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리시온 1 - 신이 떠난 세상
이주영 지음 / 가넷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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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작가이면서 본인이 삽화와 소설의 배경에 어울릴 BGM까지 작곡했다는 소개에 솔깃해 읽게 된 판타지 소설.

국내에서 장르 소설의 입지가 그리 넓지 않다 보니 그 옛날 퇴마록 정도나 기억에 남지 그 이후로는 확 마음에 들었던 판타지 작품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신인 작가가 쓴 작품인지라 솔직히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읽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상당히 괜찮은 판타지 소설을 만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 판타지나 SF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세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가, 즉 세계관을 중시하는 편인데 이 작품의 세계관이 상당히 창의적이라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300페이지 이상 되는 책 네 권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으로 풀어낸 세계 속에는 단순히 마법사와 상상 속 동물들이 펼치는 모험 이야기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토리를 정리하기에 앞서 세계관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정리해 보려 한다.

먼저 이 책에도 여느 판타지물처럼 마법이 등장한다.

각종 원소를 다루는 마법이 있지만 특이하게도 전통적인 판타지물처럼 마법을 '배워서' 쓰는 개념이 아니라 각 인종들마다 고유의 마법 능력을 유전으로 타고나는데 이 능력의 정도가 개체마다 차이가 크다고 보면 된다.

즉, 물의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물만 다루지 결코 불을 다루지는 못한다는 설정이다.

주인공인 보리얀은 여러 인종 중 가장 차별받는 계층의 여자아이로 등장하며 동물, 영혼과 대화가 가능한 판타지물의 '드루이드' 포지션의 능력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

사회적인 배경은 보리얀이 어려서 부모님께 전해 들은 세계의 창조 설화에 따르면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두 가지 힘이 존재하고, 선의 힘을 숭배하는 자들이 종교적인 권력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신분 계급 사회로 그려냈다.

여러 인종들이 있지만 특정 인종이 특권층에 집중되면서 인종 차별, 계급 차별이 만연한 사회가 되었다.

당연히 고여있는 권력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패하게 되고 보리얀과 그의 동료들이 이 부패한 사회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주요 스토리이다.

목장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저마다 울타리가 있어. 그렇지 않니?

그 울타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남의 영역에 들어갈 때 약탈이 일어나는 거란다.

그게 바로 고통의 시작인 게야.

눈에 보이는 약탈은 남의 재산을 훔치는 거고, 보이지 않는 약탈은 자유를 훔치는 거지."

(1권, pg 76)

판타지 소설이면서도 고대의 유물을 차지하거나 세계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층을 몰아내고 평등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 스토리의 참신함을 더해준다. (물론 이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세계 멸망을 막는 길이기도 하지만)

물론 드루이드의 능력을 지닌 보리얀과 함께 싸우는 상상 속 동물들과 각종 원소들을 다루는 마법사들(작품 속 명칭으로는 '마녀'지만)의 활약도 상당하지만 노예 출신이었다가 주인공 일행들에 감화되어 권력층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은 일반 병사들의 활약도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반면, 워낙 오랜 기간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와서 '자유'라는 개념을 몰라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계층도 등장할 정도로 저자가 판타지스러운 세계에 나름의 현실성을 부여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노예가 별것인가?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생각하길 멈추는 순간 누구나 노예가 되는 거야. 달랑 증서 한 장으로 노예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나.

무니안들의 성스러움이 주는 공포, 이 도시를 움직이는 황금의 힘,

그리고 잘못된 세상에 대항하기 두려워하는 개인의 나약함이 모두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지.

(3권, pg 101)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았을 주제인 '권선징악' 이야기지만 악의 세력이 단순한 판타지물에 등장하는 '세계 멸망 성애자'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던 지극히 인간적인 동기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도 작품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권리, 권력, 규율, 법도,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정의와 도덕.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이 믿을 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정치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대중이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3권 pg 126)

작품은 동양적인 내세관인 윤회와 업보의 개념이 떠오르는 결말로 끝이 난다.

꽤 오랜 분량을 들여 사건의 마무리와 그 뒷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어서 모든 일이 끝난 후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궁금해할 독자들의 목마름도 잘 해결해 주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속에서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많은 진동과 갈등의 세상을 여행하게 된다는 것.

그 진동과 갈등들은 탄생과 죽음의 고리를 만들고,

그 사이에서 '삶'이라는 신비로운 경험을 만들지."

(4권, pg 232)

물론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작가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보리얀이 여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여성들이 굉장히 소극적인 역할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래서 주인공의 활약을 더 돋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의도로 보이기는 하나, 세계관 상 여성이라고 해서 상급 지위에 올라간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리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주체적인 여성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다.

실제로 여성으로 바꿔도 전개에 전혀 지장이 없는 인물들이 꽤 많다.

