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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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읽을 것이 떨어진 느낌이 들 때 생각 없이 집어 들게 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작품.

그래도 이번 책은 다른 작품들과 느낌이 매우 달라서 새로운 느낌으로 재미나게 읽었다.


이 책만의 특징이라 한다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제4의 벽을 마음대로 넘나든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영화 속 '데드풀'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자신들이 소설 속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독자들에게도 끊임없이 말을 건다.

단순히 말만 거는 것이 아니라 시비도 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번 소설은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다.

그러므로 독자가 아무리 메모를 해 가며 꼼꼼히 읽는다 한들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소설에 나오는 힌트만으로는 결코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것이 이번 소설의 구조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논리적으로 범인을 찾아내려는 독자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대부분 직감과 경험으로 범인을 간파해 낸다.

(pg 57)


게다가 소설의 주인공이 '명탐정'이 아니고 '명탐적 옆에서 뻘짓을 하는 경찰'이다.

자신이 정확히 범인을 알아내면 명탐정과 역할이 겹치기 때문에 자신은 헛다리를 짚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경찰이 주인공인 것이다.


짧은 단편들이 묶여 있는 형태인데, 일단 주인공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그 주변에 항상 우연하게도

명탐정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때에도 '어이쿠, 하필 내가 여기 있었네!'라는 느낌으로 등장한다.)

어릴 적 인기였던 코난이나 김전일 같은 만화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이상하게 주인공이 어딜 가기만 하면 주변에서

항상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정면으로 비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흔한 클리셰들을 소개한 뒤 그 클리셰가 얼마나 뻔하고 지루한지를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사건을 해결한다.

밀실 살인, 사라진 흉기, 변장한 범인, 고립된 무대 등 추리소설에서 한 번쯤은 봤을법한 트릭들이 모두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건의 해결 방식 또한 황당하기 그지없고, '설마.. 또 밀실 살인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와 비슷한 대사들이

연이어 등장하니 읽다 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지점이 꽤나 많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접근법으로 책을 썼을까?

책의 후반부에 다른 작가가 쓴 해설에서 그 해답을 엿볼 수 있었다.

일본의 전형적이고 수준 낮은 추리물들에 대한 비판에 더해 작가 자신 역시 그런 추리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다는

자기검열이 합쳐진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라는 것이었다.


작가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다작을 한 작가라 아직도 못 본 작품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라 불리는 작품들은 '용의자 X의 헌신'을 제외하면 아직 접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런 자기검열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작가가 쓴 다른 추리소설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당장에 이 작품 역시 '명탐정의 저주'라는 후속편이 존재해서 읽을 것이 계속 생겨나는 느낌이다.


읽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작품들을 주로 써서 그런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은 일단 집어 들 때 마음이

편하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재미가 보장되니 계속해서 읽게 되는 것 같다.

작가의 지치지 않는 창작 열정이 어디까지 갈지 개인적으로도 궁금해지는 작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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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장마르크 로셰트 지음, 조민영 옮김 / 리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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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국열차'의 원작자가 그린 작품이라고 해서 일단 기대가 됐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져 독창적이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은 스토리를 구현해 내는 작가여서 이번에는 '늑대'라는

동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펼쳐냈는지 궁금했다.

책을 받아든 첫 느낌은 '가볍다'였다.

전체 페이지가 120페이지 미만으로 아주 얇은 편인데, 작품이 만화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짧은 분량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그래픽 노블이라기엔 글의 분량이 매우 적다. 그냥 만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실제로 후반부에 실린 해석까지 읽더라도 2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었다.

짧지만 강렬한 그림들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충분히 독자들에게 전해진다는 느낌이었고

다 읽고 난 후 스스로 생각해 볼 것들을 던져주기도 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국립공원 내 제한된 영역에서 방목으로 양을 키우는 노인 가스파르는 늑대로 인한 피해에 지쳐 암컷 늑대

한 마리를 쏴 죽인다.

