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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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서도 추리소설 시장의 파이가 넓어지면서 여러 출판사에서 속속들이 추리작가 선집, 혹은 전집을 내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출간된 것이 가장 기뻤던 작가 선집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매그레시리즈, 그리고 지금 말씀드리려는 엘러리 퀸 시리즈였습니다. 둘 모두 추리소설의 고전으로 뽑히지만 마땅한 완역본이 없어 국내 추리소설 마니아들의 원성을 샀던 시리즈지요. 특히 엘러리 퀸 같은 경우 1990년대 시그마북스에서 일부 출간된 시리즈가 절판된 이후로는 마땅한 선집조차도 존재하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었는데, 이번에 시공사에서 시그마북스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엘러리 퀸 선집을 재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책은 이 엘러리 퀸 선집에서 첫 번째로 출간한 로마 모자 미스터리입니다.

 

 

 뉴욕의 로마극장에서 인기리에 공연중인 연극 <건플레이> 상영 도중 한 신사가 독살된 채로 발견됩니다. 좌석에 앉은 채로 발견된 이 시체는 변호사인 몬테 필드로 밝혀지는데요, 이 몬테 필드라는 변호사는 본업보다 협박과 공갈로 돈을 벌어온 악당이었습니다. 극장 안에는 그와 동업을 하다가 최악의 결말을 맞은 변호사 벤저민 모건과 피해자의 변호를 받았던 범죄자 목사 조니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몬테 필드의 주머니에서는 부호 프랭클린 아이브스 포프의 영양인 프랜시스 아이브스 포프 양의 핸드백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수많은 의문점 중 리처드 퀸 경감과 아들 엘러리 퀸이 주목한 미스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몬테 필드의 모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피해자의 복장 중엔 모자가 없습니다. 얼핏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작은 흠이지만 퀸 부자는 이 부조화를 놓치지 않고 모자의 행방을 추적합니다. 사라진 모자가 범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는거지요. 소설의 제목처럼 이 소설의 모든 추리는 이 ‘로마 모자의 행방’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의 미학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고전 추리의 원형을 온전히 찾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선 고전 추리소설의 공식이랄 수 있는 연역적 추리 기법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얼핏 보기에는 어떠한 관련도 없어 보이는 단서를 모아서 사건과 관계된 전체적인 정황을 추리해내는 이 연역적 추리 기법은 오랫동안 미스터리 장르 전반을 이끄는 추리 기법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최근 추리소설의 장르가 다양화되고 특화된 소재를 사용하는 추리소설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다소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복간된 이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차근차근 증거를 모아 범인의 뒤를 쫓는 연역적 추리 기법으로 고전 추리소설의 진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에요. 어떠한 사소한 행동에도 타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리적 전개는 오히려 현대 추리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전 추리소설만의 미학이기도 하구요. 몬테 필드의 살인사건 이후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퀸 부자가 사건의 단서를 찾아서 추리하는 내용이 이어지므로 서스펜스는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연역적 추리의 미학에 집중할 수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 소설에서 특기할 만한 점 또 한가지는 현대 추리소설에서도 종종 쓰이곤 하는 ‘독자에의 도전장’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지요. 막간을 삽입해 독자에게 이제 모든 범인과 범행 수법에 대한 모든 증거가 제시되었으니 범인을 추리해 보아라! 라고 외치는 엘러리 퀸은 가끔 얄미워보이기도 하지만, 이 부분은 독자에게 공평한 게임을 제안하고 있다는 퀸 스스로의 자부심이 잘 보이는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퀸은 밴 다인이 그랬듯이 독자에게 탐정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쥐어주고 공정한 미스터리 게임을 벌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요. 저 역시 독자에게 불공평한 게임을 제안하고 종장에서 이 문제는 명탐정인 OOO만이 풀 수 있는 문제였어! 라고 말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추리소설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사실 엘러리 퀸이 자부심을 가질만 하지 않나 해요.