(최근에 하도 PC에 범벅된 사례들만 보다가 덜 PC한 작품을 봐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이 홀로 여성인데 멋진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작품의 러브라인도 약간은 유치한 느낌(전형적인 여성향 연애소설의 전개를 보는 듯한)을 주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도 아쉬웠다.

러브라인이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 비중이나 전개 방식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했다면 작품의 완성도가 훨씬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서두에서 작가가 다방면에 재능이 많다는 말을 썼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글이 그중 가장 좋아 보였다.

내가 그림이나 음악에는 무지해서 그런지 그렇게 좋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솔직히 표지도 너무 어린 독자를 겨냥한 취향이 아닌가 싶어 처음에 읽을 때 거부감이 조금 있었다.

내용이 판타지 소설 치고는 유치함이 적기 때문에 보다 나이 많은 독자를 겨냥한 감성으로 포장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세계관의 디테일한 표현, 전개가 빠르게 느껴지도록 간결하게 표현한 상황 묘사, 추상적인 개념이나 감각에 대한 풍부한 묘사 등 작가의 문장은 꽤 마음에 들었다.

4권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으로 첫 작품을 펼쳐 낸 작가이니만큼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다.

본 작품은 4권으로 깔끔하게 마무리가 잘 되었기 때문에 다음에는 또 어떤 세계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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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쓰면 재미있는 어린이 사자성어 맛있는 교양 1
박일귀 지음, 김현후 그림 / 맛있는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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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 키우는 집들을 보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영어를 시켜야 한다며 이런저런 사교육을 보내곤 한다.

보낼 형편이 안되기도 하지만 난 돈이 있어도 국어를 더 진지하게 가르치는데 쓰고 싶다.

문해력이 다른 공부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국어를 더 확실히 알려주고 싶고, 그 첫걸음이 다양한 표현에 익숙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일찍부터 속담 책을 사주고 같이 읽었었는데 그러다 보니 여섯 살 아이가 이제 제법 속담을 적재적소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부모 된 입장에서 뿌듯하기도 하고 다른 걸 더 알려주고 싶다는 욕심도 든다.

속담을 알았으니 이제 사자성어도 슬슬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만화로 된 어린이 사자성어 책이 나왔다고 해서 얼른 읽어보게 되었다.

(pg 90-91)

요즘은 자격증 딸 게 아니면 '한자'를 공부하지는 않지만 '한자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 책은 한자도 실려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자성어가 어떤 의미이고 어떤 상황에 쓰이는지를 알려주는 것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일단 주제가 되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알려준 뒤 이와 비슷한 말과 반대말인 사자성어까지 다 실려있다.

비슷한 의미지만 쓰이는 상황이 미묘하게 다른 경우도 있고, 한 표현의 정 반대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도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자성어를 공부할 때 연관 사자성어를 함께 읽어볼 수 있게 한 구성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해당 사자성어가 쓰이는 구체적인 맥락은 옆의 만화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다.

속담도 그렇고 사자성어도 그렇고 알면 알수록 언어 구사력에는 큰 차이가 생긴다.

부모가 집에서도 영어를 쓰는 것이 아닌 이상 영어 단어 몇 개 더 외운다고 아이의 언어생활이 윤택해지기는 어렵겠지만 속담이나 사자성어는 아이의 모국어 활용 능력에 제법 영향을 준다.

모쪼록 이 책을 통해 아이가 속담처럼 사자성어에도 관심을 가져 국어를 보다 풍성하게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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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도 문이 있어요?
에즈기 베르크 지음, 오즈누르 손메즈 그림, 최진희 옮김 / 라이브리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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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잘해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잘 못하는 애비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아이 역시 평소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표현을 잘 안 하는 것 같다.

지금이야 어리니 그럭저럭 소통이 되는 것 같지만 조금만 더 커도 금세 사춘기가 오고 그러다 보면 여느 부모와 자식처럼 소원한 사이가 될까 두려워지는 요즘이다.

아이의 마음을 더 잘 헤아려주면 좋으련만 나 자신의 감정도 잘 모르는데 아이의 감정이라고 잘 알 수 있으랴.

그저 아이가 좀 더 표현해 주면 그나마 헤아려주는 척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읽어주고 싶었던 책이다.

책의 주인공은 '알리'라는 남자아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들과 감추고 싶은 마음들이 있게 마련이다.

실수를 해서 부끄러웠던 기억, 내가 타인에게 행한 잘못들, 타인이 나에게 준 상처들...

우리의 알리 역시 감추고 싶었던 많은 기억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속 불편한 마음들을 직시하기로 결심한다.

(pg 41-42)

부정적인 마음들은 감추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고 그 마음들을 인정해야 그 마음을 극복하고 한걸음 나아갈 용기도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리는 깨닫게 된다.

