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완전판) - 0시를 향하여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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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골든 에이지의 수많은 작가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몇몇을 꼽자면 아서 코난 도일, S.S. 밴 다인을 포함한 몇 명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경애를 담아 사랑하는 작가를 한 명 꼽자면 단연 이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죠. 오늘 리뷰할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0시를 향하여입니다.

 


 이혼한 부부인 오드리와 네빌은 우연히 네빌의 아주머니인 트레실리안 부인의 집에서 동시에 휴가를 보내게 됩니다. 네빌의 현 부인인 케이가 오드리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네빌은 케이와 오드리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오드리는 무언가 겁에 질린 듯한 상태에서 셋 사이엔 묘한 기류가 흐릅니다. 와중에 저택에 초대받았던 늙은 범죄 전문가인 트레비스가 무언가를 암시하듯이 오래된 범죄 이야기를 꺼내지만, 그는 어쩐 일인지 호텔로 돌아가던 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아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사고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트레실리안 부인 역시 네빌과 언성을 높여 싸운 뒤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네빌이 살인자로 지목당하지만 어쩐지 사건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그 수가 많고 나온 시대가 백수십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높은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의 다양한 매체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되고 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물론이고, 그 외 많은 작품들이 재미에 충실할 뿐 아니라 다양하고 참신한 구성적 장치를 이용하고 있지요. 이 0시를 향하여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충격적인 반전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 전반에 깔리는 범인의 음습한 악의와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한 교묘한 트릭을 보여줌으로서 훌륭한 추리소설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정황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가는 거야.
 그리고 정해진 시각이 되었을 때 정점으로 치닫는 거지.
 0시라고 해 두세. 그렇지, 모든 것이 0시를 향해 모여드는 거야……

 <0시를 향하여> P.13

 

 

 


 무엇보다도 제가 이 소설을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로 꼽는 이유는,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소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드러난 저 대사 때문입니다. 추리소설의 전개에서 그 정점 - 그것이 어떤 종류의 흉악 범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건, 아니면 범인을 밝혀내거나 재판에서 그 죄의 무게가 매겨지는 순간이라도 - 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수많은 요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 어떤 한 가지라도 결핍되었더라면 피해갈 수 있었던 이 결정적인 순간은 마치 모든 요소들이 그 결과를 알고 차근히 모여든 것처럼 ‘0시를 향하여’ 다가왔기 때문에 발생한 거죠. 소설 속에서 트래비스의 대사로 표현되는 저 ‘0시’는 추리소설의 정점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말입니다. 단지 이 소설에 국한해서가 아니라, 모든 추리소설을 말이죠.

 


 이 소설 역시 0시를 향해 달려나갑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갖춘 미덕 한 가지는 소설을 읽으며 대부분의 독자가 생각한 곳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0시가 등장한다는 점이지요. 충격적인 반전이라고 할 순 없지만 사건은 독자들이 예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독자들은 그 때서야 소설 전반에 깔리는 살인자의 그림자와 그 악의, 그리고 교묘한 트릭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범행 동기나 범죄자의 심리가 단순하게 그려졌던 반면 이 소설의 범인은 그 때 당시 알려지지도 않았던 사이코패스라는 개념과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보여 그 부분 역시 흥미롭습니다.

 


 상당히 유명하고 고전적인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치밀한 트릭이나 독자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범인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반전을 숨겨놓는 현대 미스터리에 익숙해지신 분들이라면 다소 심심하실 수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0시를 향하여에는 결코 최근의 미스터리/스릴러물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전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추리소설 장르 전반을 꿰뚫는 이해와 클래식한 전개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추천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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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형사 피터 다이아몬드 시리즈 1
피터 러브시 지음, 하현길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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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지막’이라는 말은 어쩐지 안타깝고 쓸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한 시대의 종말, 그리고 교체를 바라보아야 하는 지난 세대의 아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에 그야말로 지나간 세대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형사가 있습니다. 피터 다이아몬드, 경찰대학에서 컴퓨터 관련 학위나 받고 졸업한 친구들과는 달리 발로 뛰며 잔뼈가 굵은 진짜 수사관이지요. 오늘 리뷰를 쓸 책은 그가 등장하는 첫 번째 시리즈인 피터 러브시의 마지막 형사입니다.


 영국의 아름다운 마을 바스, 호수에서 벌거벗은 채로 사망한 여인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사체에는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도 남아있지 않고, 며칠간 수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체는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공개수사 끝에 결국 사체의 신원은 TV 드라마에 나오던 여배우라는 것이 밝혀지고, 피터 다이아몬드는 수사를 통해 남편과 여배우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있었으며 부부 각자에게 내연의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내는데요.


