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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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책 안주는 전작인 흑백과 비교하자면 상당히 따뜻하고 귀여운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작가 본인의 말처럼, 흑백이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라면 안주는 귀여운 느낌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네요. ‘괴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흑백이 다소 읽기 힘드셨던 독자분들께는 안주가 더 좋은 선택이 될 듯 합니다.

 

 

2. 전작인 흑백과 비교해 안주의 테마는 어떨지 궁금해 하실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흑백이 치유와 관련된 이야기였다면, 안주는 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인생을 살며 수없이 많은 상처를 입게 되고, 가끔 다시는 자신의 인생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생각되는 위기를 맞게 되기도 하지요. 흑백은 그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오치카도 그러했고, 오치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도 그랬지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해주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자리에서 상처를 딛고 일어나기도 하는 이야기가 바로 흑백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해서 단숨에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아직도 오치카는 ‘요시스케’라는 이름에 숨이 턱 막히고, 세이타로는 누님이 매화가 핀 절경을 보며 저택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안주는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해요. 상처를 인정하고, 자신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말입니다.

 

 

3. 다만, 개인적으로는 흑백에 비해 몰입도가 떨어지는 느낌은 받았습니다. 아마도 오치카의 이야기가 책 전체의 흐름을 이루고 있던 흑백과는 달리, 안주는 상대적으로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는 이야기가 없어 단편집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다정한 아가씨 오치카가 등장해 많은 사람들의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흑백에서는 오치카의 숨겨진 사연이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책 전체의 흐름에 눈을 꽉 붙들어두었다면 안주에서는 그 정도로 독자들에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는 적지 않았나 해요. 꼽자면 책 제목과 같은 ‘안주’가 책 전체의 주제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며, 가장 흥미로웠던 토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베 미유키의 이 괴담 시리즈가 그녀의 에도물 가운데서 가장 읽어볼만한 책들이라는 생각은 변치 않았습니다. 흑백이야 워낙 뛰어난 작품이었고, 안주 역시 미야베 미유키만의 다정한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어요.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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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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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겐 신간이 발매되면 내용이나 장르, 평가에 관계없이 꼭 그것을 읽어보는 몇몇 작가가 있습니다.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인 미야베 미유키가 그러하고, 신본격의 귀재라 불리는 우타노 쇼고도 그러하며, 혹은 반전의 대가 제프리 디버라거나 뒤늦게 한국에 완역판이 번역되고 있는 엘러리 퀸 역시 저에게 그런 작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책도 바로 그런 작가의 작품이지요. 신작이 나오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게 만드는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인 왕복 서간입니다.

 

왕복 서간이라는 제목답게, 책은 사건과 관계된 주인공들이 주고받은 편지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책은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편지를 주고받는 주인공들은 모두 과거의 사건에 관련된 진실을 찾고 있지요. 사고를 당하고 자취를 감춘 친구의 행방을 찾는 동창들의 이야기를 담은 십 년 뒤의 졸업문집, 은사의 부탁을 받아 스무해 전 사고와 관련된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제자의 이야기인 이십 년 뒤의 숙제, 뜻하지 않은 화재사고로 함께하게 된 연인들의 이야기인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 모두 과거의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고풍스러운 편지 형식입니다.

 

 

왜 ‘오가는 편지’ 형식일까?

등장인물들의 대화 사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화나 문자, 혹은 이메일 등의 간편하고 빠른 통신 수단이 존재하는 현재에 굳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상당히 고전적이면서도 이색적인 연락 방법입니다. 미나토 가나에가 서술 방식으로 굳이 이런 서간문 형식을 선택한 것은 왜일까요?

 

가장 먼저, 미나토 가나에가 즐겨 쓰는 옴니버스식 서술 방식에 서간문이 적합하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고백, 속죄, 야행관람차 등 미나토 가나에의 기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에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서간문은 한 가지 사건에 대해 각자의 시점을 재구성해 보여줄 수 있고 기본적으로 의사 소통 방식에 해당하기 때문에 관계된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에도 좋지요.

