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로 그린 초상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대니 에이프릴일 뿐이다. 클래런스 문 컬렉션 에이전시의 소유주 대니 에이프릴이다.
그리고 꽤나 잘 살아가고 있다. 낮 동안에는 말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내 옆에 누워있는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죽음처럼 검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베일이 되어 얼굴 위에 덮여 있다.
그녀에겐 얼굴이 없다. 연기와도 같은 얼굴, 다가가 키스하려고 하면 흩어져 없어진다.

 

<연기로 그린 초상> 中, 빌 S. 밸린저 作

 

 


 오늘 감상을 쓸 책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꼽으라면 망설임없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빌 S. 밸린저의 연기로 그린 초상이에요.

 

 

 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수금 대행 업체를 인수하게 된 대니 에이프릴은 10년 전의 자료를 정리하다 어떤 여인의 사진을 발견합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대니는 이 여인의 행적을 집요하게 쫓기 시작하고, 소설은 장을 바꾸어 크래시의 시점에서 그녀의 삶을 서술합니다. 독자들은 이내 이 아름다운 여인 크래시는 대니가 막연하게 그리던 그런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와 그녀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두려움 섞인 기대를 갖고 종장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지요.

 

 

 먼저 여러 추리소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교차서술 기법에 대해 딱히 호오를 따지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이 소설의 교차서술은 그야말로 소설의 서스펜스를 높이는 아주 탁월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은 한 챕터 내에서 ‘대니’ 장과 ‘크래시’ 장이 번갈아 서술되면서 그녀가 남긴 자취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대니와 그녀가 남긴 그 자취가 실제로 그녀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것은 맹목적이고 한편으로 어리석기까지 한 대니의 캐릭터와 목적을 위해 자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크래시의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킬 뿐만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텐션을 높이는 데 아주 주효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단 한번의 만남, 그리고 사진 한 장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대니와 신분 상승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미모와 매력을 망설임없이 사용하는 팜므파탈 크래시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독자들은 점점 긴장하며 그 끝을 향해 가게 돼요. 놀랍게도 그들이 만나기 전까지 숨막히는 추격적이나 살인, 방화와 같은 자극적인 요소들은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그들이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마주한 순간, 독자들은 이 짧고도 불같은 사랑이 결국엔 파국을 맞을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결과와 함께 말이죠.

 

 

 화차의 쿄코처럼 그녀가 언젠가는 죗값을 치르게 되리라는 암시도 없이, 소설은 완전히 닫힌 결말로 그녀가 또 다른 ‘신분 상승’을 이루어냈음을 시사합니다. 만일 그녀가 그간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죄없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가련한 대니를 이용한 것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되길 바란 독자라면 실망했으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소설을 읽으며 대니의 말처럼 사진 한 장으로 그녀의 매력에 홀려버린 그가 그녀를 너무 사랑했기에, 그녀 앞에 대니 에이프릴 본인으로 나설 수 없었기에 결국 그 엉뚱한 누명도 쓰지 않게 된 아이러니가 이 추리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녀를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혹은 아예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미스터리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테지요. 불쌍한 대니의 맹목적인 사랑이 그가 평생 그릴 ‘연기로 그린 초상’을, 그리고 이 미스터리를 만들지 않았나 합니다.

 

 

 빌 S. 밸린저는 이와 손톱, 기나긴 순간에서도 교차서술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놀라운 서스펜스를 만들어낸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와 손톱이라는 작품 역시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밸린저가 이끄는 서스펜스의 세계로 들어가보시길 권합니다. 꼭 읽어보세요.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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