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팬티 예쁘지? 토이북 보물창고 10
프랜 마누시킨 지음, 발레리아 페트로니 그림, 마술연필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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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태어난지도 어느덧 26개월이 지났다. 

말도 빠르고 걷기도 빠르고 키도 또래들보다 커서 잘 자라주고 있구나 싶지만 아직 배변을 가리지는 못하고 있다. 

사실 부모인 나와 집사람이 아직 엄두가 안나서 배변훈련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막상 하면 다른 것들도 금새 따라하는 아이니 잘 해주리라 믿지만 막상 기저귀를 뗀다는 것이 부모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물론 아이에게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기저귀를 뗏다가 자면서 실례를 했을 때 부모가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을 봐야 한다거나  

어린이집에서 실례를 했을 때 선생님이나 친구들 보기에 부끄러운 상황 등을 겪어야 할 터이니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육아 가이드들마다 배변훈련 부분을 보면 훈련 과정에서 아이에게 무리한 스트레스를 주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아직 기저귀를 떼기에는 다소 두려운 아이들을 위해 기저귀를 떼고 팬티를 입는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며 

자신이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주는 매우 훌륭한 그림책이다. 


일단 책이 보기에도 너무 예쁘다.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아이가 뜯어보고는 '내꺼?' '책?' 하면서 좋아한다. 

당장에 달려와서 읽어달라는 아이. 

부모된 입장에서 잘 자는 것, 밥 잘 먹는 것과 더불어 가장 예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책 크기도 아이 혼자 들고 읽기에 적당하고 그림도 너무 귀엽다. 




배변 훈련을 위해 산 아이 변기 위에서 책을 읽어본다. 

 


책이 도착한 날 아이 팬티를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총 7장 구매했다. 

갈아 입힐 때마다 '너도 이제 언니가 되었으니 기저귀 대신 이거 입는거야' 하면서 이 책과 함께 해야겠다.

유아용 그림책이지만 책을 보고 나니 나 스스로도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배변훈련을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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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어떻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나 - 석기 시대부터 부동산 버블까지, 신경인류학이 말하는 우리의 집
존 S. 앨런 지음, 이계순 옮김 / 반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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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고대 그리스인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네 자리를 알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네 집을 알라.'로 변경하려 한다. 
어쨌든 집은 사람들 각각에게 독특한 무엇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 자아와 공간이 결합하는 곳이다. (pg 297)



'집'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올테지만 나같은 집돌이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나에게 '휴가 내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으면 난 대체로 '그냥 집에 있고싶은데'라고 대답하는 편이다. 

여기서의 '집'이란 단순한 주거용 건축물(house)로서의 의미를 넘어, 내가 '집'이라고 느끼는, 매우 사적이면서도 나와 배우자, 

자식만으로 구성된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home)으로서의 의미가 강할 것이다.


이사를 해 본 경험이 있다면, 새로 이사간 집이 왠지 모르게 '우리집' 같은 느낌이 잘 안드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살다보면 금새 이 집이 '우리집'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집에 새로운 가족이 생겼을 때도 그렇다. 

나도 혼자 살다가 결혼을 했을 때, 부부만 같이 살다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잠깐이지만 집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곧 이게 '우리집'이라는 느낌이 생겨났다. 

이처럼 '집'이라는 느낌은 단순히 가옥 구조나 가족 구성원 등 어느 하나의 조건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집'의 느낌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이며 집이 인류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해졌다.


책을 받아들고 제목과 목차를 보니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미드 빅뱅이론의 한 장면을 캡쳐한 사진이 떠올랐다. 


 


위 사진은 우스개 소리지만, 이 책은 쉘든의 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고 학술적인 태도로 풀어가는 책이다. 