이때 죽은 늑대의 새끼가 살아남아 가스파르와 대립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 후반부에 한 프랑스 교수의 작품 해설이 실려있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자원을 내어주는 존재라는 일반적인 서양의 자연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것이 해석 내용의 주된 내용이다.

해설에 따라 이해하든 각자 자신의 시각에서 이해하든 본 작품은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일단 나처럼 인간과 자연은 일방적인 관계일 수 없고 본래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은 저항할 수 없는 대자연이라는 것에 무의미하게 저항하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작품 속 늑대 역시 마찬가지지만 눈보라나 산사태 등의 자연 현상은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 현상에 앙심을 품고 복수심을 불태워본들 자연은 화를 내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작품 그 자체로만 감상한다면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양치기와 늑대라는 두 존재의 날카로운 대립과 처절한

복수극, 그리고 생존이라는 대전제 하에서의 극적인 화해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양 떼'는 두 존재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매우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대립은 그만큼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포효하는 대자연 앞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빚을 지게 된다.

늑대는 결코 인간을 위해 길들지 않았지만 인간이 허락하는 이상을 욕심내지 않게 되었고, 인간 역시 늑대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을 버리고 늑대의 영역을 지켜주며 자신의 자원을 기꺼이 나누었다.

저자가 의도한 작품의 핵심 주제는 아니겠지만 '복수'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작품 속 늑대가 가스파르에게 한 행위가 진짜 '복수'의 목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진짜 계획적으로 가스파르를 '엿 먹이기 위해' 행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저 본능에 따른 우발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가스파르에게 피해를 입힐 의도였다고 한다면 다른 늑대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굳이 저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 마리보다는 여러 마리일 때 더 효과적으로(?) 엿을 먹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뇌가 발달한 동물일수록 복수라는 행위를 실제로 할 수 있다고 하니 작품 속 늑대의 복수 역시 의도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는 인간이 아니기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동물이 본능에 충실한

것을 탓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스파르는 명백한 '복수'의 의미로 늑대를 추적한다.

그 결과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데,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자신이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

중간에 몇 번이고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그 늑대의 숨통을 끊지 않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복수심'이라는 것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감정이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이 불타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파멸시키고 싶은 마음.

전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이 제3자의 시각에서는 얼마나 덧없어 보일 수 있는지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짧은 작품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 자체가 가벼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이 온라인 서점에서 '청소년'도 아닌 '어린이'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다소 당황스러운 느낌이다.

물론 만화이고 글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아이들이 봐도 무방은 하겠으나, 아이들이 읽고 '음..역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지' 이상의 행간의 의미를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어린이를 너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작품을 너무 오버해서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길이는 짧지만 그림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책의 사이즈가 큰 편이기 때문에 편안한 장소에서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천천히 읽어본다면 생각보다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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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퍼맨 - 속삭이는 살인자
알렉스 노스 지음, 김지선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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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흔히 정적인 느낌을 주는 행위로 인식된다.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손에 땀을 쥘 정도'라거나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책을 읽으면서 숨이 막힌다는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경험할 수 있게 해 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재미나게 읽었기 때문에 최대한 스포일러에 주의하며 소개하려 하겠으나, 의도치 않은

스포가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위스퍼맨'이라는 연쇄 아동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다.

범인은 어린 소년만을 골라 살해했는데, 위스퍼맨은 살해 전 피해 아동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던

것에서 착안된 별명이다.

피트라는 베테랑 경찰이 범인을 검거했지만, 마지막 피해자의 유해를 찾지 못해 20년간 습관처럼 피해자의 시신을

찾아 헤맨다.

그러던 중 과거 위스퍼맨의 범행을 흉내 낸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젊은 경찰인 어멘다와 함께 해결하려 한다.

이 마을에 아내를 잃고 홀로 어린 아들 제이크를 키우는 톰이 이사 오면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일단 책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재미있다'였다.

500페이지가 넘어 살짝 두꺼운 느낌이 들지만 사건의 전개가 빠른 편이어서 금세 책장이 넘어갔다.