또한 빠르고 즉시 전달되며 수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인스턴트 메시지의 성격을 띄는 전화, 문자, 이메일 등과 달리 작성하고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지는 좀 더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 작성하게 되고, 따라서 수신인도 독자도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읽는 재미를 찾게 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요, 목소리를 직접 들려줘야 하는 전화와 상대방의 전화기를 갖고 있어야 하는 문자 혹은 계정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는 이메일과 달리 편지는 집 주소만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상대를 위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트릭이나 반전을 숨길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편지는 주고받는 서로 간에 고전적인 향취를 불러일으켜 소설 전체에 클래식한 분위기를 가미해주므로 ‘왕복 서간’의 주제에 걸맞는 분위기를 조성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편지는 다대일, 혹은 다대다가 아닌 일대일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수신인을 정해놓고 훨씬 더 내밀한 속사정을 터놓기가 쉽다는 점에서 역시 작가로서는 매력적인 서술 형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미나토 가나에스러우면서도, 또한 그녀답지 않은

옴니버스 방식으로 글을 서술하는 작가는 많지만 미나토 가나에만큼 옴니버스 서술 형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작가는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데뷔작인 고백은 한 가지 사건에 얽힌 사람들 각각의 관점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해서 보여준 작품이였고, 속죄 역시 십수년 전 일어난 끔찍한 사고와 관련된 아이들 각각의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떤 사건에 대한 입장은 관련된 사람들 수만큼 존재하고, 그에 대한 관점 역시 보는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말을 이전에 쓴 적이 있지만,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가 바로 미나토 가나에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 책에서도 미나토 가나에는 ‘편지’라는 소재를 이용해 한 가지 사건에 대한 각자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구성해 보여주고 있는데, 데뷔작 고백에서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그 솜씨만은 여전합니다.

 

다만,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중 고백이나 속죄만을 본 독자라면 아마 왕복 서간에서 보이는 미나토 가나에의 변화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을 겁니다. 고백과 속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오히려 희망적인 관점으로 결말을 열어놓은 것이 돋보이는데, 특히 두 번째 단편 이십 년 뒤의 숙제와 세 번째 단편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에서 그러한 관점이 두드러집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단지 이번 작품에서 새롭게 보여준 것은 아니긴 합니다. 전작인 야행관람차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데, 다만 그것이 야행관람차에서 아직 덜 다듬어진 것처럼 다소 겉도는 느낌을 주었다면 왕복 서간에서는 그러한 관점이 조금 더 잘 무르익은 느낌을 주어 독자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특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한편, 이러한 변화를 시도하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은 어쩌면 가장 미나토 가나에스러운 점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소설 내에 치밀하고 촘촘하게 복선을 깔아놓고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야기를 전복시켜버리는 미나토 가나에의 솜씨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각 단편을 보면서 결말에 대해 대략 예상하고 있던 독자들까지 다시금 탄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결말에서 보여주는 반전도 반전이려니와 짧은 이야기 속에서 복선과 반전을 안배하고 준비해 놓는 실력이 전작들보다 한층 더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가지 단편에서 반전이 있으리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또 다른 반전에 완전히 뒷통수를 맞았는데요, 아마 다른 많은 독자들도 이런 재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겁니다 :)

 

 

자기복제는 쉽지만 크게 성공한 기존의 스타일을 버리고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은 창작자에게 가장 큰 위험이자 모험일 것입니다. 게다가 추리/미스터리 장르의 도서들은 특성상 인간이 저지른 범죄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므로 추리 소설을 쓰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이야기 속에 담아낸다는 것이 어렵기 마련인데,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미나토 가나에가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먼 훗날에도 그녀의 이름이 사랑받는 미스터리 작가로 인구에 회자되리라는 확신이 드는 한 권이었습니다. 추천해요:D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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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의 범죄 - 미야베 미유키 단편집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장세연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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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장편 못지 않게 단편집도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사실 잘 쓰여진 단편집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 중 몇몇은 훌륭한 단편집을 쓴 작가이기도 해요. 예를 들면 로알드 달이라거나, 히가시노 게이고 등이 그렇죠. 그 중에서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단편집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우리 이웃의 범죄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데뷔작인 우리 이웃의 범죄를 포함한 다섯 가지 단편을 실어놓은 이 책은, 초기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타이틀롤인 우리 이웃의 범죄는 데뷔작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짧은 페이지 안에 추리소설의 필수요소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지요. 모험, 보물, 협박, 그리고 반전까지 말입니다. 다른 단편 역시 훌륭합니다. 결혼식 축전과 관련된 살인사건을 다룬 ‘축 살인’, 한밤중에 아버지의 부정을 고발하기 위해 아이를 안고 찾아온 의문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 ‘이 아이는 누구 아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위한 유쾌한 사기사건 ‘기분은 자살 지망’ 까지 하나 빼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단편은 ‘선인장 꽃’이었어요. 미스터리인 양 사건의 진실을 감추고 있던 전개 부분도 호기심을 제대로 유발하도록 잘 쓰여진데다, 미야베 미유키의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여과없이 잘 표현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어른들을 위한 한 편의 동화라고 할 수 있었지요.

