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웃의 범죄 - 미야베 미유키 단편집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장세연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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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장편 못지 않게 단편집도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사실 잘 쓰여진 단편집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 중 몇몇은 훌륭한 단편집을 쓴 작가이기도 해요. 예를 들면 로알드 달이라거나, 히가시노 게이고 등이 그렇죠. 그 중에서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단편집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우리 이웃의 범죄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데뷔작인 우리 이웃의 범죄를 포함한 다섯 가지 단편을 실어놓은 이 책은, 초기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타이틀롤인 우리 이웃의 범죄는 데뷔작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짧은 페이지 안에 추리소설의 필수요소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지요. 모험, 보물, 협박, 그리고 반전까지 말입니다. 다른 단편 역시 훌륭합니다. 결혼식 축전과 관련된 살인사건을 다룬 ‘축 살인’, 한밤중에 아버지의 부정을 고발하기 위해 아이를 안고 찾아온 의문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 ‘이 아이는 누구 아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위한 유쾌한 사기사건 ‘기분은 자살 지망’ 까지 하나 빼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단편은 ‘선인장 꽃’이었어요. 미스터리인 양 사건의 진실을 감추고 있던 전개 부분도 호기심을 제대로 유발하도록 잘 쓰여진데다, 미야베 미유키의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여과없이 잘 표현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어른들을 위한 한 편의 동화라고 할 수 있었지요.

 


 제가 이 단편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저것 때문일 것입니다. 여타의 다른 추리소설 작가들과는 달리 미야베 미유키는 끔찍한, 혹은 상상할 수 없는 범죄나 이상현상을 다루면서도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아요. 어떤 흉악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결국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일종의 인간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 누쿠이 도쿠로 등 여타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와 비교하면 참으로 독특한 시점이지요. 범죄의 이유는 사회적 구조에 있지만 책을 보는 독자들마저 그 말없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 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관점이 제대로 꽃을 피운 것은 일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 흑백이지만, 초기작인 단편들에서도 그와 같은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였어요.

 


 이 작품을 볼 당시, 저는 우리나라에 아주 적은 수의 작품만 번역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 작가를 찾아 헤매이는 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미미여사와 같은 대가의 작품에는 다소 소홀했었지요. 이 책은 그것을 뼈아프게 반성하게 해 준 한 권이었습니다. 역시 미야베 미유키군, 이라는 감탄이 나오는 책이었달까요.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추천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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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엄지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0
미치오 슈스케 지음, 유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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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만이 정면에서 다른 손가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섯 손가락 중에서 엄지만이 다른 손가락들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죠."

 

<까마귀의 엄지> 中, 미치오 슈스케 作

 

 

 

 일본 미스터리를 처음 읽는 친구들이 책을 추천해달라고 할 때 어떤 책을 추천하시나요? 전 그럴 때마다 난감함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일본 미스터리라는 것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일본 특유의 감성 과잉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영미 미스터리/스릴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트릭 위주의 구성만이 눈에 들어오기 십상이거든요. 잘못 추천해주었다가는 감사의 말은 커녕 다시는 일본 추리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안타까운 선언을 들어야만 하니까 그런 추천엔 참으로 조심스러울 수 밖에요. 하지만 일본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보기 시작하는 친구들에게도 항상 믿고 소개해줄 수 있는 작가가 한두명은 있게 마련인데요, 오늘 리뷰를 쓸 소설은 그 중 한명인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 까마귀의 엄지입니다.

