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다행히 부부입니다 - 너무 밉지도 좋지도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명로진 지음 / 아침의정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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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둘이 딱 맞아서 안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아도 맞춰 가며 사는 것. 

이게 진짜 좋은 부부관계의 열쇠가 아닌가 싶다. (pg 220)



새해 처음 주문한 책인데 제목이 하필 이래서 집사람에게 약간 민망했다.

집사람에게 불만이 있는 건 전혀 아니고(?!) 순전히 저자가 좋아서 구매한 책이다. 

지난 저서인 '전지적 불평등 시점'을 읽고 단숨에 팬이 되어 버려서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에 빨리 받아보게 되었다.


이전작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책이었다면

이번 책은 '부부'라는 다소 가벼운, 하지만 보다 연륜이 좀 있는 사람들을 겨냥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전작에서는 실제적인 사례와 인문학 고전 속 지식의 조화를 통한 서술 방식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번 책에서는 인문학 고전 보다는 저자와 주변 사람들의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등장하는 사례들의 수위가 생각보다 쎄서 읽는 내내 '진짜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다가도 

역시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유교 선비가 숨어 있었던게 맞구나 하는 것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부부사이라는 것이 물론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니 누군가의 사례가 직접적으로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이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 사례를 읽더라도 누군가는 '내 배우자도 그럴지 모르니 감시를 강화해야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내 배우자는 그렇지 않을테니 난 사람 잘 만났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 역시 어떤 것들은 굉장히 흔하게 발생하는 경우고 어떤 것들은 너무도 특수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례들을 통해 부부가 보편적으로 지켜가야 할 서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일텐데

저자가 사례 이후에 들려주는 이런 저런 충고들이 이런 면에서 제법 가슴에 와닿았다. 


남자의 영혼에는 아이가 산다. -중략-

그러니 때로 아내가 엄마가 되어 주는 게 맞다.

하지만 그와 같은 비율과 중량으로 남자가 아내의 아빠가 되어 주어야 한다.

여자의 영혼에도 아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그 영혼 깊은 곳에서 홀로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보듬어 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pg 20)


결혼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육아 이야기도 꽤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 부부도 둘 다 워낙에 무난한 성격이라 그런가 지금까지도 크게 다퉈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가 처음 태어나고 1년이 채 안되었을 때는 언성이 높아진 적이 몇 번 있었다. 

사실 별 일도 아니었는데 그냥 서로 피곤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고 다행히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잘 지나간 것 같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이 좋은 부부였던 우리도 다툴만큼 아이를 키워보니 결혼도 큰 일이지만 육아는 너무도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내 나이대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딩크로 사는 것을 선호한다는데 육아의 고충을 주변 지인이나 SNS 등을 

통해 많이 접해본 영향도 분명 있을 것이다. 

특히나 돌봄노동을 해결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장 큰 고민이다. 


아이를 낳았다고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자. -중략-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봐주면 믿을 수 있고 좋지만 반대급부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제일 심각한 건, 내 아기가 내 아기가 아니고 부모의 아기가 된다는 거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소리가 지겹지 않나? '내가 너희 애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소리까지 듣고 싶은가? (pg 50-51)


집사람이 임신 전부터 일을 그만 둔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 해당되진 않지만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여자가 일을 그만 두고 애나 보라는 꼰대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느냐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되려 책 전반적으로 꽤나 페미니즘 시각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니 여성 독자라면 공감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해결책은 책을 통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내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돌봄노동 지원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개차반인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언급하고 싶다. 

맞벌이 부부면 어린이집 대기도 상위권에 들어갈 수 있고 돌봄 시간도 긴 편이어서 곧 죽어도 국공립 보내겠다는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어지간하면 다 들어갈 수 있다.  

다만 둘이 벌어도 벌이가 크지 않다면 둘 중 한 명의 소득은 돌봄노동에 투입되는 비용 빼고 나면 남는게 별로 없을 거라는건 사실이다. 


육아라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고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가족이란 전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누가 더 기여하고 덜 기여할 수는 있지만 기여도가 0인 경우는 없다.