 소설은 시간적 배경이 1980년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클래식한 갈등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방탕한 부인이 피살되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었음이 밝혀지지요. 남편에게는 비록 젊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성실하고 착실한 - 즉 아내와는 정반대인 - 내연녀가 있으며, 남편과 내연녀는 둘 모두 아내를 살해할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즉 포와로의 말처럼 ‘아내가 죽었을 땐 남편을, 남편이 죽었을 땐 아내를 의심하라’는 대전제의 조건을 아주 충분히 갖춘 셈입니다.


 처음에 소설은 그 대전제를 따라 흘러가는 듯 보입니다. 말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극구부인하면서도 남편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리고, 경찰은 수사 끝에 다나 디드릭슨을 찾아내지만 그녀는 경찰이 찾아가자마자 도망을 치지요. 결국 남편이 진술한 것보다 아내와 다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음이 밝혀지고, 사건은 다나의 범행으로 결론이 지어지는 듯 합니다.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경찰을 그만 둔 피터 다이아몬드는 어쩐지 사건이 미심쩍고, 이 사건에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숨겨진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해요.


 소설은 이때부터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 피터 다이아몬드의 시점에서 쫓기 시작합니다. 플롯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피터 러브시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바로 이 때부터지요. 소설 전반에 걸쳐서 뿌려졌던 진짜 단서들이 일시에 취합되면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차근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과학수사로 그 출처를 밝힐 수 있는 섬유 한 올, 모래 한 알과 같은 단서가 아닙니다. 피살자의 성격과 내연관계에 대한 비밀, 그리고 중요한 증거가 실종되고 이내 발견된 이유와 같은 사건 전반에 걸친 미스터리들이 풀리는 거지요. 이러한 과정을 동해 피터 러브시는 이러한 증거들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진짜 형사, 마지막 형사인 피터 다이아몬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제가 느낀 바로는 이런 무대를 꾸미는 것 역시 플롯의 제왕인 피터 러브시여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애거서 크리스티를 능가한다고 홍보하던 어떤 작품을 읽어보았습니다만, 아주 개인적으로 오히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더욱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클래식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어요. 탄탄한 플롯을 자랑하는 고전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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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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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땅한 셜록 홈즈 완역본조차도 없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우리 나라 장르소설계도 북유럽 추리소설이 들어올 정도로 파이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북유럽 장르문학으로 저도 한번 소개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가 있고,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두르 시리즈 역시 북유럽 추리소설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이지요.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작품은 현재 북유럽 문학의 총아라고 불리는 요 네스뵈의 소설, 스노우맨입니다.

 

 첫 눈이 내리는 노르웨이의 오슬로, 한 아이의 어머니가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남은 것은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거대한 눈사람, 그리고 그 목에 둘러진 아이 어머니의 목도리뿐이지요. 오슬로 경찰청의 반장이자 언론이 주목하는 스타 경찰관인 해리 훌레는 노르웨이의 동거 및 기혼여성의 실종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 사건 역시 연속된 실종사건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수사에 나섭니다. 한편 솔리회위다의 숲에서 또다시 비슷한 유형의 실종사건이 발생하고, 눈사람의 몸통 위에서 여성의 사체 일부가 발견되는데요.

 

 개인적으로 제가 북유럽 장르문학에 대해서 받았던 인상은 서늘하면서도 묵직하다는 것이었는데요, 영미 스릴러가 숨쉴 새 없이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것에 비해 북유럽의 스릴러는 상대적으로 느리고 묵직한 호흡을 보여주지 않나 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북유럽 추리소설의 속성만을 갖췄다기보다는 미국과 북유럽 스릴러의 장점을 적절히 섞어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습니다. 소설은 빠른 속도로 연달아 발생하는 사건을 그리며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을 놓을 수 없게 합니다. 몇십년 전의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오가며 사건에 관련된 복선을 던지고, 주인공인 해리 훌레가 노르웨이 전역을 아우르며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 종횡무진하지요. 독자들은 사건의 진행을 따라잡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의 뒤를 쫓아야만 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영미 스릴러의 리듬감에 북유럽의 불친절한 서늘함을 갖춘 소설이라고 할까요.