'학술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만큼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었다. 
문장 자체가 어렵기도 할 뿐더러 번역이 워낙에 번역체여서 그런지 한번에 이해가 잘 안된다. 
이것이 번역의 문제인지, 원문 자체가 어렵게 쓰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진도가 잘 나가는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게 된 힘은 역시나 '집'이라고 하는 것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인류는 누구나 집에서 살지만, 그 집의 형태는 문화권마다 다 다르다. 
또한 '우리집'이라는 느낌도 물리적인 공간에 국한된 느낌이 아니다. 
같이 사는 구성원, 구성원과의 관계, 그 속에서의 경험들이 축적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우리가 '집'이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아래 문장들도 한번에 이해되진 않는다;;)

주택은 즉석에서 집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배웠던 집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다른 장소와 상황에서 살더라도 집에 있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중략-
우리가 새로운 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걸 언제 알 수 있을까?
그건 몸의 항상성, 신체적, 정신적 피로에서 회복될 거라는 기대, 그리고 사회적 동시성과 연관된 느낌들의 총합이 우리의 거주지를
이 세상에서 다른 누구보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속한 장소로 느끼게 해 줄때다. (pg 78)

또한 '집'이라는 것은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잘 아는 동물들을 잘 생각해보면 집(둥지, 서식지, 거처 등 뭐라고 불리든)을 짓고 사는 동물들은 적지 않다. 
개미, 벌 등 곤충들도 집을 짓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집들이 인류가 생각하는 '집'과 동일한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개미나 벌 등은 아무리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종이라면 같은 종류의 집을 짓고 이는 본능적인 행동에 가깝다.
하지만 인류의 집은 생존 환경이나 가족의 구성, 사회적 계층, 민족과 역사 등에 따라 
모습과 개념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이는 문화적, 사회적인 행동에 가깝다. 

잘 생각해보면 유전학적으로 우리와 가깝다고 느끼는 원숭이과 동물들은 집단을 이루며 살지언정 집을 짓지는 않는다.
저자는 인류가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우리의 뇌가 발달해 온 과정과 관계가 깊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인류와 유전적으로 가까운 원숭이과 동물들은 새끼를 한번에 하나씩 낳는데, 
뇌가 발달한 만큼 그 종의 새끼는 미성숙하게 태어난다. 
새끼가 미성숙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새끼의 뇌가 성장할 때까지 많은 시간과 영양(에너지)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인 원숭이 새끼들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털에 매달려 다니는데 반해 
사람의 아기는 태어나면 스스로 잠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을 보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된 고대인류가 새끼를 성체로 키우기 위한 에너지를 얻으려고 불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이 불을 중심으로 집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집이 만들어지면서 한 거처에 장시간 머물게 되었고, 불을 중심으로 구성원이 모일 수 있는 장소도 생겨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식의 세대간 전수도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불을 이용해 천적과 추위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집은 인류 진화의 증거임과 동시에 인류의 진화를 촉진하는 한 요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전략- 우리는 집의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이렇게 매우 인간적인 시설을 형성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 사실상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러한 요소들이 완전히 현대적인 인간이나 거의 인간에 가까운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진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는초기 호미닌과 대형 유인원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형태의 생명체로부터의 중요하고 혁명적인 출발이었다.
집은 이러한 혁명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pg 159)

이 책은 이렇게 '집'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부터 시작해 현대사회의 인류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까지 
실로 방대한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담고 있다. 
사실 결혼, 출산율 저하의 가장 큰 원인으로 '높은 집값'이 항상 1순위로 거론되는 만큼, 
집은 단순한 '의식주' 중 하나인 생존수단의 개념은 아니다. 
저자는 집의 진화를 이야기하면서 비교적 현대에 등장한 '내 집 마련'의 신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겠지만, '집'을 사는 것(즉 소유하는 것)이 때로는 인생의 최대 목표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주택'이라는 단어를 '집'이라는 단어와 다른 의미로 사용하면서, 
'거처를 소유하는 것'과 '집을 갖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명의로 된 주택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집의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노숙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음성 언어를 말하거나 두 다리로 걷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집을 느끼는 능력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발달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인지적인 부분들이 모여 이것이 가능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집은 다양한 정서와 능력을 포함하고 있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들이 모두 잘 조화되고 있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세계인권선언이 주거를 하나의 권리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은 
주거가 단순히 피난처와 보호의 문제를 넘어선 그 이상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말이다. 
주택과 집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완전히 존재하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중략-
집이 더 이상 바깥세상의 스트레스 요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닐 때, 
또는 집의 조용한 즐거움으로부터 심리적 보상을 얻지 못할 때, 
또는 현실 세계의 맥락에서 집의 존재 자체가 더 이상 분명하지 않을 때, 
집은 인지적인 의미에서 발견하기 더 힘든 공간이 된다. (pg 290)