하다못해 젊은 부부 옆에 가만히 누워 있는 백일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도 제 역할이 있다.

그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부부는 힘을 얻는다. 

새근새근 잠자는 아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젊은 아빠, 엄마는 낮에 있었던 힘든 일을 잊고 내일 다시 일할 기운을 얻는다. (pg 69)


자식이 생기니 왜 자식을 낳는지, 부부에게 자식이 왜 필요한지는 이제 조금 알겠다. 

나도 지금은 결혼 후 자식을 갖지 않는 부부들에게 경제적으로 많이 쪼들리는 것 아니라면 한 명 정도는 가지라고 권하는 편이다. 


문제는 자식이 부부와 함께 사는 시간이 대략 20년 전후일텐데 부부가 같이 사는 시간은 이보다 훨씬 길다는 것이다. 

자식 보며 사는 삶이 끝났을 때도 부부가 서로를 보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물론 지금 생각에서는 가능할 것 같지만 그 순간이 적어도 15년이나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때 내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또 내 배우자가 어떻게 변해있을지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저자는 이런 충고를 남겼다. 


둘이 딱 맞아서 안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아도 맞춰 가며 사는 것. 

이게 진짜 좋은 부부관계의 열쇠가 아닌가 싶다. (pg 220)


나는 불행한 동거보다는 행복한 별거를 종용한다.

혐오로 가득한 결혼생활을 하느니 자기애에 기반한 이혼 생활을 제시한다.

자기애가 먼저이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내도 자식도 사랑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행복해지고 싶은가?(결혼하고도?) 그렇다면 우선 당신 자신을 돌보라. 

나머진 모두 나머지다. (pg 263)


책이라는 공개적인 매체를 통해 부부 이야기를 담아 내서 그런가 저자의 아내에 대한 찬양과 미안함을 표현한 구절이 꽤 많다. 

책 분량이 긴 편이 아닌데도 그런 부분이 꽤 길게 느껴졌던 걸 보면 그 부분을 넣어야 했던 저자의 심정에도 

모종의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전작처럼 재밌는 문체와 생생한 사례들 덕분에 읽는 시간이 즐거운 책이었다. 

주제가 부부사이인만큼 인문학적 소양으로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시도도 별로 없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만하리라 생각한다. 

책을 읽은 직후에는 결혼생활을 좀 해본 중년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좀 더 생각해보니 그 때면 이미 늦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 같아서 젊은 부부들에게도 한 번쯤 권해봄직하겠다. 

단 하나 아쉬움이라면 전체적으로 분량이 좀 짧은 것 같아서 각각의 사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좀 더 들어갔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그 덕에 굉장히 빨리 읽을 수 있어서 좋은 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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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싫어요! 몸과 함께 마음도 쑥쑥 시리즈 3
파울린느 아우드 지음, Sensoa (벨기에 공공 성교육기관) 외 감수 / 북드림아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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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자라면서 부모가 일일이 챙겨줘야 하는 것들은 줄어드는 반면, 시기마다 놓치지 않고 가르쳐야 하는 것들은 늘어가는 것 같다.

성교육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딸아이가 돌 때쯤 되었을 때 평소처럼(?) 샤워 후 그냥 밖으로 나왔다가 아이가 이게 뭐냐고(!) 물은 후 

애 앞에서는 철저하게 가리고 조신하게 생활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남녀 신체 차이부터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는 하는데 막상 딸 앞에 벗고 나오기가 영 쉽지 않다.

생각해보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집사람에게는 별로 부끄럽지 않은데 내 피가 반이나 섞인 아이에게는 부끄럽다는 것이 내 스스로도 

이해가 안가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부끄러운건 부끄러운거다. 


내가 이렇게 선비 마인드일 줄은 나 자신도 몰랐으니 아이에게 성교육을 하기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책 소개에 따르면 4-8세 정도의 아이를 대상으로 한 책이라 하고 아이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도 늘고 있기 때문에

조기에 성교육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유럽에 대한 환상이 좀 사라지긴 했지만 유럽의 공공 성교육 기관에서 검수까지 거쳤다고 하니 뭔가 믿음이 가기도 했다. 