게다가 종반부로 갈수록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긴장감까지 전해져 나중에는 결말이 너무 궁금해 빨리 읽어 버리고

싶은 자아와 한 글자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는 자아가 충돌하는 개인적으로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서술상의 특징으로는 매우 끔찍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끔찍함의 묘사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피해 아동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시신은 어떤 모습인지, 범행 현장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등등

일체의 끔찍한 서술 없이 사건의 흐름과 인물들 간의 대화로만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런데도 읽다 보면 묘하게 무서운데, 고어함 없이도 무서운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읽으면서 가장 끔찍한 구절을 고르라면 아래의 문단을 고를 것 같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아래의 문구가 왜 끔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는지는 작품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안전하게 지켜줘야 할 아이. 사랑해줘야 할 아이.

왜냐하면 그게 모든 아이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거니까.

안 그런가? 부모에게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지는 것.

그 생각에 심장이 아파왔다.

(pg 419)

특히 사건 자체가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여서 그런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보자니 더 무서웠던 것 같다.

자신이 상해를 입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내 아이가 상해를 입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차원이 다른 것 같이 느껴진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 뉴스를 볼 때에도 우린 무서움을 느끼긴 하지만 만약 그 범죄가 어린

아이만을 대상으로 벌어졌다고 하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아주 매력적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다양한 남성상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다.

젊은 시절 알코올 중독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과거를 반성하며 금욕적인 삶을 이어가는 경찰,

급작스럽게 싱글대디가 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지만 그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하는 젊은 아버지,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 악당과 그를 추종하는 추종자까지

정말 영화화하면 좋을 캐릭터들이 전체적인 작품을 이끌어간다.

이미 해외에서는 이런 점이 충분히 알려졌는지 어벤져스 인피니티워로 유명한 루소 형제가 이 작품을 영화화할

계획이라 한다.

아직 캐스팅 정보 등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피트 역할에는 키스 데이비드라는 배우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논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고, 그냥 알코올 중독을 운동으로 이겨내며 범인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늙은 배테랑

경찰 역할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이번 작품의 경우 어멘다를 제외한 주요 인물들이 모두 남성이어서 최근 헐리웃의 PC 성향에 맞는 작품이

되긴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우려가 든다. (그래서 흑인 배우가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책 후반부에서 역자도 언급했듯이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장들이 매우 좋은 편인데,

영화로 만들면 이런 문장들을 느끼기가 어려우니 단순한 서사 위주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나비들에겐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게 살아 있는 존재들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고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도 그들은 계속 삶을 이어간다.

(pg 114)

여하간 개인적으로는 무척 재미나게 읽은 작품이니만큼 모쪼록 영화로도 잘 나와서 다시금 본 작품의 감동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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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브랜든 1~2 세트 - 전2권 사람 3부작
d몬 지음 / 푸른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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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몬 작가의 사람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브랜든이 드디어 책으로 발매되었다.

온라인에서야 진작에 완결이 났지만 뭔가 만화는 손으로 넘기는 맛이라고 생각하는 아재인지라 책으로 나와

내 손에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데이빗'에서는 인간의 형상이 인간을 정의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면,

'에리타'에서는 자신이 정의하는 자신의 정체성이 인간을 정의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에 관한 어떤 질문을 던져줄지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에리타처럼 스토리에 스포일러가 될만한 반전이 있는 편은 아니어서 조금은 자유로운 내용 소개가 가능할 것 같다.

브랜든에서는 각자가 모두 자신을 '사람'이라 여기는 3개의 종족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브랜든은 우리와 같은 인류로 흑인 남성이며 영어를 쓰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브랜든이 어느 날 다른 세계로 가는 포털을 발견하게 되어 빨려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올미어'라는 존재를

난다.

올미어는 검은색 구형으로 된 머리에 가느다란 금속막대로 이루어진 몸체를 지녀 마치 거실에 두는 스탠드형

조명기구(;;)같이 생겼다.

올미어의 세상은 압도적인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인격이 모두 데이터화되어 노후된 몸을 계속 바꾸면서 인격이

계승되고, 각 개체 간의 의사소통도 마치 블루투스로 데이터를 전송하듯 이루어진다.