즉, '주택의 소유' 보다 우리가 중시해야 하는 것은 '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 DNA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 속 여러 요인들로 인해 '집의 느낌'을 잃고 '주택의 소유'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나 자신도 저자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인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네 자리를 알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네 집을 알라.'로 변경하려 한다. 
어쨌든 집은 사람들 각각에게 독특한 무엇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 자아와 공간이 결합하는 곳이다. (pg 297)

멋진 문구이다. 위 구절을 읽고 나니 왠지 이번 주말에는 집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책 자체는 두껍지도 않고 디자인도 훌륭해서 혹하기 쉽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나에게는 다소 어려웠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담긴 지식 자체가 어렵게 느껴졌다기 보다는 문장 자체가 현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딱딱하다고 해야 할까...
여튼 속도가 잘 나지 않는 문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내심 있게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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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세계 - 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변선희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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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그럼 너는? 너희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지?" -중략-

"내 경우는 그보다 평범해요.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당신 부모님들처럼. 안그런가요?" -중략-

"힘들었겠네." 내가 말했다. -중략-

소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감정이 몹시 북받쳤다.

"난 항상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는 걸 증오했어요. 그 단어는 계속해서 '어머니'와 '아버지'에요.

 그 지위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중략-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고아가 아니고 자녀들이에요." (pg 109)




최근에 영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볼만한 소설을 고르던 중 예쁜 표지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였는데 이력을 보니 오랜 시간 병마를 이기고 살아남아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작품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뭐...아픈 곳은 없지만 딱히 재밌게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요즘이라서 새로운 자극이 될까 싶어 읽기로 다짐했다.


책을 받아 드니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얇은 두께에 글씨가 제법 커서 부담이 없었다. 

스토리라인도 매우 심플하고 문체도 간결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스토리는 정말 간단하다.

이제 곧 18세가 되는 주인공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사회복지사 옆에서 죽고 싶지 않아서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그랜드 호텔이라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도착한 한 섬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는(소설의 내용상 '남은 삶을 불태우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한 무리를 보게 된다. 

그 무리의 리더격인 소년이 주인공에게 너는 너만의 무리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황당해 하는 주인공이 섬 안에 있는 몇몇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남은 삶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스토리라인이 간결하니 소감도 간결해야 할텐데 그것이 쉽지 않다.


먼저 나한테는 이 소설이 약간 어렵게 느꼈다는 점을 밝혀야겠다. 

서사가 어렵거나 문장이 어렵게 쓰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어렵게 느껴진다. 

때문에 읽고 나서 서평을 남기게 되기까지의 시간도 길어지게 되었는데, 오래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이렇다.


가장 큰 이유라면 나는 주인공처럼 자의든, 타의든 내 삶이 곧 끝나리라고 생각해 본 경험이 없다. 

(오히려 난 남은 수명이 너무 길면 그땐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하는 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만약 내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면 굳이 무언가의 목적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한 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할테고, 

만약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미 없거나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면 그저 혼자 어디 은둔해 있다가 조용히 죽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솔직히 나는 주인공의 심경 변화가 그렇게까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몇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어가는 사람의 노래를 듣고, 같이 춤을 추고...

이런 일들을 통해 잊었던 삶의 목적을 찾는다는 것이 약간은 진부하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삶과 죽음을 대하는 진지한 사색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점은 좋았다. 

특히 죽어가는 무리를 이끌던 리더인 소년이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이 소년은 마치 신이 소년의 모습을 하고 등장하는 판타지 영화를 보듯 삶과 죽음에 대해 상당히 완성된 철학을 전해준다. 


"그럼 너는? 너희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지?" -중략-

"내 경우는 그보다 평범해요.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당신 부모님들처럼. 안그런가요?" -중략-

"힘들었겠네." 내가 말했다. -중략-

소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감정이 몹시 북받쳤다.

"난 항상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는 걸 증오했어요. 그 단어는 계속해서 '어머니'와 '아버지'에요.

 그 지위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중략-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고아가 아니고 자녀들이에요." (pg 109)


"한편으로는 그분들이 나를 살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뻤어요. 결국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해요.