일단 책을 처음 편 느낌은 그림이 참 좋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상대로 한 그림책이니 시각적으로야 당연히 예쁘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역시 유럽의 검수를 거쳐서 그런지 등장하는 아이들의 인종이나 성별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좋았다. 



(표지부터 인종과 성별이 각기 다른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면에 아쉬운 점이라면 텍스트가 다소 많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부모가 함께 보는 책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서 그럴 수 있겠지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인데 

그림보다 텍스트의 비중이 더 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아쉬웠다. 

이 책을 스스로 보려면 7-8세는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새 책이 왔으니 모처럼 좋은 아빠 코스프레가 가능하다.)


시국이 이래서 아이가 어린이집을 쉬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단체 보육을 경험하게 될테고

그 때가 되면 성교육의 중요성이 더 커질 것이다. 

그 때를 대비해서 이 책을 보며 같이 공부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책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행위를 설명함에 있어서 내가 해당 행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뿐 아니라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같이 설명해주고 있어서 좋았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내 몸을 다치게 할 수 있는 행위를 한다면 그만 하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자신도 그런 행위를 하면 타인을 다치게 할 수 있으니 하면 안된다는 메시지가 같은 페이지에 담겨 있다. 


그림도 좋고 내용도 좋지만 상술했듯이 글씨가 많아서 그런가 이제 4살인 딸아이가 집중력 있게 오래 보지는 못하고 있다. 

나나 집사람이 일부러라도 같이 읽어주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할 것 같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책이라 하는데 우리가 접한 3권은 원치않는 신체접촉과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를 주로 다루고 있어

굳이 '성교육'에 국한된 내용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인성교육에 더 가까운 책이라 할 수 있었다. 

생식기의 차이나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 등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교육 컨텐츠들은 다른 시리즈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다 보고 나면 다른 시리즈들도 접할 수 있도록 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감류를 제외한 유아용 책 중에서는 모처럼 부모된 입장에서 꽤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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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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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기적 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pg 228)



문돌이인 주제에 유독 역사쪽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하면 흔히 '지루하다'라는 편견을 가지기 쉬운데, '누가 몇 년도에 무슨 일을 해서 이렇게 되었다.'라는 식의

서술이 쭉 이어지는 역사책이라면 당연히 재미가 없을 법 하다.

하지만 이 책은 특정 시대를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 것이 아니고, 역사의 특정 순간마다 주목할만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지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접하게 되었다.


출간된지 꽤 오래된 책이라 하는데 책을 덮고 나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일단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데 집사람이 책 제목을 보더니 '재미없지 않아?'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완전히 틀린 질문이었다.


역사책인 주제에 재미가 있다.

그 재미의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독특한 서술 방식이었다.

대체로는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당시의 시대상과 배경, 그리고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들의 심리적인 변화까지도 묘사해 두었다. 

이미 그 결과가 정해져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함에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쫄깃한 긴장을 느끼게 하는 작가의 마력 넘치는 문체가

일단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옳긴이의 글에서 작가가 인물 평전을 잘 쓰기 위한 전제로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글을 쓰면서 무엇에 중점을 두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인물들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살아있는 사람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 중략 -

 그러려면 역사가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역사가는 현 상황에 대한 지식을 가진 심리학자이기도 해야 합니다." (pg 379)


게다가 도스토옙스키 파트는 마치 서사시처럼 구성되어 있고 톨스토이 부분은 희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심리를 예측해서 시나 희곡으로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상당히 몰입감 있게 잘 구성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제목에 '광기'와 '우연'이 강조되어 있듯이 등장하는 총 14개의 스토리에는 인간의 광기와 운명의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흥미로운 역사들이

담겨 있다. 

생사가 오락가락 할 정도로 병을 앓는 와중에도 작곡을 놓지 않았던 헨델,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들여 기어이 영국과 미국 사이에 

해저 케이블을 연결하는 데에 성공한 사이러스 필드의 이야기에서는 역사를 빛낸 인물들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잘 엿볼 수 있었다. 