 

 

 저는 언제나 추리소설 초심자에게 추리소설을 권할 때 고전부터 읽으시라고 권하곤 합니다. 추리소설의 경우 현대 스릴러물을 읽고 나면 고전 추리소설이 상대적으로 소재나 범행수법, 동기 등의 다양성이 떨어져서 밋밋해보일 수 있다는 것도 물론 한 가지의 이유가 되지만, 무엇보다 추리소설의 고전은 그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 소설 역시 그러한 풍미를 가득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1920년대 뉴욕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엘러리 퀸의 그림자를 2012년 한국에서 다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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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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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세상에서 빠른 속도로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을 출간해주고 있네요. 오늘 이야기할 책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신작, 파리 5구의 여인입니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해리 릭스는 제자와 추문에 휩싸여 불명예스러운 퇴직을 한 후 파리로 떠나옵니다. 사랑하는 딸과 안정된 직장 모두를 잃은 그는 끔찍한 절망에 사로잡히지만 야간 경비 일을 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는 등 재기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요. 그러던 어느 날 해리는 미국의 동료 교수가 추천해준 살롱에서 마지트 카다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어쩐지 알 수 없는 매력을 풍기는 이 여인에게 미친 듯이 매혹됩니다. 비록 직장과 가족은 잃었지만 소설 집필도 순조롭게 이어지고 사랑스런 연인도 얻은 해리. 앞으론 좋은 날들만 펼쳐질 것 같지만 야간 경비를 서는 건물은 어쩐지 수상쩍고, 특정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만 만나길 종용하는 연인도 무언가 미심쩍습니다. 그러던 도중 해리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요….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더글라스 케네디의 이번 작품 역시 흥미로운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 파리로 옮겨온 해리를 그리는 부분에서는 어쩐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온 빅 픽처의 벤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내 독자들은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그가 찾은 새로운 삶은 벤의 것과는 달리 무언가 이상스러운 불안감이 감도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벤 역시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도망와 이전의 삶을 숨겨야만 하는 불안정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지만, 해리의 삶은 그가 미처 모르고 있는 어떤 불안 요소들을 주변에 잔뜩 두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독자들이 그것이 단순히 두고 온 삶에 대한 그리움과는 다른 어떤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오는 불안감인가를 알게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해리에게 연달아 찾아드는 행운, 그것은 스스로의 자유를 댓가로 한 불완전한 행운이니까요. 해리는 그것을 원치 않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선택한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주어진 행운, 그리고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남자… 네, 더글라스 케네디가 파리 5구의 여인에 담은 화두는 이렇습니다. “자유를 저당잡힌 행복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자유를 댓가로 한 행운’이라, 어마어마한 행운을 거머쥘 수 있다면 자유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해리의 행운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잔인하게 배신하고 내연남과 내통해 해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아내와 그 내연남이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그를 이용하고 종내에는 죽이려 했던 암흑가의 사람들이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분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호텔 종업원이 해리에게 비열하게 굴었다는 이유만으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를 협박하던 이웃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갈 때 우린 비로소 이 행운이 정말 행운인지, 해리에게 주어진 이 강제적인 행운이 과연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때에도 그가 선택할 만한 것이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해리가 원한 것은 단지 새롭게 시작할 기회, 그것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더글라스 케네디는 해리 릭스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유를 저당잡힌 행복은 완전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것에 만족하고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해리가 아무리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더라도, 그가 자유를 저당잡힌 이후로 얻은 행복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일지라도 그가 마지트에게 자신의 자유를 헌납한 이후로 느끼는 절망감을 보상해주진 못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소설 마지막까지 다른 선택의 길이 있지 않을까 굳게 믿고 있는 것도 그렇구요….

 


 안타깝게도, 빅 픽처에서처럼, 해리는 결국 이전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안락한 새장에 갇혀서 주어지는 행운과 기회를 받아들이고 그녀가 설계한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사랑하는 딸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그녀가 하라는대로 사는 것 말입니다. 그래도 원하는 성공과 부를 얻게 되지 않겠느냐, 라고 물으시면 이것이 해리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어요. 전 그래서 더더욱 해리가 치러야 하는 댓가는 너무나도 혹독한 것으로 보입니다. 벤과 달리 해리에게 동정심이 가는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어요.