 


 다케자와와 데쓰는 젊은 시절 사채때문에 인생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진 사기꾼들입니다. 노름판에서 친구의 빚을 떠안은 다케자와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사채조직에서 정리업자로 일을 하지만, 결국 그의 빚독촉에 못 이긴 어린 자매의 어머니가 자살한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뒤늦게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 다케자와는 내부의 서류를 경찰에게 유출시켜 조직을 일망타진하지만, 그 댓가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열 살 난 딸아이가 보복성 방화로 죽거든요. 딸아이가 죽고 나서 다케자와는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이 사회에서 악당처럼 살아가기로 맘먹게 된 겁니다. 자신처럼 사채 때문에 부인을 잃은 데쓰를 만나 함께 사기를 치며 살아가던 다케자와는 어느 날 한 소매치기 소녀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내 그 소녀가 자신이 죽음으로 내몬 여자의 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집에서 쫓겨나게 된 소녀를 자신과 데쓰의 집으로 받아들이고, 엉겁결에 그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까지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다섯 명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케자와를 쫓고 있는 사채조직의 손길이 바로 뒤까지 그들을 뒤쫓고, 결국 이 다섯 명은 각자가 쌓아온 기술을 모두 발휘해 그 사채조직을 대상으로 최후의 사기 대작전을 펼치기로 하지요.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특징적이었던 점은, 주인공이 사기꾼이고 모여살게 된 다섯 명의 모임이 어쩐지 안티히어로들의 모임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따뜻하고 다정한, 다소 색다른 시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탐정이나 탐정과 가까운 주변인물, 혹은 피해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추리소설과 달리 사기꾼을 주인공으로 한 시도는 색다르지만 작가로서는 위험을 안은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 속일지라도 선량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주인공은 보고싶지 않은 저같은 독자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되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주인공과 그 친구들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건, 그들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잃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여긴 사람들이며, 또한 사회와 사람들에게 불신을 갖고 있지만 결국 가족과 친구와 함께, 사람들 속에서 살고싶어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은 희극적이면서도 찡한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악당이라고 되뇌이며 사기를 쳐 먹고 살고 있는 다케자와와 데쓰, 자기의 외모를 이용해 소매치기를 하는 마히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그들에게 얹혀사는 야히로와 간타로의 조합은 우습지만,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어떤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등장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다고 해서 이 소설이 추리소설로서의 매력을 전혀 갖추지 않은 심심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작전명 알바트로스가 시작되면서 미치오 슈스케 특유의 필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거든요. 다섯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흡사 긍정적인 대안가족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만 같던 소설은 사채조직의 히구치가 다케자와의 뒤를 바짝 쫓아오면서 분위기를 급반전하고, 여태까지 쫓기기만 했던 사람들이 이번엔 자신들이 그들을 쫓겠노라며 새로운 다짐을 하지요. 사채조직의 돈을 사기쳐 빼앗기 위해 세밀한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은 디테일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쳐 실제 사기조직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결전의 날, 작전 알바트로스를 수행하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고 작가의 호흡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을 정도구요.

 


 종장에 이르면 이내 작가가 유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하지만 쉽게 속으시면 안 됩니다. 작전명 알바트로스의 끝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은 다섯 사람을 그리는 미치오 슈스케는 뭔가 그답지 않아 왠지 뭔가 심심하고 미심쩍은 느낌을 주고, 역시나 -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최고라고 말하는 - 최후의 반전이 페이지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 반전이 없었더라도 훌륭한 소설이었겠습니다만, 왠지 돼지고기 없는 김치찌개를 먹는듯 밍밍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미치오 슈스케다운, 그리고 이 소설에 가장 어울리는 재기발랄한 결말이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어떤 장르의 소설이건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 작품은 그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장르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반전과 재기넘치는 결말까지 갖추고 있어 더할나위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요.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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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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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옛날과 달리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은 많이 사라졌다.
가족의 덫에 걸렸다는 느낌도 없었다.
두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는 달리 달아날 만한 곳도 없으니까.
 
<빅 픽처> 中, 더글라스 케네디 作

 

 

 읽으면 읽을수록 실망을 주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읽으면 읽을수록 만족을 주는 작가가 있는데요. 저에게 더글라스 케네디는 후자에 속하는 작가라고 이미 한 번 언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책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 빅 픽처입니다.