SF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 스타크래프트의 칼라이 프로토스가 더해진 느낌이라고

상상하면 얼추 맞을 것 같다.

올미어의 세계에서는 모든 지식과 경험이 모든 개체에게 공유되기 때문에 각 개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하면 되는데 올미어의 경우 그 일이 다른 종족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브랜든을 만나기 전 그는 '라키모아'라는 원시 종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라키모아는 긴 털 고릴라 같은 생김새를 가진 종족으로 수렵, 채집 시절의 인류와 비슷한 느낌이다.

압도적으로 발전된 사회에서 사는 올미어는 브랜든이나 라키모아를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벌레 정도의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브랜든은 자신이 올미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3개 종족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각기 다른데 이 부분이 재미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서로를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스포가 될 수 있어 흐리게 처리하였다.)

올미어의 시각: 올미어(사람) 브랜든(벌레) 라키모아(벌레)

브랜든의 시각: 올미어(사람) 브랜든(사람) 라키모아(사람)

라키모아 종족의 시각: 올미어(신) 브랜든(천사) 라키모아(사람)

결말까지 스포를 할 수는 없으니 작품의 흐름만 언급하면,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뭔가 대단한 논리적

증명 방법이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감성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방법이 만화라는 장르에도 부합할 뿐만 아니라

섣부른 논리적 증명 방식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다 읽은 뒤 종합해 보자면 그저 생각하고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고, 과거를 통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책 2권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만화이기 때문에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데, 3개의 전혀 다른 사회를 독자들에게

이해시켜야 하니 각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주요 서사의 진행은 굉장히 빠르게 지나가버린 것 같은 아쉬움도 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가 할 말만 딱 하는 느낌이어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느낌은 3부작 전체에 걸쳐

일관적으로 좋았다.

보통 만화의 경우 인기가 좋으면 무리하게 분량을 늘리려는 시도가 많은 것 같던데 이 작가는 그런 거 없이 자신이

구상한 스토리에 꼭 필요한 장면과 대사만 딱 넣어 마무리 짓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것 같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평소에 잘 해보지 못했던 질문을 던져주는 좋은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1부와 2부는 재미있게 읽고 나면 끝에 가서 뭔가 찜찜하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이 남는 엔딩이었다면

이번 브랜든은 그야말로 '완결'에 걸맞은 결말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서도 책을 덮으며 한껏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브랜든이라는 캐릭터 역시 충동적인 면과 나약하지만 선한 면을 함께 지닌 평범한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이 인물이

책 두 권에 걸쳐 내면적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메리아나, 말했지...신은 없다고...

그저...우리만 있을 뿐이야...

우리는 모두가 달라...

(2권, pg 308)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대사의 감동을 많은 사람들이 느껴봤으면 좋겠다.

보통 만화를 보고서 '아이와 같이 보면 좋겠다'리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3부작만큼은 잘 보관하고

있다가 아이가 좀 더 커서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할 때쯤 같이 읽어보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d몬의 사람 3부작 서평

1. 데이빗: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2285818489

2. 에리타: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2464107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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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악에게 묻는다 - 누구나 조금씩은 비정상
김성규 지음 / 책이라는신화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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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차를 보기 전까지는 나도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그저 동전의 양면이나 흑과 백처럼 대립되는 두 가지

양상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자가 고심 끝에 선정한 목차를 보니 악에도 나름 카테고리가 있고 그에 따라 죗값의 경중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체계적으로 분류된(?) 인간의 악행을 짚어보며 보다 더 선하게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읽게 되었다.

일단 저자와 책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면, 죽음심리학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연구 주제를 가진 교수가 대학에서 같은

주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쌓인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한다.

살짝 중2병 느낌이 나는 제목인지라 읽기 전에 책의 난이도가 조금 걱정되었는데 다 읽은 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쉽게 읽힌다'라는 것이었다.

