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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어떻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나 - 석기 시대부터 부동산 버블까지, 신경인류학이 말하는 우리의 집
존 S. 앨런 지음, 이계순 옮김 / 반비 / 2019년 4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고대 그리스인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네 자리를 알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네 집을 알라.'로 변경하려 한다.
어쨌든 집은 사람들 각각에게 독특한 무엇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 자아와 공간이 결합하는 곳이다. (pg 297)
'집'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올테지만 나같은 집돌이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나에게 '휴가 내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으면 난 대체로 '그냥 집에 있고싶은데'라고 대답하는 편이다.
여기서의 '집'이란 단순한 주거용 건축물(house)로서의 의미를 넘어, 내가 '집'이라고 느끼는, 매우 사적이면서도 나와 배우자,
자식만으로 구성된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home)으로서의 의미가 강할 것이다.
이사를 해 본 경험이 있다면, 새로 이사간 집이 왠지 모르게 '우리집' 같은 느낌이 잘 안드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살다보면 금새 이 집이 '우리집'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집에 새로운 가족이 생겼을 때도 그렇다.
나도 혼자 살다가 결혼을 했을 때, 부부만 같이 살다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잠깐이지만 집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곧 이게 '우리집'이라는 느낌이 생겨났다.
이처럼 '집'이라는 느낌은 단순히 가옥 구조나 가족 구성원 등 어느 하나의 조건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집'의 느낌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이며 집이 인류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해졌다.
책을 받아들고 제목과 목차를 보니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미드 빅뱅이론의 한 장면을 캡쳐한 사진이 떠올랐다.
위 사진은 우스개 소리지만, 이 책은 쉘든의 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고 학술적인 태도로 풀어가는 책이다.
'학술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만큼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었다.
문장 자체가 어렵기도 할 뿐더러 번역이 워낙에 번역체여서 그런지 한번에 이해가 잘 안된다.
이것이 번역의 문제인지, 원문 자체가 어렵게 쓰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진도가 잘 나가는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게 된 힘은 역시나 '집'이라고 하는 것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인류는 누구나 집에서 살지만, 그 집의 형태는 문화권마다 다 다르다.
또한 '우리집'이라는 느낌도 물리적인 공간에 국한된 느낌이 아니다.
같이 사는 구성원, 구성원과의 관계, 그 속에서의 경험들이 축적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우리가 '집'이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아래 문장들도 한번에 이해되진 않는다;;)
주택은 즉석에서 집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배웠던 집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다른 장소와 상황에서 살더라도 집에 있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중략-
우리가 새로운 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걸 언제 알 수 있을까?
그건 몸의 항상성, 신체적, 정신적 피로에서 회복될 거라는 기대, 그리고 사회적 동시성과 연관된 느낌들의 총합이 우리의 거주지를
이 세상에서 다른 누구보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속한 장소로 느끼게 해 줄때다. (pg 78)
또한 '집'이라는 것은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잘 아는 동물들을 잘 생각해보면 집(둥지, 서식지, 거처 등 뭐라고 불리든)을 짓고 사는 동물들은 적지 않다.
개미, 벌 등 곤충들도 집을 짓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집들이 인류가 생각하는 '집'과 동일한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개미나 벌 등은 아무리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종이라면 같은 종류의 집을 짓고 이는 본능적인 행동에 가깝다.
하지만 인류의 집은 생존 환경이나 가족의 구성, 사회적 계층, 민족과 역사 등에 따라
모습과 개념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이는 문화적, 사회적인 행동에 가깝다.
잘 생각해보면 유전학적으로 우리와 가깝다고 느끼는 원숭이과 동물들은 집단을 이루며 살지언정 집을 짓지는 않는다.
저자는 인류가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우리의 뇌가 발달해 온 과정과 관계가 깊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인류와 유전적으로 가까운 원숭이과 동물들은 새끼를 한번에 하나씩 낳는데,
뇌가 발달한 만큼 그 종의 새끼는 미성숙하게 태어난다.
새끼가 미성숙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새끼의 뇌가 성장할 때까지 많은 시간과 영양(에너지)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인 원숭이 새끼들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털에 매달려 다니는데 반해
사람의 아기는 태어나면 스스로 잠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을 보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된 고대인류가 새끼를 성체로 키우기 위한 에너지를 얻으려고 불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이 불을 중심으로 집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집이 만들어지면서 한 거처에 장시간 머물게 되었고, 불을 중심으로 구성원이 모일 수 있는 장소도 생겨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식의 세대간 전수도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불을 이용해 천적과 추위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집은 인류 진화의 증거임과 동시에 인류의 진화를 촉진하는 한 요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전략- 우리는 집의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이렇게 매우 인간적인 시설을 형성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 사실상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러한 요소들이 완전히 현대적인 인간이나 거의 인간에 가까운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진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는초기 호미닌과 대형 유인원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형태의 생명체로부터의 중요하고 혁명적인 출발이었다.
집은 이러한 혁명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pg 159)
이 책은 이렇게 '집'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부터 시작해 현대사회의 인류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까지
실로 방대한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담고 있다.
사실 결혼, 출산율 저하의 가장 큰 원인으로 '높은 집값'이 항상 1순위로 거론되는 만큼,
집은 단순한 '의식주' 중 하나인 생존수단의 개념은 아니다.
저자는 집의 진화를 이야기하면서 비교적 현대에 등장한 '내 집 마련'의 신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겠지만, '집'을 사는 것(즉 소유하는 것)이 때로는 인생의 최대 목표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주택'이라는 단어를 '집'이라는 단어와 다른 의미로 사용하면서,
'거처를 소유하는 것'과 '집을 갖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명의로 된 주택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집의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노숙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음성 언어를 말하거나 두 다리로 걷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집을 느끼는 능력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발달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인지적인 부분들이 모여 이것이 가능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집은 다양한 정서와 능력을 포함하고 있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들이 모두 잘 조화되고 있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세계인권선언이 주거를 하나의 권리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은
주거가 단순히 피난처와 보호의 문제를 넘어선 그 이상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말이다.
주택과 집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완전히 존재하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중략-
집이 더 이상 바깥세상의 스트레스 요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닐 때,
또는 집의 조용한 즐거움으로부터 심리적 보상을 얻지 못할 때,
또는 현실 세계의 맥락에서 집의 존재 자체가 더 이상 분명하지 않을 때,
집은 인지적인 의미에서 발견하기 더 힘든 공간이 된다. (pg 290)
즉, '주택의 소유' 보다 우리가 중시해야 하는 것은 '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 DNA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 속 여러 요인들로 인해 '집의 느낌'을 잃고 '주택의 소유'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나 자신도 저자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인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네 자리를 알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네 집을 알라.'로 변경하려 한다.
어쨌든 집은 사람들 각각에게 독특한 무엇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 자아와 공간이 결합하는 곳이다. (pg 297)
멋진 문구이다. 위 구절을 읽고 나니 왠지 이번 주말에는 집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책 자체는 두껍지도 않고 디자인도 훌륭해서 혹하기 쉽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나에게는 다소 어려웠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담긴 지식 자체가 어렵게 느껴졌다기 보다는 문장 자체가 현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딱딱하다고 해야 할까...
여튼 속도가 잘 나지 않는 문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내심 있게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