 


 벤 브레드포드는 사진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사는 변호사입니다. 사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모든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변호사로서 살아가고 있지요. 그의 지나간 꿈을 다시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지하에 전시된 카메라들과 사진 뿐입니다. 어느 날 벤은 아내인 베스가 이웃인 게리 서머스와 외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게리와 언쟁을 벌이다 홧김에 그를 살해하고 맙니다. 절망해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벤은, 이내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라고 여기고 새로운 삶을 위해 계획을 꾸밉니다. 게리를 자신으로 위장해 사망한 것으로 꾸미고 자신은 게리 서머스가 되어 멀리 떠나는 거지요.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사진가 게리 서머스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벤. 그의 두번째 기회는 과연 그에게 새로운 삶을, 희망을 가져가 줄까요…?

 


 주인공 벤 브래드포드는 ‘비일상으로의 탈주’에 대한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비일상으로의 탈출을 원한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지요. 그의 직업이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인 변호사라는 점은 그런 면에서 더욱 자유에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기도 해요. 그래서 처음 그가 이루지 못한 꿈에 목말라하고 예상 외의 사건으로 결국 또다른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책을 읽는 독자들은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 않나 합니다.

 


 언뜻 보면 그 카타르시스는 합당한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생 꿈꿔오던 사진가로서의 삶은 만족스럽고, 부정한 아내 대신 다정하고 충실한 연인도 생기지요. 우연히 찍은 사진은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주고요. 하지만 벤은 문득문득 차오르는 공허감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버지와 같았던 선임 변호사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아직도 아빠를 찾는 어린 아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포기한 삶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이 벤을 찾아듭니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일상에서 맛보던 작은 행복들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벤 브래드포드가 아닌 게리 서머스로서 뒤늦게 알게 되는 거지요. 꿈꾸던 비일상이 일상이 되었을 때, 반복되던 삶을 탈출해 꿈꾸던 날들 속에서 살게 되었을 때에서야 그 일상조차도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탈주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아이러니가 벤을 더욱 괴롭게 합니다.

 


 물론 벤은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지도 않고 일상에서의 탈주를 꿈꾸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일상이 되어버린 비일상에 만족하고 안주해서는 아닙니다. 스스로가 깨달았듯이,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탈출하고자 하는 맹목적인 욕망이 일상의 모든 쾌락들을 스스로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에요. 모멘트에서는 애달픈 로맨스로 인생의 어느 날 놓치고 만 순간에 대해 풀어놓던 더글라스 케네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은 가치있다고 강변했듯이, 빅 픽처에서도 더글라스 케네디는 지금 당신이 흘려보내고 있는 이 일상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며 이미 당신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름끼치도록 잔인하게 보여주듯이 말이에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작정 일상을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느껴보았을 겁니다. 이 곳을 벗어나면 무언가 긍정적인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 적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그 기로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가 방금 이별하고 온 일상보다 밝은 미래일까요? 여기서 꿈꾸던 자유가 정말 당신이 그리던 모습일까요? 이런 낙관적인 상상에 조용히 의문을 제기하는 소설입니다. 읽지 않으셨다면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추천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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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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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서도 추리소설 시장의 파이가 넓어지면서 여러 출판사에서 속속들이 추리작가 선집, 혹은 전집을 내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출간된 것이 가장 기뻤던 작가 선집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매그레시리즈, 그리고 지금 말씀드리려는 엘러리 퀸 시리즈였습니다. 둘 모두 추리소설의 고전으로 뽑히지만 마땅한 완역본이 없어 국내 추리소설 마니아들의 원성을 샀던 시리즈지요. 특히 엘러리 퀸 같은 경우 1990년대 시그마북스에서 일부 출간된 시리즈가 절판된 이후로는 마땅한 선집조차도 존재하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었는데, 이번에 시공사에서 시그마북스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엘러리 퀸 선집을 재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책은 이 엘러리 퀸 선집에서 첫 번째로 출간한 로마 모자 미스터리입니다.