 슬픈건 죽는 게 아니라 강렬하게 살지 못하는 거죠. 

 우리가 스물일곱에 죽고 일흔둘에 장사를 지낸다고 말한 사람이 아마 마크 트웨인일 거에요." (pg 110)


다만 몇 줄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대화가 '소년'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소년을 비롯해 주인공이 남은 며칠간 만나는 몇몇 인물들은 결국 나누어진 작가의 분신으로서,

작가가 가진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행복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행복한 매일이 존재할 뿐이야. 이를 위해 너의 혼돈을 사랑하는 게 중요해." (pg 124)


역시 사람은 글을 써보는 것이 중요한 모양이다.

사실 처음 정리할 때만 해도 난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진짜 독자들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답을 서두에 미리 넌지시 던져주기까지 했었다. 


자유, 그리고 의무를 지지 않는 것에 대한 이 이론을 설명할 때,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모두가 선택, 의무, 욕망에서 자유로워진다면...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들에게 단지 이렇게 답하라.

"우리가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하면...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문제는 우리가 뇌의 10퍼센트만 사용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속 감정들의 2퍼센트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g 26)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진짜 내일 죽는다고 할 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라는 것 아닐까.


우스개소리로 지인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고 하는 식의 명언이 싫다. 

 진짜 내일 죽는다면 통장 잔고를 다 털어서 흥청망청 하고 싶던 것들 다 하고 죽고 싶지 않나?"


그 자리에서는 꽤나 많은 공감을 얻었지만 생각해보면 통장 잔고를 털어서 하고 싶은 일이란게 

'진짜 나 자신을 사랑해서 꼭 그 때 하고 싶은 일'과 같을 것 같지는 않다. 

내일 죽게 생겼는데 맛있는 음식, 좋은 술, 매력적인 이성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 것들에서 초연해졌을 때, 그 때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읽을 때 그렇게 즐겁게 읽었다고 기억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계속 이 책을 읽은 것을 곱씹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가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쓴 노랑색, 붉은색 테마를 가진 책이 또 있다고 하고 

이 책이 그 여정의 마지막이라는 점을 작가의 후기에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약간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앞의 작품들을 읽고 나면 또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작품으로의 발을 내딛게 하리라는 점에서 또 한 명의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즐거움이 더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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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촛불 - 3.1혁명부터 촛불혁명까지
손석춘 지음 / 다섯수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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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무릇 직필은 어렵다. 

권력이나 자본이 가만두지 않는다. 

직필은 '사주'라고 불리는 언론자본과 고위간부들이 통제하며 때로는 이해당사자들이 덤벼들고 '몽매한 세론의 비난'까지 따른다. 

반면에 곡필은 쓰기 쉽다.

권력과 자본이 비호해준다. 권력이 제안하는 고위 관직이나 자본이 제공하는 고액 연봉 자리로 언제든지 옮겨갈 수 있다. 

그래서다. 송건호는 힘주어 썼다. "곡필은 하늘이 죽이고 직립은 사람이 죽인다." (pg 510)



'손석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학 시절이 생각난다.

'신문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게 되었다. 

이후에 '유령의 사랑'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의 문학 작품에도 발을 들였었다.

읽은지 오래 되기도 했고, 그때는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는 버릇을 들이기도 전이라 '마르크스 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기억이 전혀 나진 않지만 여하간 그의 비소설보다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들으니 다시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생겨났다.


100년 촛불.

단순한 제목이지만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제목이다.

왜 하필 지금 시점에서의 100년인가?

3.1혁명이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촛불인가?

지금 이 정부를 만든 힘이 촛불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약 700페이지 정도로 처음 받아보면 '어우, 두꺼운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3부로 나눠져 있어서 부제를 읽고 처음에는 대충 1부가 3.1운동(읽기 전엔 운동이라고 생각했으니), 

2부가 4.19혁명, 3부가 촛불혁명 이야기인가보다 정도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혁명적인 사건 그 자체 보다는 10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을 

치열하게 살았던 개개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1부는 의암 손병희 선생, 2부는 단재 신채호 선생, 3부는 청암 송건호 선생의 이야기가 핵심이다.

