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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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마는 쇼코의 이력서를 꺼내 변호사에게 내밀었다.
“이 사진 속 사람이 세키네 쇼코 씨 맞죠?”
미조구치 변호사가 이력서를 내려다보았다. 혼마가 열까지 헤아릴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시간의 길이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실감했다.

 

설마,
단기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아닙니다.”
변호사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그것이 순식간에 더러운 것으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력서를 혼마 쪽으로 밀쳐내며 말했다.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어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

<화차> 中, 미야베 미유키 作

 


 가장 좋아하는 일본 미스터리 작가를 꼽으라면 누가 생각나세요?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 미스터리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 본격 미스터리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 서술트릭의 대가 오리하라 이치 등 수없이 많은 이름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중에서도 현대 일본 미스터리, 특히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죠. 바로 오늘 소개할 화차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입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적 문제를 담은 미스터리를 훌륭하게 써 내는 일본 중견 미스터리 작가입니다. 물론 판타지나 에도물도 많이 쓰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미미여사의 진가는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에 화차의 재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굉장히 기뻤습니다. 기존의 번역본에서 누락된 원고지 500장 분량의 원고를 보충하여 재출간하는 화차는, 이유에 버금가는 미미여사의 대표작으로서 다시금 한국 독자들에게 사회파 미스터리의 여왕인 미야베 미유키의 위상을 보여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예상은 전혀 틀리지 않았습니다.

 

 혼마 슌스케는 현장에서 강도를 제압하다가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휴직중인 경찰입니다. 재활에 애쓰며 복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혼마에게 어느 날 아내의 사촌조카인 구리사카 가즈야가 찾아오는데요, 그는 혼마에게 갑자기 사라져버린 약혼녀 세키네 쇼코를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가즈야가 밝힌 그녀의 실종 경위는 참으로 기묘합니다. 결혼 준비를 위해 그녀의 명의로 신용카드를 신청했다가 그녀가 개인파산을 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혹감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시간을 달라고 했던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으레 있는 실종사건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한 혼마는 그녀가 개인파산을 신청했다던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곳으로 개인파산을 신청하러 온 세키네 쇼코와 가즈야가 찾고 있는 세키네 쇼코가 다른 사람이었던 겁니다.

 

 이후 이야기의 초점은 ‘그녀는 왜 사라졌는가?’에서 ‘그녀는 누구인가?’로 급격히 옮겨갑니다. 혼마는 가즈야가 찾아달라고 부탁한 그녀의 뒤를 쫓는 한편, 그녀가 사칭한 진짜 세키네 쇼코의 인생을 되짚어가요. 소설은 그녀가 왜 세키네 쿄코를 사칭했는지, 어떻게 사칭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진정한 그녀는 누구인지 추적하며 미스터리적 요소를 부각시킵니다. 물론 미야베 미유키가 늘 그렇듯이, 그녀의 글은 다른 작가들이라면 문장 하나로 날려버렸을 법한 사소한 일도 차근히 설명하고 얼핏 보기에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건도 일일이 짚고 넘어가므로 그녀의 뒤를 쫓는 혼마의 행보는 숨가쁜 서스펜스완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긴장감은 떨어지지 않고, 그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야만 했던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녀가 왜 극단적인 선택까지 해 가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자 했는지, 왜 하필 세키네 쇼코를 선택했는지 깨닫게 되지요.

 

 또한 이야기는 진짜 세키네 쇼코의 인생을 따라가며 당시 일본에 만연했던 신용구매와 대출 문제를 짚어냅니다. 당시 일본의 신용구매 및 대출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 커다란 사회적 문제였지요. 신용구매 및 대출, 개인파산 등과 같은 문제가 그저 어떤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할 독자들을 미리 예상한 것인지 미야베 미유키는 그것은 단지 일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제도적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변호사와 혼마의 대화를 통해 그 문제를 교통사고에 비유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장면 중 하나였어요.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독자들은 왜 살고자 발버둥치는 그녀의 모습이 가련하면서도 섬뜩한 여운을 남기는 것인지 차츰 이해하게 됩니다. 또다른 자신으로 선택한 세키네 쇼코를 파멸로 몰아넣고 그저 안온한 삶을 위해 달려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그녀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넣은 그 회사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뒤집어쓰는 게 자기네 회사만 아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그 회사들처럼, 그녀가 이전의 ‘빚’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떤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것이 미야베 미유키가 의도한 아이러니였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녀가 그 곳으로 떨어진 것은 자의도 아니거니와 사회가 책임을 어느 정도 지고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그것을 헤쳐나오는 방법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선택은 그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미야베 미유키의 솜씨를 보고싶으시다면 이유와 함께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소설이라는 평에 동감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참으로 미야베 미유키스러운 소설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녀의 팬이시라면, 혹은 그녀의 팬이 아니시더라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보고 싶으시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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