 

 

 뉴욕의 로마극장에서 인기리에 공연중인 연극 <건플레이> 상영 도중 한 신사가 독살된 채로 발견됩니다. 좌석에 앉은 채로 발견된 이 시체는 변호사인 몬테 필드로 밝혀지는데요, 이 몬테 필드라는 변호사는 본업보다 협박과 공갈로 돈을 벌어온 악당이었습니다. 극장 안에는 그와 동업을 하다가 최악의 결말을 맞은 변호사 벤저민 모건과 피해자의 변호를 받았던 범죄자 목사 조니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몬테 필드의 주머니에서는 부호 프랭클린 아이브스 포프의 영양인 프랜시스 아이브스 포프 양의 핸드백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수많은 의문점 중 리처드 퀸 경감과 아들 엘러리 퀸이 주목한 미스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몬테 필드의 모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피해자의 복장 중엔 모자가 없습니다. 얼핏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작은 흠이지만 퀸 부자는 이 부조화를 놓치지 않고 모자의 행방을 추적합니다. 사라진 모자가 범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는거지요. 소설의 제목처럼 이 소설의 모든 추리는 이 ‘로마 모자의 행방’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의 미학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고전 추리의 원형을 온전히 찾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선 고전 추리소설의 공식이랄 수 있는 연역적 추리 기법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얼핏 보기에는 어떠한 관련도 없어 보이는 단서를 모아서 사건과 관계된 전체적인 정황을 추리해내는 이 연역적 추리 기법은 오랫동안 미스터리 장르 전반을 이끄는 추리 기법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최근 추리소설의 장르가 다양화되고 특화된 소재를 사용하는 추리소설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다소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복간된 이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차근차근 증거를 모아 범인의 뒤를 쫓는 연역적 추리 기법으로 고전 추리소설의 진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에요. 어떠한 사소한 행동에도 타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리적 전개는 오히려 현대 추리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전 추리소설만의 미학이기도 하구요. 몬테 필드의 살인사건 이후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퀸 부자가 사건의 단서를 찾아서 추리하는 내용이 이어지므로 서스펜스는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연역적 추리의 미학에 집중할 수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 소설에서 특기할 만한 점 또 한가지는 현대 추리소설에서도 종종 쓰이곤 하는 ‘독자에의 도전장’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지요. 막간을 삽입해 독자에게 이제 모든 범인과 범행 수법에 대한 모든 증거가 제시되었으니 범인을 추리해 보아라! 라고 외치는 엘러리 퀸은 가끔 얄미워보이기도 하지만, 이 부분은 독자에게 공평한 게임을 제안하고 있다는 퀸 스스로의 자부심이 잘 보이는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퀸은 밴 다인이 그랬듯이 독자에게 탐정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쥐어주고 공정한 미스터리 게임을 벌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요. 저 역시 독자에게 불공평한 게임을 제안하고 종장에서 이 문제는 명탐정인 OOO만이 풀 수 있는 문제였어! 라고 말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추리소설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사실 엘러리 퀸이 자부심을 가질만 하지 않나 해요.

 

 