같이 책을 읽은 아이도 알리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터놓을 수 있는 용기를 배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같이 읽은 나 역시도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 이를 최대한 존중하고 용기 내어 표현해 줌에 대한 고마움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글씨도 그리 많지 않고 굉장히 잔잔한 느낌을 주는 동화책인데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이어서 그런지 읽고 나면 뭔가 짠한 여운이 남는다.

아동용 동화지만 읽어주는 부모의 마음에 더 와닿는 작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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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이TV 방울이의 하루 상식 레벨업 코믹북 1 방울이TV 방울이의 하루 상식 레벨업 코믹북 1
스튜디오 왓츠비 지음, 방울이TV 원작 / 서울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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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가 만화로 된 책은 초등학생 이상이 보는 책도 혼자서 꽤나 잘 본다.

그래서 만화로 되어 있으면서 내용도 좋아 보이는 책이 있으면 많이 권해주려 하는데 이 책 역시 그중 하나다.

방울이TV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콘텐츠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 같은데 아이가 아직 해당 유튜브를 본 적은 없어서 좋아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역시 만화로 된 건 좋아하는건지 배송이 오자마자 들고 잘 읽는 모습에 안심이 된다.



내용도 제법 좋다.

여섯 살인 우리 딸에게는 살짝 이른 감이 있지만 알아두면 좋을 생활 태도와 일반상식, 연예인 매니저와 기상캐스터 등 직업에 대한 소개에 이르기까지 총 8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그중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와 '방울이가 남소를 받는다면?!'이라는 에피소드도 있어서 이제 막 이성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각 에피소드가 끝나면 아래처럼 아이들이 알고 있으면 좋을 내용들이 적혀 있는데 특히 아래의 내용은 아이가 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꼭 경험하게 될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g 34)

아직 해당 채널의 영상을 보여준 적은 없는데 책 내용이 그대로 영상으로 된 것이라면 아이에게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래도 영상을 보고 나면 아이도 책을 보는 재미를 더 느끼지 않을까 싶다.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도 만화로 된 것은 잘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취학 아동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아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이게 1권이니 앞으로 더 나올 것 같은데 나올 때마다 사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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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밝혀낸 생후배선의 비밀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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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달은 점차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지식 격차를 만들어낸다.

지식 격차가 커지면 지식이 소수 엘리트들에게 독점되고 일반 대중은 모른다는 이유로 과학 발전에 방해가 되거나 무분별한 과학 기술 개발을 제대로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세상에서 과학 지식을 일반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 주는 교양서적의 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일반 대중들에게 뇌과학이 지금까지 어떤 성과들을 쌓아왔고, 이것이 세상과 인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책이다.

'뇌과학'이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두께도 본문만 350페이지 정도로 얇지 않아서 지루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최근에 읽은 과학 교양서 중 가장 쉽고 재밌었다.

일단 다루는 주제 자체가 방대하지 않고 전문적인 용어를 남발하고 있지도 않아서 읽기가 좋았다.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미완성인 상태로 태어나

모든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로 완성된다.

책은 어릴 적 뇌에 문제가 있어 뇌의 절반을 적출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간의 신체 기관 중 단연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뇌를 절반이나 들어내고도 정상적인 삶이 가능했을까?

놀랍게도 본인이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잘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 선천적으로 뇌의 반쪽만 가지고 태어난 아이 역시 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 부모도 아이의 장애를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큰 불편함 없이 생활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저자는 우리의 뇌가 정해진 기능을 단순하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지 않은 채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뇌는 외부 자극이 어떻게, 얼마나 들어오느냐에 반응해 스스로 모양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책의 원제인 'Livewired', 즉 스스로 배선을 깔듯이 뇌에 도달하는 자극의 종류와 강도에 따라 뇌가 그 기능을 만들어 가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어느 시점에 사고로 시각을 잃는다면 그때까지 뇌에서 시각을 관장하던 부분을 다른 감각들이 차지해 다른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드는 용도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강하게 발현된다.

그래서 선천적인 시각장애인 중 청각이나 촉각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예민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특정 기관과 인지하는 감각이 반드시 정해져 있는 것만도 아니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이 시각 정보를 청각 정보로 변환하는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면 마치 박쥐가 주변을 인식하듯 소리를 통해 주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vOICe'라는 앱인데 무료로 다운 가능해서 호기심에 받아봤는데 시각이 멀쩡한 사람이 느끼기에는 그저 기괴한 기계음이 들릴 뿐이다.

하지만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눈을 가리고 이 앱을 통해 '보는' 연습을 충분히 하면 눈을 감고도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주변을 보는 것처럼 인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원리를 활용해 일상생활 중에는 사용 빈도가 그리 높지 않은 촉각을 활용해 부족한 감각을 보완하거나 강화하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으로 개발되어 있다고 한다.