특이하게도 세대를 이어가며 위 세 인물의 주변에서 역사의 흐름을 함께하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의암의 곁에는 최바우가, 단재의 곁에는 최사인이, 청암의 곁에는 한민주라는 인물이 있다. 

최바우의 아들이 최사인이고 그의 외증손자가 한민주이다. 

역사적 팩트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 가상의 인물들이 걸출한 세 명의 위인을 곁에서 관찰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 


처음에는 이 인물들이 굳이 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100년의 역사를 한 책에 묶으려다보니 아무래도 의암, 단재, 청암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설명은 간략히 넘어가는 측면이 많은데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 속에 픽션을 넣어야 하니 가상의 인물들이 큰 업적을 세우는 역할로는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들을 집어넣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유추해보았다. 

작가는 그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걸출한 업적을 남겨 후대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겼던 위인들 말고도 

이들을 따르며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이 가상의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걸출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계층이나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살다보니 어떤 계기를 접하게 

되고 그 계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은 물론, 역사를 바꾸는 흐름에 동참하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처럼 허구의 인물이 실제의 인물 속에 섞여있다보니 읽으면서 검색할 일이 꽤 많다.

역사 전공이 아니라면 장담컨데 평소 독립운동가를 잘 안다고 자부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르는 인물이 꽤 많이 등장할 것이다.

그래서 이 인물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검색해보게 되는데, 실제 인물이라면 바로 사진이 뜨니 읽어가면서 생동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물론 실제의 인물이기 때문에 어떤 여성 독립운동가를 검색하면 '누구의 배우자'라고 뜨는 등 의도치않은 스포(?!)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허구의 인물들 역시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이 소설 3부에 등장하는 한민주나 2부에서 악질 친일경찰로 등장하는 박병도라는 인물은 작가의 다른 소설에 등장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작품들에서도 한민주는 기자로, 박병도는 친일 경찰로 등장한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손석춘 유니버스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소설은 모두 이렇게 역사에 허구를 가미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던데 모든 작품들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현상이라면 이를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 자체가 조금 두껍기도 하고 생소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해서 금새 읽을 수 있는 책은 분명 아니었다. 

또한 손석춘 책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 외에도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순 한국어가 많이 등장해서 휴대폰을 곁에 두지 않고서는 진도가 잘 안나가는 책이기도 하다. 

일례로 '부부'라는 말 대신 '가시버시'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평소에 잘 쓰이지 않는 말이므로 찾아서 알고 넘어가야 한다. 

이런 점들이 진입장벽이 될 수 있어서 누구에게나 흔쾌히 추천해 주고픈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 속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예를 들어 김상옥 선생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보면 보통은 아래와 같이 사실들만 무미건조하게 나열된다.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이자 독립운동가 검거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를 거행하였고, 수백 명의 일경과 홀로 대치한 상황 속에서 자결 순국을 택하였다.

(출처: 네이버캐스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062&cid=59011&categoryId=59011)


위에 등장하는 사건을 소설에서는 아래처럼 표현하고 있다. 

김상옥도 총을 여러 발 맞았다. 최선을 다해 싸워 총알이 하나 남았다. 
문득 어머니가 눈에 선했지만 결연히 마음을 다진 김상옥은 벽에 기댄 채 총을 머리에 대고 겹겹이 포위한 일경들이 
모두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방아쇠를 당겼다. 담벼락 아래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쓰러진 김상옥의 두 손은 권총을 꼭 쥐고 있었기에 멀리서 이를 발견한 일본 경찰은 행여 살아있을까 싶어 누구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일제 경찰은 야비했다. 끌고 온 김상옥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했다. 
휘청거리면서도 서둘러 다가간 어머니는 쓰러지듯 털썩 주저얹아 피투성이 아들의 몸을 품에 꼭 안고 오열했다. (pg 315)

장면들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 하면서 순간 울컥 하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요즘은 검색만 하면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바로 뜨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처럼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목숨을 바쳐 투쟁했던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의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주된 스토리는 위에서 소개한 3명의 위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최근 100년사를 정리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업적을 남긴 유관순, 
윤봉길, 전태일 등 수많은 위인들의 업적도 짧지만 강한 인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가혹하게 도륙한 친일 및 반민주, 군부독재 세력들의 악행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책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작가는 이렇게도 많은 인물들 가운데 의암 손병희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 청암 송건호 선생에 특히 주목했던 것일까?
내 나름대로 내린 답은 작가가 쓴 아래 문단들에 숨어 있다고 보았다. 