 

 스노우맨은 참으로 다양한 매력을 자랑합니다. 민첩하고 마른 몸에 수사를 위해서는 무슨 일도 마다않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여자에게 순정적인 사랑을 바치는 해리 훌레의 캐릭터가 그러하고, 풍부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소설을 읽으며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것은 눈사람이라는 소재가 소설 속에서 참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작가는 긴장감있는 전개를 위해 눈사람이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몇몇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단순히 실종과 살인의 잔혹함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에요. 친숙한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인간이 갖는 두려움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구성적 장치로서 눈사람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가정의 붕괴나 해체를 ‘녹을 수밖에 없는’ 눈사람의 운명과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눈사람이 정신적·육체적으로 불완전한 범인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녹고 부서질 눈사람이 정서적으로 불안한 범인을 의미하는 것은 소설 초반부터 알 수 있었지만, 범인을 찾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육체적 결함 역시 눈사람과 닮아 있다는 건 요 네스뵈가 의도한 메타포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아니었나 합니다.

 

 소설을 읽으며 왜 요 네스뵈에게 ‘북유럽의 할런 코벤’ 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알만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 번쯤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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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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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마는 쇼코의 이력서를 꺼내 변호사에게 내밀었다.
“이 사진 속 사람이 세키네 쇼코 씨 맞죠?”
미조구치 변호사가 이력서를 내려다보았다. 혼마가 열까지 헤아릴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시간의 길이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실감했다.

 

설마,
단기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아닙니다.”
변호사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그것이 순식간에 더러운 것으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력서를 혼마 쪽으로 밀쳐내며 말했다.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어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

<화차> 中, 미야베 미유키 作

 


 가장 좋아하는 일본 미스터리 작가를 꼽으라면 누가 생각나세요?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 미스터리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 본격 미스터리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 서술트릭의 대가 오리하라 이치 등 수없이 많은 이름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중에서도 현대 일본 미스터리, 특히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죠. 바로 오늘 소개할 화차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입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적 문제를 담은 미스터리를 훌륭하게 써 내는 일본 중견 미스터리 작가입니다. 물론 판타지나 에도물도 많이 쓰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미미여사의 진가는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에 화차의 재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굉장히 기뻤습니다. 기존의 번역본에서 누락된 원고지 500장 분량의 원고를 보충하여 재출간하는 화차는, 이유에 버금가는 미미여사의 대표작으로서 다시금 한국 독자들에게 사회파 미스터리의 여왕인 미야베 미유키의 위상을 보여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예상은 전혀 틀리지 않았습니다.

 

 혼마 슌스케는 현장에서 강도를 제압하다가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휴직중인 경찰입니다. 재활에 애쓰며 복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혼마에게 어느 날 아내의 사촌조카인 구리사카 가즈야가 찾아오는데요, 그는 혼마에게 갑자기 사라져버린 약혼녀 세키네 쇼코를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가즈야가 밝힌 그녀의 실종 경위는 참으로 기묘합니다. 결혼 준비를 위해 그녀의 명의로 신용카드를 신청했다가 그녀가 개인파산을 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혹감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시간을 달라고 했던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으레 있는 실종사건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한 혼마는 그녀가 개인파산을 신청했다던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곳으로 개인파산을 신청하러 온 세키네 쇼코와 가즈야가 찾고 있는 세키네 쇼코가 다른 사람이었던 겁니다.

 

 이후 이야기의 초점은 ‘그녀는 왜 사라졌는가?’에서 ‘그녀는 누구인가?’로 급격히 옮겨갑니다. 혼마는 가즈야가 찾아달라고 부탁한 그녀의 뒤를 쫓는 한편, 그녀가 사칭한 진짜 세키네 쇼코의 인생을 되짚어가요. 소설은 그녀가 왜 세키네 쿄코를 사칭했는지, 어떻게 사칭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진정한 그녀는 누구인지 추적하며 미스터리적 요소를 부각시킵니다. 물론 미야베 미유키가 늘 그렇듯이, 그녀의 글은 다른 작가들이라면 문장 하나로 날려버렸을 법한 사소한 일도 차근히 설명하고 얼핏 보기에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건도 일일이 짚고 넘어가므로 그녀의 뒤를 쫓는 혼마의 행보는 숨가쁜 서스펜스완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긴장감은 떨어지지 않고, 그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야만 했던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녀가 왜 극단적인 선택까지 해 가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자 했는지, 왜 하필 세키네 쇼코를 선택했는지 깨닫게 되지요.

