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의 원작자가 그린 작품이라고 해서 일단 기대가 됐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져 독창적이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은 스토리를 구현해 내는 작가여서 이번에는 '늑대'라는
동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펼쳐냈는지 궁금했다.
책을 받아든 첫 느낌은 '가볍다'였다.
전체 페이지가 120페이지 미만으로 아주 얇은 편인데, 작품이 만화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짧은 분량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그래픽 노블이라기엔 글의 분량이 매우 적다. 그냥 만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실제로 후반부에 실린 해석까지 읽더라도 2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었다.
짧지만 강렬한 그림들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충분히 독자들에게 전해진다는 느낌이었고
다 읽고 난 후 스스로 생각해 볼 것들을 던져주기도 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국립공원 내 제한된 영역에서 방목으로 양을 키우는 노인 가스파르는 늑대로 인한 피해에 지쳐 암컷 늑대
한 마리를 쏴 죽인다.
이때 죽은 늑대의 새끼가 살아남아 가스파르와 대립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 후반부에 한 프랑스 교수의 작품 해설이 실려있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자원을 내어주는 존재라는 일반적인 서양의 자연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것이 해석 내용의 주된 내용이다.
해설에 따라 이해하든 각자 자신의 시각에서 이해하든 본 작품은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일단 나처럼 인간과 자연은 일방적인 관계일 수 없고 본래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은 저항할 수 없는 대자연이라는 것에 무의미하게 저항하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작품 속 늑대 역시 마찬가지지만 눈보라나 산사태 등의 자연 현상은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 현상에 앙심을 품고 복수심을 불태워본들 자연은 화를 내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작품 그 자체로만 감상한다면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양치기와 늑대라는 두 존재의 날카로운 대립과 처절한
복수극, 그리고 생존이라는 대전제 하에서의 극적인 화해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양 떼'는 두 존재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매우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대립은 그만큼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포효하는 대자연 앞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빚을 지게 된다.
늑대는 결코 인간을 위해 길들지 않았지만 인간이 허락하는 이상을 욕심내지 않게 되었고, 인간 역시 늑대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을 버리고 늑대의 영역을 지켜주며 자신의 자원을 기꺼이 나누었다.
저자가 의도한 작품의 핵심 주제는 아니겠지만 '복수'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작품 속 늑대가 가스파르에게 한 행위가 진짜 '복수'의 목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진짜 계획적으로 가스파르를 '엿 먹이기 위해' 행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저 본능에 따른 우발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가스파르에게 피해를 입힐 의도였다고 한다면 다른 늑대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굳이 저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 마리보다는 여러 마리일 때 더 효과적으로(?) 엿을 먹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뇌가 발달한 동물일수록 복수라는 행위를 실제로 할 수 있다고 하니 작품 속 늑대의 복수 역시 의도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는 인간이 아니기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동물이 본능에 충실한
것을 탓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스파르는 명백한 '복수'의 의미로 늑대를 추적한다.
그 결과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데,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자신이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
중간에 몇 번이고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그 늑대의 숨통을 끊지 않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복수심'이라는 것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감정이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이 불타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파멸시키고 싶은 마음.
전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이 제3자의 시각에서는 얼마나 덧없어 보일 수 있는지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짧은 작품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 자체가 가벼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이 온라인 서점에서 '청소년'도 아닌 '어린이'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다소 당황스러운 느낌이다.
물론 만화이고 글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아이들이 봐도 무방은 하겠으나, 아이들이 읽고 '음..역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지' 이상의 행간의 의미를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어린이를 너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작품을 너무 오버해서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길이는 짧지만 그림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책의 사이즈가 큰 편이기 때문에 편안한 장소에서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천천히 읽어본다면 생각보다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