민중은 단순히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낼 주체가 아니다. 자유, 평등, 평화로운 사회를 구현해갈 주체이다. 

최사인은 소소와 단재 모두 정치적 주체성뿐 아니라 문화적 주체성을 중시했고 그 사상적 귀결점이 민중 직접혁명이라고 이해했으며,

조선혁명이 담당한 세계사적 과제는 자본주의의 상공인 계급 지배도 공산주의의 공산당 지배도 넘어선 새로운 혁명이라고 확신했다. 

(pg 384)


해방공간에서 청년 송건호는 정치의식이 없었다. 훗날 그때를 회고하며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언론의 본성에 성실한 언론인으로 살아오며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을 체화해왔고 

마침내 '참된 힘은 민중의 힘'이라는 깔끔한 결론에 이르렀다. (pg 590)

 
손석춘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특정한 업적을 남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민중이 스스로의 역사를 개척해나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주목했던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일제시대 이후 친일 잔재를 소탕하지 못한 것이나,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오랜 군부 독재 등 
분명 한국의 최근 100년사는 그리 아름다운 역사로 기억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민중'이 희망이며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손석춘의 시각에서는 충분히 아름다운 역사일 수 있었다. 

책을 덮은 지금 생각해 보면,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의미있는 책이었다고 기억될 것 같다. 충분히 재미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단재 신채호의 이야기부터 몰입감이 올라가서 끝부분부터는 거의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읽었다. 
특히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나에게는 스토리가 부여되며 이름을 외울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도 많아 다소 길지만 꼭 발췌해두고 싶어서 아래에 정리해 두었다. 


국호는 대한민국, 정체는 민주공화국으로 결정했다. 임시헌장 10개조를 발표했다. 

독립선언문에 이어 왕정 체제를 거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조선왕조의 끝자락에 위치한 허수아비 대한제국에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대한민국, 곧 민중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민족적 결의를 천명했다. 

바로 그래서 '3.1 운동'이 아니다. 3.1혁명이 적확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다. 

조선의 기나긴 역사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pg 197)


삶은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으로 어떤 부모, 어떤 자녀, 어떤 이성, 어떤 배우자, 어떤 스승을 만느느냐가 중요하다.

다만 그 만남엔 전제가 있다.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그것이다. 

사람과의 어떤 만남도 사회를 떠나 이루어질 수 없으며, 사회 또한 다른 사회와의 만남으로 역사를 형성한다. (pg 206)


우리 민중은 알았다. 깨달았다. 저들 야수들이 아무리 악을 쓴들, 아무리 요망을 피운들, 이미 모든 것을 부인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대계를 울리는 혁명의 북소리가 어찌 자연히 까닭 없이 멎을소냐.

벌써 구석구석 부분 부분이, 우리 민중과 저들 야수가 진형을 대치하여 표화를 개시하였다. 

옳다. 되었다. (pg 396)


소수가 다수에게 지는 것이 원칙이라 하면, 왜 최대 대수의 민중이 최소수인 야수적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고기를 찢기느냐? -중략-

저들의 군대 까닭일까? 경찰 까닭일까? 군함, 비행기, 대포, 장총, 장갑차, 독가스 등 흉칙한 무기 까닭일까?

아니다. 이는 그 결과요, 원인이 아니다. 저들은 역사적으로 발달 성장하여온 누천년이나 묵은 괴동물들이다. 

이 괴조물들이 맨 처음에 교활하게 자유, 평등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 민중을 속이어 지배자의 지위를 얻어 가지고, 

그 약탈 행위를 조직적으로 대낮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의 소득을 분배하려는 곧 '인육을 분장하는 곳'인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지위를 누리려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제재하는 소위 법률, 형법 등 부어터진 조문을 제정하며, 

민중의 노예적 복종을 시키려는 소위 명분, 윤리 등 상어같은 도덕률을 조작하였다. (pg 395)


자연스레 건호의 마음에 저항감이 싹텄다. 그때부터 건호는 일본말 쓰기를 꺼렸다. 