 

 또한 이야기는 진짜 세키네 쇼코의 인생을 따라가며 당시 일본에 만연했던 신용구매와 대출 문제를 짚어냅니다. 당시 일본의 신용구매 및 대출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 커다란 사회적 문제였지요. 신용구매 및 대출, 개인파산 등과 같은 문제가 그저 어떤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할 독자들을 미리 예상한 것인지 미야베 미유키는 그것은 단지 일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제도적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변호사와 혼마의 대화를 통해 그 문제를 교통사고에 비유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장면 중 하나였어요.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독자들은 왜 살고자 발버둥치는 그녀의 모습이 가련하면서도 섬뜩한 여운을 남기는 것인지 차츰 이해하게 됩니다. 또다른 자신으로 선택한 세키네 쇼코를 파멸로 몰아넣고 그저 안온한 삶을 위해 달려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그녀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넣은 그 회사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뒤집어쓰는 게 자기네 회사만 아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그 회사들처럼, 그녀가 이전의 ‘빚’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떤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것이 미야베 미유키가 의도한 아이러니였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녀가 그 곳으로 떨어진 것은 자의도 아니거니와 사회가 책임을 어느 정도 지고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그것을 헤쳐나오는 방법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선택은 그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미야베 미유키의 솜씨를 보고싶으시다면 이유와 함께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소설이라는 평에 동감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참으로 미야베 미유키스러운 소설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녀의 팬이시라면, 혹은 그녀의 팬이 아니시더라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보고 싶으시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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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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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 너희를 절대로 용서 못해.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범인을 찾아내.
그렇게 못하겠으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속죄를 하라고.
그것도 안 하면 난 너희들에게 복수할거야.
난 너희 부모보다 훨씬 더 많은 돈과 권력이 있어.
내가 기필코 너희들을 에미리보다 더 처참하게 만들어 놓을 거야.
에미리의 부모인 나한테만은 그럴 권리가 있어.”
 
<속죄> 中, 미나토 가나에 作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 라고 담담하게 고백하던 여교사를 기억하시나요? 뛰어난 플롯과 이야기,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로 인기를 끌었던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인상깊게 보셨다면, 그녀의 다른 소설보다 꼭 이 소설을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오늘 리뷰를 쓸 소설인,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입니다.

 

 공기가 깨끗한 어느 산골 마을, 추석을 얼마 안 남긴 어느 날 도쿄에서 전학 온 에미리가 낯선 사람에게 살해당합니다. 목격자는 함께 놀던 동네 아이들. 범인은 환기구 조사원이라는 핑계를 대고 에미리만을 불러내 처참하게 살해한 뒤 사라져버리고, 네 명의 여자아이들은 아무도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진전되지 못하고, 결국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 되는 듯 하지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에미리의 어머니는 넷을 불러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면 너희를 에미리보다 비참하게 만들어버리겠다며 저주를 퍼붓는데요. 에미리의 유괴와 살해, 그리고 그 사건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던 어머니의 저주…. 이 사건들이 아이들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본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야기는 그것을 고백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따라갑니다.

 

 소설은 네 명의 아이들, 그리고 에미리의 어머니의 목소리를 담은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챕터는 그 사건이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과 사건의 진상을 차근히 풀어내지요. 처참하게 살해된 친구를 목격한 것, 그리고 딸을 잃은 어머니의 피맺힌 저주는 아이들의 인생을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바꿔 놓았습니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네 개의 챕터에서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바꾸어 놓는지를 알수 있어요. 소심하지만 착한 사에는 평생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고, 마키는 자신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속죄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평생을 에미리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죄책감을 갖고 있던 아키코와 잘못된 인생관을 갖게 된 유카 역시 그 사건에서 놓여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놀랍게도, 다섯 번째 챕터로 이야기가 옮겨가면 에미리의 어머니, 아사코는 오히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던 것도 잊었다고 무책임하게 말합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모진 소리를 했다고 그것에 언제까지나 얽매여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하고 이기적이지요. 자신이라면 그런 일에 집착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그녀는, 속죄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진정으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반성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에미리 이전에 이 모든 비극이 자신으로부터 잉태되었음에도 말이지요.

 

 그래서인지 아사코의 고백이자 사실상의 종장인 ‘속죄’에서 우리는 결국 제목이 의미하는 속죄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아사코가 자신의 말로 인생이 어그러진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빈다고 느꼈다면 책의 제목은 명백히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겠지만 어떻게 보면 뻔뻔하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은 독자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죠. ‘속죄’란 아사코가 아이들에게 무책임하게 퍼부었던, 그래서 아이들이 평생을 얽매인 그 속죄인가. 혹은 아사코가 아이들에게 비는 속죄인 것인가. 아니면 두 사람의 인생을 처참히 망쳐놓은 아사코가 결국 딸의 목숨을 그 댓가로 치루게 되는 것이 속죄인가를 말입니다.

 

 아마 이 책을 읽으시고 다양한 감상을 느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속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속죄라는 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 경우 이 책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아이들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계속 생각하게되었던 소설이었어요. 어른들의 비뚤어진 욕심과 이기심이 다섯 어린 아이들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으니까요. 다소 고백과 비슷한 느낌이 있어 아쉽긴 했지만 한번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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