300페이지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에 시각 자료들도 많고(무려 올컬러!), 문체도 친절한 선생님에게 듣는

수업처럼 편안하게 쓰여 있어서 잠깐씩 짬내서 읽기에도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 13가지의 주제로 인간의 악행을 들여다볼 수 있다.

최근 대선 정국과 맞물려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갑질과 차별에서부터 사기, 관음증, 학대 등의 범죄 행위와

사이코패스, 정신분열, 다중인격 등 정신장애와 연관된 악까지 다양한 주제로 선과 악의 개념을 설파한다.

주제는 다양하지만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은 매우 일관적이어서 초중반쯤 지나면 책의 흐름이 익숙해진다.

먼저 들어가는 글을 통해 저자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생각해 볼 주제를 던져준다.

곧이어 주제와 관련된 실험과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인간이 이런 악의 길로 빠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악행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예시를 들어준다.

이 때 예시로 역사나 사회적인 이슈는 물론이고 관련된 유명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 흥미로운 사례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서 주제를 너무 어렵지 않게 고민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선을 추구할 힘이 있다는 것을 설파하며 한 챕터가 끝나게 된다.

(저자가 이렇게까지 일관적으로 모든 장을 서술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를 마지막 13장을 읽으면서 유추할 수

있었다. 13장의 주제는 '강박'이다.)

주제가 다양하니 어느 하나를 골라 소개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인상 깊었던 구절과 함께 간단한 소감을

남기고자 한다.

아래의 문단은 설령 사이코패스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모든 사이코패스들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례를 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사이코패스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 새롭게 느껴졌다.

사이코패스는 사람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합니다.

누군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면, 그 슬픔에 대한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그에 따라 취해야 할 자신의 행동 양식은 무엇인지 따져보는 식입니다.

태생적으로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는 타인에게 동정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길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 말이죠.

(pg 73)

사이코패스를 냉철함을 겸비한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내는 것도 문제지만, 사회에 융화되어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이코패스도 분명 존재할 것이므로 무턱대고 강력범죄자로 그려내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할 것이다.

11장의 주제는 '기억'이다.

현재 기억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고 곧 현실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한다.

잊고 싶은 기억은 삭제하고 갖고 싶은 기억을 주입할 수도 있을 것이라 한다.

저자는 이런 기술이 자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뇌는 마침내 기억이라는 과업에서 벗어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억을 이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뿐 아니라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게 되면

과연 행복할까요? -중략-

행복했던 것과 좋았던 것만 취사선택하여 기억을 남기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그때의 우리는 '진정한 우리'일 수 있을까요?

(pg 265)

'테세우스의 배' 비유를 여기서도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기억 역시 '나'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 본다면, 자신의 일부를 조금씩 기술로 변화시켜 간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어느 수준까지 확실하게 '그래도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지금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임에는 틀림없다.

책 초반에 저자는 인간을 성악설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 생존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죽이고 섭취한다.

즉, 다른 존재보다 우월할 때 생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 인간이고,

그것은 분명 악이다.

남들보다 큰 이득이 없어도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우위에 있으려고 하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악하다.

(pg 37)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저자가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선량함을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소개되는 악행에는 반드시 반례가 존재하고 언제나 조금 더 선한 쪽으로 변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가 발전할수록 잔인한 형벌이 점차 사라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인류는 보다 더 선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책은 읽는 사람들에게 그런 믿음을 갖게 해주는 책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이 고도의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존재에 대한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존재와 함께 감정을 나누고 그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pg 56)

그러니 우리 이것 하나만 기억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다행히도 불완전하게 태어났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가진,

그야말로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pg 312)

솔직히 기대한 것보다는 책 내용이 좀 쉬운 편이어서 다소 아쉬움이 남기도 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접근성이 좋다는 뜻이니 저자가 강의 대상으로 삼는 대학생보다 더 어린 중고등학생들도 충분히 일독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악하다는 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언제나 악과 마주하며 살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좀 더 선에 가까운 길을 가고자 끊임없이 모색해야 합니다.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더욱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고 말이죠.

(pg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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