운 거울이 있어
가없는 깊이 속으로 작은 강아지를 풀어놓는다
......
꿈들은 강아지가 되어 햇빛과 더불어 뛰놀기도 하면서
세월 없이 부서지는 분수의 까마득한 꼭대기로 떠받들린다
('푸른 강아지와 놀다' 중에서)
시인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구름 사이로 꿈들이 강아지가 되어 뛰노는 곳은 어디일까.
알길 없는 그 곳은 시를 읽어도 알기 어렵겠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이미지들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를 즐거운 곳에서 놀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어쩌면 이런 이미지들은 내가 좋아하는 전형적인 공간의 환상을 나타내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 디뎌지지 않은 영원의 계단들
생각은 빈틈없이 여며진 허공의
손잡이를 당겨보면서
못다 오른 층계가 거기 있다는 듯이
환한 햇살 속으로 천천히 이끌려 올라가겠지
('푸른 강아지와 놀다' 마지막 부분)
위의 구절처럼 어떤 허공 속으로 천천히 이끌려 가는 나를 보는 것이 좋아서
내가 이 시를 좋아하고 김명인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3. 침묵
마지막으로 '침묵'이라는 시를 말하고 싶다.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라는 시구로 끝나는 이 시는 나에게 어떤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김명인시인의 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물론 전혀 다른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이 몽롱한 현상은 시를 읽는 사람에게 마음의 치유를 줄 것이다.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보고 있는 나는 그 속에서 부는 바람에 밀려 떠다니겠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을 견딤으로서 현실을 견디는 힘을 주고, 견뎌온 현실을 되새김으로서 지금 있는 이 시간을 감사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침묵' 중에서)
내가 있는 시간이 견디기 쉬운 시간인지 어려운 시간인지 모르겠으나
침묵 속에서 이 시를 읽다보면 어떤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지켜보는 나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