 


 제가 이 단편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저것 때문일 것입니다. 여타의 다른 추리소설 작가들과는 달리 미야베 미유키는 끔찍한, 혹은 상상할 수 없는 범죄나 이상현상을 다루면서도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아요. 어떤 흉악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결국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일종의 인간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 누쿠이 도쿠로 등 여타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와 비교하면 참으로 독특한 시점이지요. 범죄의 이유는 사회적 구조에 있지만 책을 보는 독자들마저 그 말없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 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관점이 제대로 꽃을 피운 것은 일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 흑백이지만, 초기작인 단편들에서도 그와 같은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였어요.

 


 이 작품을 볼 당시, 저는 우리나라에 아주 적은 수의 작품만 번역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 작가를 찾아 헤매이는 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미미여사와 같은 대가의 작품에는 다소 소홀했었지요. 이 책은 그것을 뼈아프게 반성하게 해 준 한 권이었습니다. 역시 미야베 미유키군, 이라는 감탄이 나오는 책이었달까요.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추천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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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엄지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0
미치오 슈스케 지음, 유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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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만이 정면에서 다른 손가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섯 손가락 중에서 엄지만이 다른 손가락들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죠."

 

<까마귀의 엄지> 中, 미치오 슈스케 作

 

 

 

 일본 미스터리를 처음 읽는 친구들이 책을 추천해달라고 할 때 어떤 책을 추천하시나요? 전 그럴 때마다 난감함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일본 미스터리라는 것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일본 특유의 감성 과잉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영미 미스터리/스릴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트릭 위주의 구성만이 눈에 들어오기 십상이거든요. 잘못 추천해주었다가는 감사의 말은 커녕 다시는 일본 추리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안타까운 선언을 들어야만 하니까 그런 추천엔 참으로 조심스러울 수 밖에요. 하지만 일본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보기 시작하는 친구들에게도 항상 믿고 소개해줄 수 있는 작가가 한두명은 있게 마련인데요, 오늘 리뷰를 쓸 소설은 그 중 한명인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 까마귀의 엄지입니다.

 


 다케자와와 데쓰는 젊은 시절 사채때문에 인생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진 사기꾼들입니다. 노름판에서 친구의 빚을 떠안은 다케자와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사채조직에서 정리업자로 일을 하지만, 결국 그의 빚독촉에 못 이긴 어린 자매의 어머니가 자살한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뒤늦게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 다케자와는 내부의 서류를 경찰에게 유출시켜 조직을 일망타진하지만, 그 댓가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열 살 난 딸아이가 보복성 방화로 죽거든요. 딸아이가 죽고 나서 다케자와는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이 사회에서 악당처럼 살아가기로 맘먹게 된 겁니다. 자신처럼 사채 때문에 부인을 잃은 데쓰를 만나 함께 사기를 치며 살아가던 다케자와는 어느 날 한 소매치기 소녀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내 그 소녀가 자신이 죽음으로 내몬 여자의 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집에서 쫓겨나게 된 소녀를 자신과 데쓰의 집으로 받아들이고, 엉겁결에 그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까지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다섯 명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케자와를 쫓고 있는 사채조직의 손길이 바로 뒤까지 그들을 뒤쫓고, 결국 이 다섯 명은 각자가 쌓아온 기술을 모두 발휘해 그 사채조직을 대상으로 최후의 사기 대작전을 펼치기로 하지요.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특징적이었던 점은, 주인공이 사기꾼이고 모여살게 된 다섯 명의 모임이 어쩐지 안티히어로들의 모임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따뜻하고 다정한, 다소 색다른 시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탐정이나 탐정과 가까운 주변인물, 혹은 피해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추리소설과 달리 사기꾼을 주인공으로 한 시도는 색다르지만 작가로서는 위험을 안은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 속일지라도 선량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주인공은 보고싶지 않은 저같은 독자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되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주인공과 그 친구들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건, 그들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잃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여긴 사람들이며, 또한 사회와 사람들에게 불신을 갖고 있지만 결국 가족과 친구와 함께, 사람들 속에서 살고싶어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은 희극적이면서도 찡한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악당이라고 되뇌이며 사기를 쳐 먹고 살고 있는 다케자와와 데쓰, 자기의 외모를 이용해 소매치기를 하는 마히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그들에게 얹혀사는 야히로와 간타로의 조합은 우습지만,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어떤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등장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다고 해서 이 소설이 추리소설로서의 매력을 전혀 갖추지 않은 심심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작전명 알바트로스가 시작되면서 미치오 슈스케 특유의 필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거든요. 다섯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흡사 긍정적인 대안가족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만 같던 소설은 사채조직의 히구치가 다케자와의 뒤를 바짝 쫓아오면서 분위기를 급반전하고, 여태까지 쫓기기만 했던 사람들이 이번엔 자신들이 그들을 쫓겠노라며 새로운 다짐을 하지요. 사채조직의 돈을 사기쳐 빼앗기 위해 세밀한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은 디테일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쳐 실제 사기조직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결전의 날, 작전 알바트로스를 수행하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고 작가의 호흡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을 정도구요.