 


 유독 기욤 뮈소와 더글라스 케네디를 많이 비교하게 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더글라스 케네디의 특장점은 기욤 뮈소와 달리 흘러가는 이야기에 한번 생각해볼 만한 거리를 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욤 뮈소의 책이 다소 동어반복의 느낌을 주는 데 비해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은 장르도, 생각할 거리도 다양하게 던져주지요. 빅 픽처에서는 꿈꾸던 비일상의 모습에 대해, 위험한 관계에서는 모성과 모멘트에선 인생을 바꾸는 한 순간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던 더글라스 케네디가 이번 책에서 던져준 주제 역시 한번쯤 생각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들 중 뛰어나달 만한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더글라스 케네디를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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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정영목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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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공사에서 엘러리 퀸 전집을 순조롭게 출간하고 있네요. 다른 어떤 작가 선집보다 엘러리 퀸 선집이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 중 하나로써 너무 즐겁게 엘러리 퀸 완역본을 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전집 세 번째 책인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엘러리가 개인적인 용무로 친구인 닥터 민첸을 찾은 네덜란드 기념 병원에서, 그날 아침 수술 예정이었던 노부인이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혼절해 계단에서 구르면서 쓸개가 파열되어 급하게 응급 수술을 받을 계획이었던 노부인은 철사로 목이 졸려있는 상태로 수술실로 실려 들어오고, 모두가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경악에 휩싸입니다. 준비실에서 수술을 준비하던 간호사는 수술을 할 예정이었던 닥터 재니가 준비실에 들어왔었다고 말하지만 닥터 재니는 이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퀸 부자는 그 시간 닥터 재니가 누군가를 만났다는 증언을 입수하지만 닥터 재니는 왜인지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상대방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 합니다. 한편 노부인의 죽음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조사하던 퀸 부자는 부인의 사망 당시 사건현장에 정신 나간 광신도인 노부인의 말동무 사라 풀러,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게 되는 영애 훌다 도른, 영애의 약혼자이자 노부인의 변호사인 필립 모어하우스, 노부인의 방탕한 남동생 헨드릭 도른과 그에게 노부인의 유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공갈 협박꾼 빅 마이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밖에도 노부인의 죽음을 두고 크고 작은 이득이 얽혀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엉켜들면서 살인사건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수렁 속으로 굴러들어갑니다.

 


 엘러리 퀸이 연역적 추리의 미학을 얼마나 제대로 보여주는지는 이미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말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와 이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에서 퀸의 연역 추리가 더욱 빛을 발한다고 느꼈습니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미스터리는 더욱 깊어만 가고, 각자 나름의 사정을 갖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비밀을 결코 밝히지 않으려 하는 와중에 엘러리 퀸은 정말 사소한 실마리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합니다. 말려들어간 구두의 혀가죽이나 끊어진 구두끈, 구두끈을 잇기 위해 붙여놓은 듯한 반창고, 평온한 표정으로 살해당한 제 2의 피해자와 그 피해자 뒤에 캐비닛이 있었다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단서들로요. 엘러리 퀸의 추리는 논리적으로 나무랄 데 없지만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논리는 독자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기에 놀라움이 두 배가 됩니다. 차근차근 용의자를 범인 대상에서 제거하는 퀸의 논리를 듣다 보면 독자는 미처 신경쓰지 못한 아주 사소한 사실에서 추리의 꼬리를 잡는 엘러리에게 감탄하게 되는 거지요.

 


 더군다나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의 경우, 로마 모자 미스터리가 연역 추리에 집중하느라고 상대적으로 스토리상의 재미가 약한 데 비해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어 더욱 즐겁습니다. 연역적 추리 기법은 고전 추리소설에서 계속 쓰여온 방법인데다 단서 하나하나를 모아서 추리의 결론으로 가는 과정을 밟기 때문에 사실 조금만 템포를 놓치면 전개가 굉장히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만 이 책은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않고 결말까지 쉴새없이 내달리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특별히 사건이 연달아 - 예를 들면 요코미조 세이시 수준으로요 -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야기 자체의 완급을 조절하는 엘러리 퀸의 능력이 탁월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살인이나 납치, 방화 등의 자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벌어져야만 소설 속의 서스펜스가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몇몇 작가들에게 엘러리 퀸은 아주 좋은 반례가 되어줄 겁니다.

 


 간혹 연역추리가 법의학물 등의 귀납추리에 비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엘러리 퀸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연역 추리’란 무엇인지, 또한 연역 추리로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지 분명 느낄 수 있으실 거에요.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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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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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믿어. 아무도 죄 없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순 없어."
헤어질 때 내 눈꺼풀에 남은 것은 여전히 철망을 붙들고 있던 남편의 손가락이었다.
그것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잔잔한 수면에 던진 돌멩이가 퍼뜨린 잔물결처럼.
내가 돌을 던진 것이다.