 저는 언제나 추리소설 초심자에게 추리소설을 권할 때 고전부터 읽으시라고 권하곤 합니다. 추리소설의 경우 현대 스릴러물을 읽고 나면 고전 추리소설이 상대적으로 소재나 범행수법, 동기 등의 다양성이 떨어져서 밋밋해보일 수 있다는 것도 물론 한 가지의 이유가 되지만, 무엇보다 추리소설의 고전은 그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 소설 역시 그러한 풍미를 가득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1920년대 뉴욕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엘러리 퀸의 그림자를 2012년 한국에서 다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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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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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세상에서 빠른 속도로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을 출간해주고 있네요. 오늘 이야기할 책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신작, 파리 5구의 여인입니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해리 릭스는 제자와 추문에 휩싸여 불명예스러운 퇴직을 한 후 파리로 떠나옵니다. 사랑하는 딸과 안정된 직장 모두를 잃은 그는 끔찍한 절망에 사로잡히지만 야간 경비 일을 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는 등 재기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요. 그러던 어느 날 해리는 미국의 동료 교수가 추천해준 살롱에서 마지트 카다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어쩐지 알 수 없는 매력을 풍기는 이 여인에게 미친 듯이 매혹됩니다. 비록 직장과 가족은 잃었지만 소설 집필도 순조롭게 이어지고 사랑스런 연인도 얻은 해리. 앞으론 좋은 날들만 펼쳐질 것 같지만 야간 경비를 서는 건물은 어쩐지 수상쩍고, 특정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만 만나길 종용하는 연인도 무언가 미심쩍습니다. 그러던 도중 해리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요….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더글라스 케네디의 이번 작품 역시 흥미로운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 파리로 옮겨온 해리를 그리는 부분에서는 어쩐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온 빅 픽처의 벤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내 독자들은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그가 찾은 새로운 삶은 벤의 것과는 달리 무언가 이상스러운 불안감이 감도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벤 역시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도망와 이전의 삶을 숨겨야만 하는 불안정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지만, 해리의 삶은 그가 미처 모르고 있는 어떤 불안 요소들을 주변에 잔뜩 두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독자들이 그것이 단순히 두고 온 삶에 대한 그리움과는 다른 어떤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오는 불안감인가를 알게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해리에게 연달아 찾아드는 행운, 그것은 스스로의 자유를 댓가로 한 불완전한 행운이니까요. 해리는 그것을 원치 않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선택한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주어진 행운, 그리고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남자… 네, 더글라스 케네디가 파리 5구의 여인에 담은 화두는 이렇습니다. “자유를 저당잡힌 행복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자유를 댓가로 한 행운’이라, 어마어마한 행운을 거머쥘 수 있다면 자유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해리의 행운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잔인하게 배신하고 내연남과 내통해 해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아내와 그 내연남이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그를 이용하고 종내에는 죽이려 했던 암흑가의 사람들이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분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호텔 종업원이 해리에게 비열하게 굴었다는 이유만으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를 협박하던 이웃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갈 때 우린 비로소 이 행운이 정말 행운인지, 해리에게 주어진 이 강제적인 행운이 과연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때에도 그가 선택할 만한 것이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해리가 원한 것은 단지 새롭게 시작할 기회, 그것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더글라스 케네디는 해리 릭스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유를 저당잡힌 행복은 완전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것에 만족하고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해리가 아무리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더라도, 그가 자유를 저당잡힌 이후로 얻은 행복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일지라도 그가 마지트에게 자신의 자유를 헌납한 이후로 느끼는 절망감을 보상해주진 못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소설 마지막까지 다른 선택의 길이 있지 않을까 굳게 믿고 있는 것도 그렇구요….

 


 안타깝게도, 빅 픽처에서처럼, 해리는 결국 이전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안락한 새장에 갇혀서 주어지는 행운과 기회를 받아들이고 그녀가 설계한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사랑하는 딸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그녀가 하라는대로 사는 것 말입니다. 그래도 원하는 성공과 부를 얻게 되지 않겠느냐, 라고 물으시면 이것이 해리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어요. 전 그래서 더더욱 해리가 치러야 하는 댓가는 너무나도 혹독한 것으로 보입니다. 벤과 달리 해리에게 동정심이 가는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어요.

 


 유독 기욤 뮈소와 더글라스 케네디를 많이 비교하게 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더글라스 케네디의 특장점은 기욤 뮈소와 달리 흘러가는 이야기에 한번 생각해볼 만한 거리를 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욤 뮈소의 책이 다소 동어반복의 느낌을 주는 데 비해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은 장르도, 생각할 거리도 다양하게 던져주지요. 빅 픽처에서는 꿈꾸던 비일상의 모습에 대해, 위험한 관계에서는 모성과 모멘트에선 인생을 바꾸는 한 순간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던 더글라스 케네디가 이번 책에서 던져준 주제 역시 한번쯤 생각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들 중 뛰어나달 만한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더글라스 케네디를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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