자신이 다니는 학급에서 민족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친구들을 꼽아보니 많이 잡아도 예닐곱 정도였는데, 

적극적인 친일 학우도 일고여덞 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침묵을 지켰다. 

송건호의 회고는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반민족행위자와 독립운동 사이에 대다수는 침묵하며 살았다.

송건호는 그 시절을 버티고 살아가며 침묵하는 사람들은 잘 순종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pg 474)


심훈은 일찍이 박헌영과 주세죽의 사랑을 담아 <동방의 애인>을 썼다. 

두 주인공은 소설 창작 시점에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더구나 그들이 각각 죽음을 맞은 도시는 평양과 모스크바로 두 사람이 평생을 공헌한 공산당이 통치하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주세죽은 유배 내내 언젠가 역사가 평가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단야에 이어 박헌영마저 '미제의 간첩'으로 살해당하는 현실은 너무 잔혹했다. 

작가 심훈이 그 참극을 목격하지 않고 요절한 사실을 다행이라 위안 삼아야 할까. 

아니면 실제 삶이야말로 언제나 소설보다 더 소설답다며 소설을 써야 할까. (pg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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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 죽어야 고치는 습관, 살아서 바꾸자!
사사키 후미오 지음, 드로잉메리 그림, 정지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상깊은 구절

나쁜 습관을 버릴 때는 완전히 끊는 편이 좋다.

또한 새로운 습관을 들일 때는 반대로 매일 하는 편이 사실 더 쉽다. -중략-

매일 하기로 정하면 오늘 그것을 할지 말지 고민할 일도, 결단할 일도 없다. (pg 155-156)



사실 나는 서점에 '자기개발'로 분류되어 있는 책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서점에 가면 그쪽 코너에 있는 책은 들춰보지도 않는다.

맨날 하나마나 한 소리들, 보고 나면 괜히 잘 못살았다는 자책감만 주고 삶에 별 도움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 책을 쓴 저자들이 그리 내세울만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엄청 대단한 척하며 쓴 문체부터가 짜증을 불러온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사사키 후미오'라는 저자는 굉장히 특별하다. 

적어도 나에게 행동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특징은 스스로가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룩한 사람이라 말하는 대신, 자신이 '해보니까 이런 이런 것들이 좋던데?' 정도로

사람을 꼬득이는(?) 맛에 있다. 

막상 하기엔 어려운 일이지만 그 과정을 잘게 나눠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저 정도면 한번 해봄직 하겠다'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전작인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를 본 후 미니멀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집에 있는 많은 짐을 치울 수 있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리뷰: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0858557385)

이전작은 우연한 기회에 공짜로 책을 얻게 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읽었었다면 이번 책은 작가의 이름을 본 순간 결재했다. 

이 작가라면 적어도 내 습관 하나 정도는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는 '습관'을 들이는 방법을 아주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습관이 뭐? 그냥 하면 되는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그 말이 맞다.

습관을 들이는 데에 무슨 왕도가 있겠나. 닥치고 하면 되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좋지 않은 습관을 버리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려운 일인 것도 맞을 것이다. 


작가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아래의 프로세스를 따른다고 한다.


 

(pg 69)


당연히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상'일 것이다. 

보상이 없거나 적다고 생각하면 행동을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보상이 습관 자체를 역행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을 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데 그 보상이 '치맥'이면 습관이 유명무실해지는 것과 같다. 

무언가 다른 보상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예컨데 목표로 한 몸무게를 달성하면 사고 싶었던 옷을 하나씩 산다거나, 갖고 싶었던 가방을 산다거나 하면 습관과는 무관한

보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럼 습관이 될 때까지 돈을 엄청 써야겠구만'

작가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습관이라면, 

그 습관 자체가 완성되어갈 쯤에는 그 습관 자체가 보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운동'이라는 습관이 완성되어 갈 때쯤에는 운동하러 가는 그 자체가 삶의 보상이 된다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김종국 같은 연예인들의 삶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래서 타인에게는 자신이 받는 보상과 다른 보상이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pg 83)


사실 이 책을 살 때 한참 나도 버리고 싶은 습관이 있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바로 '혼술을 끊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습관에 대해 '어떻게 해도 멈출 수 없다.'며 여러 가지 변명을 한다.

