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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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겐 신간이 발매되면 내용이나 장르, 평가에 관계없이 꼭 그것을 읽어보는 몇몇 작가가 있습니다.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인 미야베 미유키가 그러하고, 신본격의 귀재라 불리는 우타노 쇼고도 그러하며, 혹은 반전의 대가 제프리 디버라거나 뒤늦게 한국에 완역판이 번역되고 있는 엘러리 퀸 역시 저에게 그런 작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책도 바로 그런 작가의 작품이지요. 신작이 나오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게 만드는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인 왕복 서간입니다.

 

왕복 서간이라는 제목답게, 책은 사건과 관계된 주인공들이 주고받은 편지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책은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편지를 주고받는 주인공들은 모두 과거의 사건에 관련된 진실을 찾고 있지요. 사고를 당하고 자취를 감춘 친구의 행방을 찾는 동창들의 이야기를 담은 십 년 뒤의 졸업문집, 은사의 부탁을 받아 스무해 전 사고와 관련된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제자의 이야기인 이십 년 뒤의 숙제, 뜻하지 않은 화재사고로 함께하게 된 연인들의 이야기인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 모두 과거의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고풍스러운 편지 형식입니다.

 

 

왜 ‘오가는 편지’ 형식일까?

등장인물들의 대화 사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화나 문자, 혹은 이메일 등의 간편하고 빠른 통신 수단이 존재하는 현재에 굳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상당히 고전적이면서도 이색적인 연락 방법입니다. 미나토 가나에가 서술 방식으로 굳이 이런 서간문 형식을 선택한 것은 왜일까요?

 

가장 먼저, 미나토 가나에가 즐겨 쓰는 옴니버스식 서술 방식에 서간문이 적합하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고백, 속죄, 야행관람차 등 미나토 가나에의 기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에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서간문은 한 가지 사건에 대해 각자의 시점을 재구성해 보여줄 수 있고 기본적으로 의사 소통 방식에 해당하기 때문에 관계된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에도 좋지요.

또한 빠르고 즉시 전달되며 수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인스턴트 메시지의 성격을 띄는 전화, 문자, 이메일 등과 달리 작성하고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지는 좀 더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 작성하게 되고, 따라서 수신인도 독자도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읽는 재미를 찾게 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요, 목소리를 직접 들려줘야 하는 전화와 상대방의 전화기를 갖고 있어야 하는 문자 혹은 계정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는 이메일과 달리 편지는 집 주소만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상대를 위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트릭이나 반전을 숨길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편지는 주고받는 서로 간에 고전적인 향취를 불러일으켜 소설 전체에 클래식한 분위기를 가미해주므로 ‘왕복 서간’의 주제에 걸맞는 분위기를 조성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편지는 다대일, 혹은 다대다가 아닌 일대일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수신인을 정해놓고 훨씬 더 내밀한 속사정을 터놓기가 쉽다는 점에서 역시 작가로서는 매력적인 서술 형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미나토 가나에스러우면서도, 또한 그녀답지 않은

옴니버스 방식으로 글을 서술하는 작가는 많지만 미나토 가나에만큼 옴니버스 서술 형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작가는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데뷔작인 고백은 한 가지 사건에 얽힌 사람들 각각의 관점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해서 보여준 작품이였고, 속죄 역시 십수년 전 일어난 끔찍한 사고와 관련된 아이들 각각의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떤 사건에 대한 입장은 관련된 사람들 수만큼 존재하고, 그에 대한 관점 역시 보는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말을 이전에 쓴 적이 있지만,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가 바로 미나토 가나에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 책에서도 미나토 가나에는 ‘편지’라는 소재를 이용해 한 가지 사건에 대한 각자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구성해 보여주고 있는데, 데뷔작 고백에서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그 솜씨만은 여전합니다.

 

다만,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중 고백이나 속죄만을 본 독자라면 아마 왕복 서간에서 보이는 미나토 가나에의 변화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을 겁니다. 고백과 속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오히려 희망적인 관점으로 결말을 열어놓은 것이 돋보이는데, 특히 두 번째 단편 이십 년 뒤의 숙제와 세 번째 단편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에서 그러한 관점이 두드러집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단지 이번 작품에서 새롭게 보여준 것은 아니긴 합니다. 전작인 야행관람차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데, 다만 그것이 야행관람차에서 아직 덜 다듬어진 것처럼 다소 겉도는 느낌을 주었다면 왕복 서간에서는 그러한 관점이 조금 더 잘 무르익은 느낌을 주어 독자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특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한편, 이러한 변화를 시도하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은 어쩌면 가장 미나토 가나에스러운 점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소설 내에 치밀하고 촘촘하게 복선을 깔아놓고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야기를 전복시켜버리는 미나토 가나에의 솜씨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각 단편을 보면서 결말에 대해 대략 예상하고 있던 독자들까지 다시금 탄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결말에서 보여주는 반전도 반전이려니와 짧은 이야기 속에서 복선과 반전을 안배하고 준비해 놓는 실력이 전작들보다 한층 더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가지 단편에서 반전이 있으리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또 다른 반전에 완전히 뒷통수를 맞았는데요, 아마 다른 많은 독자들도 이런 재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겁니다 :)

 

 

자기복제는 쉽지만 크게 성공한 기존의 스타일을 버리고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은 창작자에게 가장 큰 위험이자 모험일 것입니다. 게다가 추리/미스터리 장르의 도서들은 특성상 인간이 저지른 범죄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므로 추리 소설을 쓰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이야기 속에 담아낸다는 것이 어렵기 마련인데,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미나토 가나에가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먼 훗날에도 그녀의 이름이 사랑받는 미스터리 작가로 인구에 회자되리라는 확신이 드는 한 권이었습니다. 추천해요:D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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