 


 종장에 이르면 이내 작가가 유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하지만 쉽게 속으시면 안 됩니다. 작전명 알바트로스의 끝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은 다섯 사람을 그리는 미치오 슈스케는 뭔가 그답지 않아 왠지 뭔가 심심하고 미심쩍은 느낌을 주고, 역시나 -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최고라고 말하는 - 최후의 반전이 페이지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 반전이 없었더라도 훌륭한 소설이었겠습니다만, 왠지 돼지고기 없는 김치찌개를 먹는듯 밍밍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미치오 슈스케다운, 그리고 이 소설에 가장 어울리는 재기발랄한 결말이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어떤 장르의 소설이건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 작품은 그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장르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반전과 재기넘치는 결말까지 갖추고 있어 더할나위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요.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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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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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옛날과 달리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은 많이 사라졌다.
가족의 덫에 걸렸다는 느낌도 없었다.
두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는 달리 달아날 만한 곳도 없으니까.
 
<빅 픽처> 中, 더글라스 케네디 作

 

 

 읽으면 읽을수록 실망을 주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읽으면 읽을수록 만족을 주는 작가가 있는데요. 저에게 더글라스 케네디는 후자에 속하는 작가라고 이미 한 번 언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책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 빅 픽처입니다.

 


 벤 브레드포드는 사진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사는 변호사입니다. 사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모든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변호사로서 살아가고 있지요. 그의 지나간 꿈을 다시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지하에 전시된 카메라들과 사진 뿐입니다. 어느 날 벤은 아내인 베스가 이웃인 게리 서머스와 외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게리와 언쟁을 벌이다 홧김에 그를 살해하고 맙니다. 절망해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벤은, 이내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라고 여기고 새로운 삶을 위해 계획을 꾸밉니다. 게리를 자신으로 위장해 사망한 것으로 꾸미고 자신은 게리 서머스가 되어 멀리 떠나는 거지요.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사진가 게리 서머스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벤. 그의 두번째 기회는 과연 그에게 새로운 삶을, 희망을 가져가 줄까요…?

 


 주인공 벤 브래드포드는 ‘비일상으로의 탈주’에 대한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비일상으로의 탈출을 원한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지요. 그의 직업이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인 변호사라는 점은 그런 면에서 더욱 자유에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기도 해요. 그래서 처음 그가 이루지 못한 꿈에 목말라하고 예상 외의 사건으로 결국 또다른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책을 읽는 독자들은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 않나 합니다.

 


 언뜻 보면 그 카타르시스는 합당한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생 꿈꿔오던 사진가로서의 삶은 만족스럽고, 부정한 아내 대신 다정하고 충실한 연인도 생기지요. 우연히 찍은 사진은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주고요. 하지만 벤은 문득문득 차오르는 공허감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버지와 같았던 선임 변호사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아직도 아빠를 찾는 어린 아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포기한 삶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이 벤을 찾아듭니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일상에서 맛보던 작은 행복들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벤 브래드포드가 아닌 게리 서머스로서 뒤늦게 알게 되는 거지요. 꿈꾸던 비일상이 일상이 되었을 때, 반복되던 삶을 탈출해 꿈꾸던 날들 속에서 살게 되었을 때에서야 그 일상조차도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탈주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아이러니가 벤을 더욱 괴롭게 합니다.

 


 물론 벤은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지도 않고 일상에서의 탈주를 꿈꾸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일상이 되어버린 비일상에 만족하고 안주해서는 아닙니다. 스스로가 깨달았듯이,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탈출하고자 하는 맹목적인 욕망이 일상의 모든 쾌락들을 스스로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에요. 모멘트에서는 애달픈 로맨스로 인생의 어느 날 놓치고 만 순간에 대해 풀어놓던 더글라스 케네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은 가치있다고 강변했듯이, 빅 픽처에서도 더글라스 케네디는 지금 당신이 흘려보내고 있는 이 일상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며 이미 당신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름끼치도록 잔인하게 보여주듯이 말이에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작정 일상을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느껴보았을 겁니다. 이 곳을 벗어나면 무언가 긍정적인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 적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그 기로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가 방금 이별하고 온 일상보다 밝은 미래일까요? 여기서 꿈꾸던 자유가 정말 당신이 그리던 모습일까요? 이런 낙관적인 상상에 조용히 의문을 제기하는 소설입니다. 읽지 않으셨다면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추천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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