그 습관이 주는 이점은 얼마든지 과장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내 아이의 습관이 되어도 좋은지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pg 92)


위 구절을 보고 공감이 많이 되었다.
사실 내가 혼술을 끊겠다고 마음 먹게 된 까닭도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려서 모르고 지나갈 수 있지만 조금 크면 아빠가 저녁에 혼자 술마신다는 것을 알게 될텐데, 
그럼 아이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그리고 아이가 내 전철을 밟게 되진 않을지 두려웠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원치 않는 술자리가 생기는 것은 도저히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혼자 마시는 술을 끊는 것'이었다. 

벌써 한 4개월 정도 되어 가는데 지금까지는 잘 지켜나가고 있다. 

이전에는 일주일에 3-4일은 술을 마셨는데 지금은 한달에 4번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종종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예외를 많이 만드는 것은 음주가 즐겁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계속 그렇게 인식한다면 금주는 불가능하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날은 인내해야 한다.

인내는 보상이 없다. 사람은 보상이 없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 -중략-

'술을 마시면 안 된다.'가 아니라 '이제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자. (pg 103)


그래서 지금은 최대한 술 자리를 미리 계획하려고 한다.

약속은 적어도 일주일 전에 잡고 한 주에 최대 1회를 넘기지 않으며, 급하게 생기는 약속들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다. 

이제 술약속 자체를 그만 잡으려고도 생각하고 있다. 


나쁜 습관을 버릴 때는 완전히 끊는 편이 좋다.

또한 새로운 습관을 들일 때는 반대로 매일 하는 편이 사실 더 쉽다. -중략-

매일 하기로 정하면 오늘 그것을 할지 말지 고민할 일도, 결단할 일도 없다. (pg 155-156)


위의 말이 정말 공감이 가는 것이, 요즘은 정말 한 일주일씩 술을 안마셔도 마시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안든다.

하지만 어쩌다 부서 회식이라도 하는 날에는 꼭 다음날에도 마시고 싶어진다. 

이제 습관을 위한 책까지 읽었으니 정말 술을 끊을 일만 남은 것 같다. 

이전에 담배도 끊은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금연한지는 햇수로 6년이 넘었다.)


사실 책 한 권 봤다고 모든 습관이 변할 수는 없다.

습관이 모여 사람이 된다고 했던가.

사람이 변하는 일인데 그렇게 쉽게 될리 없다. 


책으로 무엇을 배우려는 것은 실천하기 전에 종종 빠지기 쉬운 함정의 위치를 미리 알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함정에 빠졌을 때의 고통은 빠져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 그통이 있으므로 다음에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 책은 함정의 위치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주의해도 몇 번이나 빠지고 마는 비열한 함정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싶을 뿐이다. (pg 255)


하지만 왠지 이 책을 보고 나면 뭔가 하나쯤은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자신감이 생긴다. 

예전에 금주를 권하는 책을 봤을 때는 '뭐 언젠가는 끊겠지' 했었는데 이 책을 본 후로는 '왠지 끊을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 느낌을 준다는 것이 이 저자가 지닌 강점이 아닐까 싶다.


책 자체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술술 읽히면서도 따라하기 쉽도록 단계가 상세하게 나눠져 있다.

후반부로 가면 다소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많아 읽어도 그만, 안읽어도 그만인 부분이 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정말 이 작가랑 나랑은 뭔가 삶의 고민이 비슷한 건지, 다음 책은 '금주'에 관한 책을 낸다고 한다.

부디 그 때에는 술을 완전히 끊어서 그 책은 사지 않아도 되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한 습관을 지키면 후회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하고자 했던 것을 실천하지 않아서 후회한 적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 일어난 후에 괜히 일찍 일어났다고 후회하거나, 운동한 후에 운동을 해서 손해가 막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pg 131)


먼저 괴로움을 느끼고 그 후에 즐거움을 느낀다 = 노력

먼저 즐거움을 느끼고 그 후에 괴로움을 느낀다  = 게으름 (pg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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