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리시온 1 - 신이 떠난 세상
이주영 지음 / 가넷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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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작가이면서 본인이 삽화와 소설의 배경에 어울릴 BGM까지 작곡했다는 소개에 솔깃해 읽게 된 판타지 소설.

국내에서 장르 소설의 입지가 그리 넓지 않다 보니 그 옛날 퇴마록 정도나 기억에 남지 그 이후로는 확 마음에 들었던 판타지 작품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신인 작가가 쓴 작품인지라 솔직히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읽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상당히 괜찮은 판타지 소설을 만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 판타지나 SF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세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가, 즉 세계관을 중시하는 편인데 이 작품의 세계관이 상당히 창의적이라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300페이지 이상 되는 책 네 권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으로 풀어낸 세계 속에는 단순히 마법사와 상상 속 동물들이 펼치는 모험 이야기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토리를 정리하기에 앞서 세계관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정리해 보려 한다.

먼저 이 책에도 여느 판타지물처럼 마법이 등장한다.

각종 원소를 다루는 마법이 있지만 특이하게도 전통적인 판타지물처럼 마법을 '배워서' 쓰는 개념이 아니라 각 인종들마다 고유의 마법 능력을 유전으로 타고나는데 이 능력의 정도가 개체마다 차이가 크다고 보면 된다.

즉, 물의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물만 다루지 결코 불을 다루지는 못한다는 설정이다.

주인공인 보리얀은 여러 인종 중 가장 차별받는 계층의 여자아이로 등장하며 동물, 영혼과 대화가 가능한 판타지물의 '드루이드' 포지션의 능력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

사회적인 배경은 보리얀이 어려서 부모님께 전해 들은 세계의 창조 설화에 따르면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두 가지 힘이 존재하고, 선의 힘을 숭배하는 자들이 종교적인 권력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신분 계급 사회로 그려냈다.

여러 인종들이 있지만 특정 인종이 특권층에 집중되면서 인종 차별, 계급 차별이 만연한 사회가 되었다.

당연히 고여있는 권력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패하게 되고 보리얀과 그의 동료들이 이 부패한 사회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주요 스토리이다.

목장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저마다 울타리가 있어. 그렇지 않니?

그 울타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남의 영역에 들어갈 때 약탈이 일어나는 거란다.

그게 바로 고통의 시작인 게야.

눈에 보이는 약탈은 남의 재산을 훔치는 거고, 보이지 않는 약탈은 자유를 훔치는 거지."

(1권, pg 76)

판타지 소설이면서도 고대의 유물을 차지하거나 세계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층을 몰아내고 평등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 스토리의 참신함을 더해준다. (물론 이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세계 멸망을 막는 길이기도 하지만)

물론 드루이드의 능력을 지닌 보리얀과 함께 싸우는 상상 속 동물들과 각종 원소들을 다루는 마법사들(작품 속 명칭으로는 '마녀'지만)의 활약도 상당하지만 노예 출신이었다가 주인공 일행들에 감화되어 권력층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은 일반 병사들의 활약도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반면, 워낙 오랜 기간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와서 '자유'라는 개념을 몰라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계층도 등장할 정도로 저자가 판타지스러운 세계에 나름의 현실성을 부여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노예가 별것인가?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생각하길 멈추는 순간 누구나 노예가 되는 거야. 달랑 증서 한 장으로 노예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나.

무니안들의 성스러움이 주는 공포, 이 도시를 움직이는 황금의 힘,

그리고 잘못된 세상에 대항하기 두려워하는 개인의 나약함이 모두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지.

(3권, pg 101)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았을 주제인 '권선징악' 이야기지만 악의 세력이 단순한 판타지물에 등장하는 '세계 멸망 성애자'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던 지극히 인간적인 동기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도 작품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권리, 권력, 규율, 법도,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정의와 도덕.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이 믿을 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정치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대중이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3권 pg 126)

작품은 동양적인 내세관인 윤회와 업보의 개념이 떠오르는 결말로 끝이 난다.

꽤 오랜 분량을 들여 사건의 마무리와 그 뒷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어서 모든 일이 끝난 후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궁금해할 독자들의 목마름도 잘 해결해 주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속에서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많은 진동과 갈등의 세상을 여행하게 된다는 것.

그 진동과 갈등들은 탄생과 죽음의 고리를 만들고,

그 사이에서 '삶'이라는 신비로운 경험을 만들지."

(4권, pg 232)

물론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작가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보리얀이 여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여성들이 굉장히 소극적인 역할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래서 주인공의 활약을 더 돋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의도로 보이기는 하나, 세계관 상 여성이라고 해서 상급 지위에 올라간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리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주체적인 여성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다.

실제로 여성으로 바꿔도 전개에 전혀 지장이 없는 인물들이 꽤 많다.

(최근에 하도 PC에 범벅된 사례들만 보다가 덜 PC한 작품을 봐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이 홀로 여성인데 멋진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작품의 러브라인도 약간은 유치한 느낌(전형적인 여성향 연애소설의 전개를 보는 듯한)을 주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도 아쉬웠다.

러브라인이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 비중이나 전개 방식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했다면 작품의 완성도가 훨씬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서두에서 작가가 다방면에 재능이 많다는 말을 썼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글이 그중 가장 좋아 보였다.

내가 그림이나 음악에는 무지해서 그런지 그렇게 좋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솔직히 표지도 너무 어린 독자를 겨냥한 취향이 아닌가 싶어 처음에 읽을 때 거부감이 조금 있었다.

내용이 판타지 소설 치고는 유치함이 적기 때문에 보다 나이 많은 독자를 겨냥한 감성으로 포장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세계관의 디테일한 표현, 전개가 빠르게 느껴지도록 간결하게 표현한 상황 묘사, 추상적인 개념이나 감각에 대한 풍부한 묘사 등 작가의 문장은 꽤 마음에 들었다.

4권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으로 첫 작품을 펼쳐 낸 작가이니만큼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다.

본 작품은 4권으로 깔끔하게 마무리가 잘 되었기 때문에 다음에는 또 어떤 세계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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