즉, 뇌에게는 외부 자극이 접수되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어느 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또한 굳이 우리 신체 기관을 통해서 접수된 자극이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기계 장치로 인간에게는 없었던 감각을 추가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책에 등장하는 예시로는 자석을 이식해 자기장을 느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기계의 작동 여부를 굳이 켜보거나 검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또한 나침반을 이식한 사람은 마치 철새가 작년에 왔던 곳을 정확히 찾아가듯 지도가 없어도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도 한다.

무게 1.4킬로그램의 뇌는 소리를 직접 듣거나 눈앞의 광경을 직접 보지 않는다.

뇌는 어둡고 조용한 지하 묘지 같은 두개골 안에 갇혀 있다.

뇌가 보는것은 다양한 데이터케이블을 통해 계속 들어오는 전기화학 신호뿐이다.

뇌가 처리해야 하는 정보도 그것뿐이다.

(pg 83)

이 부분이 굉장히 신기한데, 우리에게 없는 감각을 인지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후각이 없는 사람에게 지하철 옆자리에서 맡은 '델리만쥬 냄새'를 설명해야 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직접 맡아보지 않는 이상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각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변환해 뇌에 전기자극으로 인식하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도 그 냄새가 어떤 느낌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이 기술만 있다고 해서 만능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상당한 연습과 의지가 필요하다.

나이 역시 중요한 변수로 어리면 어릴수록 뇌가 새로운 배선을 까는 것이 용이해진다.

우리 인생은 한 번뿐이므로, 자신이 어떤 일에 헌신하는가에 따라

특정한 길을 따라가게 되고 나머지 길은 모두 '영원히 가지 않는 길'로 남는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인용구로

이 책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은 여럿으로 태어나 하나로 죽는다."

(pg 275-276)

책은 우리의 뇌가 어떻게 '학습'이라는 것을 하고 '기억'이라는 것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부분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지만 요점은 우리의 경험이 마치 젖은 종이를 한 겹 한 겹 쌓아가듯 뇌에 새로운 정보가 입력되면 기존의 정보와 통합되는 과정에서 학습과 기억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영화 매트릭스처럼 비행기 운전법을 뇌에 직접 업로드해 학습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 말한다.

우리의 뇌는 각자가 모두 다른 방식으로 학습하기 때문에(사람마다 기존 경험이 다 다르기 때문에) 표준적인 업로드 데이터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뇌를 연구함으로써 얻은 지식들을 다른 기계들에 적용할 수 있다면, 즉 뇌가 신체의 일부가 제거되었을 때 스스로를 새로운 몸에 맞게 조정하듯이 기계도 자신의 일부가 파손되었을 때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작동되도록 설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자원으로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 자연은 늑대의 뇌에 고정된 프로그램을 심는 것이 의미 없는 일임을 안다.

신체 형태는 바뀐다. 환경도 바뀐다. 능력과 행동 사이의 복잡한 관계도 바뀐다.

미리 정해진 회로를 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효율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그때그때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모든 것을 최적화하는 굴정보성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pg 331)

여하간 최근에 읽은 책 중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즐겁게 읽은 책 같다.

나이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집에 개인용 컴퓨터가 있는 집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컴퓨터를 한 사람마다 한 대씩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술 발전도 있지만 일반 대중 입장에서는 애써서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어느 정도나 발전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분야도 많다.

뇌과학 역시 그런 분야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타고난 신체보다 더 성능이 좋고 내구성도 좋은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생물공학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만 년 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후손들이

우리를 연구한다면,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느린 발전과정에서 벗어나

우리 몸의 미래를 처음으로 직접 조종하기 시작한 때로 간주될 것이다.

(pg 197)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지배종이 된 원동력이 바로 뇌에 있는 만큼 뇌과학의 발달은 인류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나갈 것이다.

이 책에서 본 사례들만 하더라도 인류가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해감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기대가 된다.

너무 재밌게 읽어서 읽는 동안 집사람에게 재밌는 내용을 설명해 주고 그랬는데 집사람은 (-_-) 이런 표정만 짓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재미있을 수는 없겠구나 싶지만 여하간 과학을 다룬 서적 중 보기 드물게 재미와 정보 면에서 고루 우수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사람됨은 우리와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모든 것,

즉 주변 환경, 경험, 친구, 적, 문화, 신념, 시대 등으로부터 나온다. - 중략 -

사실 우리를 에워싼 모든 것과 우리 자신을 분리할 길은 없다.

외부세계가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념, 신조, 포부는 모두 속속들이 그렇게 형성된다.- 중략 -

생후배선 덕분에 우리는 각자 세계가 된다.

(pg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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