 

<변호 측 증인> 中, 고이즈미 기미코 作

 

 

 


 저번 주는 계속 책을 읽느라 리뷰를 한 개밖에 올리지 못했네요. 월요일에 리뷰를 이미 올린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외에 그리스 관 미스터리,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을 연달아 읽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 관 미스터리는 곧 리뷰를 쓸 생각이고,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은 시리즈 전체를 읽은 뒤에야 리뷰 방향이 잡힐 것 같아 잠시 보류해놓은 상태구요…. 오늘 리뷰를 쓸 작품은 남은 한 권인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막 출시됐을 당시에 이 책을 보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검찰 측 증인을 떠오르게 하는 제목에 굉장히 끌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인데다 검찰 측 증인을 굉장히 재밌게 봤었기 때문에 그 책을 연상시키도록 하는 이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었거든요. 또한 그만큼 유명한 작품의 제목을 노렸다면 작품에 자신이 있을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미치오 슈스케 등을 비롯한 유수의 추리소설 작가들이 아낌없이 추천을 한 작품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구요. 지루한 서론을 싫어하시는 분을 위해 모두 다 자르고 말하자면, 다행히도 변호 측 증인은 제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재미를 담은 책이었답니다.

 

 

 이류 카바레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던 미미 로이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던 야시마 그룹의 외동아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신랑의 아버지는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유일하게 와 준 하객이자 친구인 에다는 일족의 골칫덩이라고 부르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걱정하지요. 어쨌든 신랑의 아버지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자기 편이라곤 한 명도 없는 시댁에서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아버지가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면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폭언을 내뱉고, 하필 그날 밤 시아버지가 별채에서 끔찍하게 살해된 상태로 발견되는데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살인이 일어나고, 소설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홀수 장과 현재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짝수 장이 번갈아 살인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면서 독자들은 그녀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쫓습니다. 그녀는 이미 범인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독자들은 범인의 정체에 대해 좀처럼 종잡을 수 없고,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혼란에 빠지게 되지요. 하지만 대망의 11장이 펼쳐지면 독자들은 드러난 진상에 이전까지의 혼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이고 말 그대로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하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진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이라면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이미 읽은 분이라면 다른 독자들이 받은 충격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만한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추리하려고 하거나, 혹은 읽기 전에 이 소설에 대해 무언가를 더 알려고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단언컨대, 이 소설을 가장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이 소설의 트릭에 대해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저도 우연찮게 그저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이 소설을 접했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노림수에 100% 걸려들었는데요,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재미이기 때문에 저도 그 트릭 자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생각입니다 :) 다만, 앞으로 이 소설을 읽으실 분들을 위해 이 소설을 좀 더 재밌게 읽으실 수 있는 팁을 몇 가지 적어보려고 해요.

 

 

 먼저, 애거서 크리스티의 검찰 측 증인을 꼭 먼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걸작이고 재미도 있거니와, 변호 측 증인의 작가가 아마 그 소설을 이미 읽은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용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바로 그런 경우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검찰 측 증인을 읽었었기 때문에 두 소설간 진행 상의 유사한 점을 비교하다 보니 트릭에 더 옴짝달싹 못하고 걸려들었거든요. 그리고 두 번째로, 제목에서 말하는 변호 측 증인이 누구일지 계속 궁금해하며 읽어보시는 것이 즐거움을 두 배로 만들어드릴 겁니다. 꼭 지키지 않으셔도 물론 상관없지만, 제 경우 저 두 가지를 우연히도 만족시킨 덕분에 소설을 무척 재밌게 읽었으니 염두에 두시면 더욱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읽으실 수 있을거에요.

 

 

 기대를 너무 높여드려 나중에 책을 읽을 때 실망하시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 억지로 흠을 몇 가지 잡아보자면, 아주 재미있고 즐겁게 읽은 소설이기도 했고 또한 매우 놀라기도 했지만 했지만 완벽한 추리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사소한 아쉬움으로는 짝수 장을 이끄는 변호사 캐릭터가 약한 것이 아쉬웠어요. 더글라스 케네디의 위험한 관계에 나오는 나이젤 변호사처럼 캐릭터성이 좀 더 강했다면 후반부의 진행이 일종의 법정물 성격을 띄면서 훨씬 더 흥미진진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 소설에서 쓰인 트릭의 속성상 사전에 정보를 갖고 있던 독자들이나 혹은 중간에 눈치챈 독자들에겐 다소 심심한 소설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제가 꼭 추천해드리고 싶은 작품임은 확실합니다.

