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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세계 - 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변선희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3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그럼 너는? 너희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지?" -중략-
"내 경우는 그보다 평범해요.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당신 부모님들처럼. 안그런가요?" -중략-
"힘들었겠네." 내가 말했다. -중략-
소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감정이 몹시 북받쳤다.
"난 항상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는 걸 증오했어요. 그 단어는 계속해서 '어머니'와 '아버지'에요.
그 지위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중략-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고아가 아니고 자녀들이에요." (pg 109)
최근에 영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볼만한 소설을 고르던 중 예쁜 표지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였는데 이력을 보니 오랜 시간 병마를 이기고 살아남아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작품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뭐...아픈 곳은 없지만 딱히 재밌게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요즘이라서 새로운 자극이 될까 싶어 읽기로 다짐했다.
책을 받아 드니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얇은 두께에 글씨가 제법 커서 부담이 없었다.
스토리라인도 매우 심플하고 문체도 간결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스토리는 정말 간단하다.
이제 곧 18세가 되는 주인공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사회복지사 옆에서 죽고 싶지 않아서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그랜드 호텔이라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도착한 한 섬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는(소설의 내용상 '남은 삶을 불태우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한 무리를 보게 된다.
그 무리의 리더격인 소년이 주인공에게 너는 너만의 무리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황당해 하는 주인공이 섬 안에 있는 몇몇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남은 삶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스토리라인이 간결하니 소감도 간결해야 할텐데 그것이 쉽지 않다.
먼저 나한테는 이 소설이 약간 어렵게 느꼈다는 점을 밝혀야겠다.
서사가 어렵거나 문장이 어렵게 쓰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어렵게 느껴진다.
때문에 읽고 나서 서평을 남기게 되기까지의 시간도 길어지게 되었는데, 오래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이렇다.
가장 큰 이유라면 나는 주인공처럼 자의든, 타의든 내 삶이 곧 끝나리라고 생각해 본 경험이 없다.
(오히려 난 남은 수명이 너무 길면 그땐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하는 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만약 내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면 굳이 무언가의 목적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한 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할테고,
만약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미 없거나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면 그저 혼자 어디 은둔해 있다가 조용히 죽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솔직히 나는 주인공의 심경 변화가 그렇게까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몇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어가는 사람의 노래를 듣고, 같이 춤을 추고...
이런 일들을 통해 잊었던 삶의 목적을 찾는다는 것이 약간은 진부하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삶과 죽음을 대하는 진지한 사색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점은 좋았다.
특히 죽어가는 무리를 이끌던 리더인 소년이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이 소년은 마치 신이 소년의 모습을 하고 등장하는 판타지 영화를 보듯 삶과 죽음에 대해 상당히 완성된 철학을 전해준다.
"그럼 너는? 너희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지?" -중략-
"내 경우는 그보다 평범해요.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당신 부모님들처럼. 안그런가요?" -중략-
"힘들었겠네." 내가 말했다. -중략-
소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감정이 몹시 북받쳤다.
"난 항상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는 걸 증오했어요. 그 단어는 계속해서 '어머니'와 '아버지'에요.
그 지위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중략-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고아가 아니고 자녀들이에요." (pg 109)
"한편으로는 그분들이 나를 살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뻤어요. 결국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해요.
슬픈건 죽는 게 아니라 강렬하게 살지 못하는 거죠.
우리가 스물일곱에 죽고 일흔둘에 장사를 지낸다고 말한 사람이 아마 마크 트웨인일 거에요." (pg 110)
다만 몇 줄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대화가 '소년'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소년을 비롯해 주인공이 남은 며칠간 만나는 몇몇 인물들은 결국 나누어진 작가의 분신으로서,
작가가 가진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행복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행복한 매일이 존재할 뿐이야. 이를 위해 너의 혼돈을 사랑하는 게 중요해." (pg 124)
역시 사람은 글을 써보는 것이 중요한 모양이다.
사실 처음 정리할 때만 해도 난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진짜 독자들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답을 서두에 미리 넌지시 던져주기까지 했었다.
자유, 그리고 의무를 지지 않는 것에 대한 이 이론을 설명할 때,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모두가 선택, 의무, 욕망에서 자유로워진다면...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들에게 단지 이렇게 답하라.
"우리가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하면...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문제는 우리가 뇌의 10퍼센트만 사용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속 감정들의 2퍼센트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g 26)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진짜 내일 죽는다고 할 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라는 것 아닐까.
우스개소리로 지인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고 하는 식의 명언이 싫다.
진짜 내일 죽는다면 통장 잔고를 다 털어서 흥청망청 하고 싶던 것들 다 하고 죽고 싶지 않나?"
그 자리에서는 꽤나 많은 공감을 얻었지만 생각해보면 통장 잔고를 털어서 하고 싶은 일이란게
'진짜 나 자신을 사랑해서 꼭 그 때 하고 싶은 일'과 같을 것 같지는 않다.
내일 죽게 생겼는데 맛있는 음식, 좋은 술, 매력적인 이성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 것들에서 초연해졌을 때, 그 때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읽을 때 그렇게 즐겁게 읽었다고 기억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계속 이 책을 읽은 것을 곱씹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가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쓴 노랑색, 붉은색 테마를 가진 책이 또 있다고 하고
이 책이 그 여정의 마지막이라는 점을 작가의 후기에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약간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앞의 작품들을 읽고 나면 또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작품으로의 발을 내딛게 하리라는 점에서 또 한 명의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즐거움이 더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