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완전판) - 0시를 향하여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골든 에이지의 수많은 작가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몇몇을 꼽자면 아서 코난 도일, S.S. 밴 다인을 포함한 몇 명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경애를 담아 사랑하는 작가를 한 명 꼽자면 단연 이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죠. 오늘 리뷰할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0시를 향하여입니다.
이혼한 부부인 오드리와 네빌은 우연히 네빌의 아주머니인 트레실리안 부인의 집에서 동시에 휴가를 보내게 됩니다. 네빌의 현 부인인 케이가 오드리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네빌은 케이와 오드리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오드리는 무언가 겁에 질린 듯한 상태에서 셋 사이엔 묘한 기류가 흐릅니다. 와중에 저택에 초대받았던 늙은 범죄 전문가인 트레비스가 무언가를 암시하듯이 오래된 범죄 이야기를 꺼내지만, 그는 어쩐 일인지 호텔로 돌아가던 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아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사고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트레실리안 부인 역시 네빌과 언성을 높여 싸운 뒤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네빌이 살인자로 지목당하지만 어쩐지 사건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그 수가 많고 나온 시대가 백수십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높은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의 다양한 매체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되고 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물론이고, 그 외 많은 작품들이 재미에 충실할 뿐 아니라 다양하고 참신한 구성적 장치를 이용하고 있지요. 이 0시를 향하여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충격적인 반전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 전반에 깔리는 범인의 음습한 악의와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한 교묘한 트릭을 보여줌으로서 훌륭한 추리소설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정황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가는 거야.
그리고 정해진 시각이 되었을 때 정점으로 치닫는 거지.
0시라고 해 두세. 그렇지, 모든 것이 0시를 향해 모여드는 거야……
<0시를 향하여> P.13
무엇보다도 제가 이 소설을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로 꼽는 이유는,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소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드러난 저 대사 때문입니다. 추리소설의 전개에서 그 정점 - 그것이 어떤 종류의 흉악 범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건, 아니면 범인을 밝혀내거나 재판에서 그 죄의 무게가 매겨지는 순간이라도 - 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수많은 요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 어떤 한 가지라도 결핍되었더라면 피해갈 수 있었던 이 결정적인 순간은 마치 모든 요소들이 그 결과를 알고 차근히 모여든 것처럼 ‘0시를 향하여’ 다가왔기 때문에 발생한 거죠. 소설 속에서 트래비스의 대사로 표현되는 저 ‘0시’는 추리소설의 정점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말입니다. 단지 이 소설에 국한해서가 아니라, 모든 추리소설을 말이죠.
이 소설 역시 0시를 향해 달려나갑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갖춘 미덕 한 가지는 소설을 읽으며 대부분의 독자가 생각한 곳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0시가 등장한다는 점이지요. 충격적인 반전이라고 할 순 없지만 사건은 독자들이 예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독자들은 그 때서야 소설 전반에 깔리는 살인자의 그림자와 그 악의, 그리고 교묘한 트릭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범행 동기나 범죄자의 심리가 단순하게 그려졌던 반면 이 소설의 범인은 그 때 당시 알려지지도 않았던 사이코패스라는 개념과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보여 그 부분 역시 흥미롭습니다.
상당히 유명하고 고전적인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치밀한 트릭이나 독자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범인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반전을 숨겨놓는 현대 미스터리에 익숙해지신 분들이라면 다소 심심하실 수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0시를 향하여에는 결코 최근의 미스터리/스릴러물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전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추리소설 장르 전반을 꿰뚫는 이해와 클래식한 전개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추천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