 

 

 검은숲에서는 몇몇 장르문학의 책 앞장에 성분 함량표라는 재미있는 그래프를 싣고 있습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해당 소설을 분석하는 짧은 표인데요, 평가라기보다는 작품의 특성을 나타내주는 도서의 ‘잔재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변호 측 증인의 앞장에 실은 성분 함량표를 보면 ‘고전의 반열’ 항목에 5점을 주고 있네요. 저는 나름 추리소설의 고전에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 작품이라면 확실히 고전의 이름을 달고 나와도 손색없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무조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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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로 그린 초상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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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니 에이프릴일 뿐이다. 클래런스 문 컬렉션 에이전시의 소유주 대니 에이프릴이다.
그리고 꽤나 잘 살아가고 있다. 낮 동안에는 말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내 옆에 누워있는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죽음처럼 검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베일이 되어 얼굴 위에 덮여 있다.
그녀에겐 얼굴이 없다. 연기와도 같은 얼굴, 다가가 키스하려고 하면 흩어져 없어진다.

 

<연기로 그린 초상> 中, 빌 S. 밸린저 作

 

 


 오늘 감상을 쓸 책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꼽으라면 망설임없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빌 S. 밸린저의 연기로 그린 초상이에요.

 

 

 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수금 대행 업체를 인수하게 된 대니 에이프릴은 10년 전의 자료를 정리하다 어떤 여인의 사진을 발견합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대니는 이 여인의 행적을 집요하게 쫓기 시작하고, 소설은 장을 바꾸어 크래시의 시점에서 그녀의 삶을 서술합니다. 독자들은 이내 이 아름다운 여인 크래시는 대니가 막연하게 그리던 그런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와 그녀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두려움 섞인 기대를 갖고 종장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지요.

 

 

 먼저 여러 추리소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교차서술 기법에 대해 딱히 호오를 따지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이 소설의 교차서술은 그야말로 소설의 서스펜스를 높이는 아주 탁월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은 한 챕터 내에서 ‘대니’ 장과 ‘크래시’ 장이 번갈아 서술되면서 그녀가 남긴 자취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대니와 그녀가 남긴 그 자취가 실제로 그녀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것은 맹목적이고 한편으로 어리석기까지 한 대니의 캐릭터와 목적을 위해 자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크래시의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킬 뿐만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텐션을 높이는 데 아주 주효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단 한번의 만남, 그리고 사진 한 장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대니와 신분 상승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미모와 매력을 망설임없이 사용하는 팜므파탈 크래시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독자들은 점점 긴장하며 그 끝을 향해 가게 돼요. 놀랍게도 그들이 만나기 전까지 숨막히는 추격적이나 살인, 방화와 같은 자극적인 요소들은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그들이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마주한 순간, 독자들은 이 짧고도 불같은 사랑이 결국엔 파국을 맞을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결과와 함께 말이죠.

 

 

 화차의 쿄코처럼 그녀가 언젠가는 죗값을 치르게 되리라는 암시도 없이, 소설은 완전히 닫힌 결말로 그녀가 또 다른 ‘신분 상승’을 이루어냈음을 시사합니다. 만일 그녀가 그간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죄없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가련한 대니를 이용한 것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되길 바란 독자라면 실망했으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소설을 읽으며 대니의 말처럼 사진 한 장으로 그녀의 매력에 홀려버린 그가 그녀를 너무 사랑했기에, 그녀 앞에 대니 에이프릴 본인으로 나설 수 없었기에 결국 그 엉뚱한 누명도 쓰지 않게 된 아이러니가 이 추리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녀를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혹은 아예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미스터리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테지요. 불쌍한 대니의 맹목적인 사랑이 그가 평생 그릴 ‘연기로 그린 초상’을, 그리고 이 미스터리를 만들지 않았나 합니다.

 

 

 빌 S. 밸린저는 이와 손톱, 기나긴 순간에서도 교차서술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놀라운 서스펜스를 만들어낸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와 손톱이라는 작품 역시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밸린저가 이끄는 서스펜스의 세계로 들어가보시길 권합니다. 꼭 읽어보세요.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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