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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엄지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0
미치오 슈스케 지음, 유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엄지만이 정면에서 다른 손가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섯 손가락 중에서 엄지만이 다른 손가락들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죠."
<까마귀의 엄지> 中, 미치오 슈스케 作
일본 미스터리를 처음 읽는 친구들이 책을 추천해달라고 할 때 어떤 책을 추천하시나요? 전 그럴 때마다 난감함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일본 미스터리라는 것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일본 특유의 감성 과잉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영미 미스터리/스릴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트릭 위주의 구성만이 눈에 들어오기 십상이거든요. 잘못 추천해주었다가는 감사의 말은 커녕 다시는 일본 추리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안타까운 선언을 들어야만 하니까 그런 추천엔 참으로 조심스러울 수 밖에요. 하지만 일본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보기 시작하는 친구들에게도 항상 믿고 소개해줄 수 있는 작가가 한두명은 있게 마련인데요, 오늘 리뷰를 쓸 소설은 그 중 한명인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 까마귀의 엄지입니다.
다케자와와 데쓰는 젊은 시절 사채때문에 인생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진 사기꾼들입니다. 노름판에서 친구의 빚을 떠안은 다케자와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사채조직에서 정리업자로 일을 하지만, 결국 그의 빚독촉에 못 이긴 어린 자매의 어머니가 자살한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뒤늦게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 다케자와는 내부의 서류를 경찰에게 유출시켜 조직을 일망타진하지만, 그 댓가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열 살 난 딸아이가 보복성 방화로 죽거든요. 딸아이가 죽고 나서 다케자와는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이 사회에서 악당처럼 살아가기로 맘먹게 된 겁니다. 자신처럼 사채 때문에 부인을 잃은 데쓰를 만나 함께 사기를 치며 살아가던 다케자와는 어느 날 한 소매치기 소녀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내 그 소녀가 자신이 죽음으로 내몬 여자의 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집에서 쫓겨나게 된 소녀를 자신과 데쓰의 집으로 받아들이고, 엉겁결에 그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까지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다섯 명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케자와를 쫓고 있는 사채조직의 손길이 바로 뒤까지 그들을 뒤쫓고, 결국 이 다섯 명은 각자가 쌓아온 기술을 모두 발휘해 그 사채조직을 대상으로 최후의 사기 대작전을 펼치기로 하지요.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특징적이었던 점은, 주인공이 사기꾼이고 모여살게 된 다섯 명의 모임이 어쩐지 안티히어로들의 모임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따뜻하고 다정한, 다소 색다른 시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탐정이나 탐정과 가까운 주변인물, 혹은 피해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추리소설과 달리 사기꾼을 주인공으로 한 시도는 색다르지만 작가로서는 위험을 안은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 속일지라도 선량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주인공은 보고싶지 않은 저같은 독자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되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주인공과 그 친구들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건, 그들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잃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여긴 사람들이며, 또한 사회와 사람들에게 불신을 갖고 있지만 결국 가족과 친구와 함께, 사람들 속에서 살고싶어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은 희극적이면서도 찡한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악당이라고 되뇌이며 사기를 쳐 먹고 살고 있는 다케자와와 데쓰, 자기의 외모를 이용해 소매치기를 하는 마히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그들에게 얹혀사는 야히로와 간타로의 조합은 우습지만,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어떤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등장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다고 해서 이 소설이 추리소설로서의 매력을 전혀 갖추지 않은 심심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작전명 알바트로스가 시작되면서 미치오 슈스케 특유의 필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거든요. 다섯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흡사 긍정적인 대안가족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만 같던 소설은 사채조직의 히구치가 다케자와의 뒤를 바짝 쫓아오면서 분위기를 급반전하고, 여태까지 쫓기기만 했던 사람들이 이번엔 자신들이 그들을 쫓겠노라며 새로운 다짐을 하지요. 사채조직의 돈을 사기쳐 빼앗기 위해 세밀한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은 디테일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쳐 실제 사기조직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결전의 날, 작전 알바트로스를 수행하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고 작가의 호흡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을 정도구요.
종장에 이르면 이내 작가가 유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하지만 쉽게 속으시면 안 됩니다. 작전명 알바트로스의 끝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은 다섯 사람을 그리는 미치오 슈스케는 뭔가 그답지 않아 왠지 뭔가 심심하고 미심쩍은 느낌을 주고, 역시나 -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최고라고 말하는 - 최후의 반전이 페이지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 반전이 없었더라도 훌륭한 소설이었겠습니다만, 왠지 돼지고기 없는 김치찌개를 먹는듯 밍밍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미치오 슈스케다운, 그리고 이 소설에 가장 어울리는 재기발랄한 결말이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어떤 장르의 소설이건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 작품은 그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장르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반전과 재기넘치는 결말까지 갖추고 있어 더할나위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요.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