기적 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pg 228)


또한 처음으로 캘리포니아에 진출해 사업을 벌이다 우연히 발견된 금으로 인해 결국 파멸을 맞고 마는 서터의 이야기나

별 볼일 없는 평범한 군인이었던 루제 드 릴이 술자리에서 어쩌다 제의 받아 프랑스 국가를 작곡하게 되는 이야기에서는 

역사에 있어서 우연히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갖는 엄청난 파급력도 잘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후회해봤자 잃어버린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 인간의 삶에서나 역사에서나 마찬가지 이치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르친 것은 천 년을 들여도 되돌릴 수 없다. (pg 75)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 역사 속 인물들이 한 행동 기저에 어떤 심리가 있었고 어떤 우연한 상황이 겹쳤기 때문인지,

역사적 사실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접근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읽으면서 툭툭 등장하는 작가의 주옥같은 문장들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가는 아직 권력을 거머쥐지 못했을 때는 늘 본능적으로 자신의 나쁜 행위를 지지해 줄 사상가를 찾는 법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이 한심한 사상가를 밀쳐내면 그만이다. (pg 27)


평온한 시절에는 조심성, 복종, 노력, 신중함과 같은 시민적 미덕들이 큰 도움이 되지만 웅대한 운명의 순간이 오면 이런 미덕들은

불길 속에 맥없이 녹아내리고 만다.

웅대한 운명의 순간은 늘 천재만을 택해서 불멸의 형상을 부여하는 반면, 우유부단한 자를 경멸하며 밀쳐낸다. (pg 181)


1837년에 전보가 등장하면서 이제껏 분리된 삶을 살던 인류는 처음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세계사에서 중요한 해가 우리 교과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 교과서 저자는 아직도 어떤 장군이나 국가가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가 인류가 함께 진정한 승리를 거둔

이야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g 225-226)


책이 살짝 두꺼운 감이 있지만 총 14개의 각기 다른 스토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지루할 틈 없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수업 교재로 사용되는 책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의 책이면 수업 교재여도 학생들이 지루하지 않게 

역사를 공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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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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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대학 입시가 끝나면 상위권 주요 대학 입학자들의 소득 분위에 대한 기사가 매년 뜨고 있다.

기사의 핵심은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의 학업 성과와 직결된다는 내용이다. 

가장 최근에 뜬 기사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올해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3곳 대학 신입생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55.1%가 고소득 가구의 자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용 출처 : 한겨레 2020-10-12일자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965412.html)


여기에서 말하는 고소득 가구란 국가장학금 지급 시 고려하는 소득분위 중 9-10분위를 의미하는데, 

이 표에 따르면 월 소득 약 1천만원 이상인 가구를 의미한다. 

맞벌이 부부라면 각각이 연봉 6천만원 이상, 외벌이라면 최소 1억 2천 이상의 연봉을 받아야 달성할 수 있는 소득분위라고 보면 된다. 

(즉, 연봉 1억짜리 외벌이 집안이라 하더라도 저 기준에서는 고소득 가구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학생들이 모이는 S.K.Y 3개 대학만 조사해도 위와 같은 수치가 나온다고 한다. 

혹자는 이런 결과의 원인으로 학생부 종합전형을 꼽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편협한 시각이다. 

실제로 학종은 쪽집게 과외를 통해 수능에서 따라갈 수 없는 격차를 보일 수 있었던 고소득층 자녀와 

일반 학생들이 경쟁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능으로만 선발하던 시절에도 부모 소득에 따른 성적 격차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계속 수능을 통한 정시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정답은 바로 '공정함'이라는 단어가 주는 환상 때문이다.

실제로 수능 역시 사교육에 큰 비용을 투입할 수 있는 집안의 아이일수록 유리하다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수'라는 객관적인 지표만으로 선발하는 것이 더 '공정'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을 잘 지적한 책이 나왔다. 

그것도 우리나라가 늘 비교하고 싶어하는 대상인 미국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면서 소득 불평등 심화, 

특히 중산층 해체라는 큰 변화에 직면해 있음을 지적하는 책이다.

저자는 이를 '능력주의'라는 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과거에 토지 기반, 핏줄 기반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노동과 소득이 분리되어 있었다. 

상류층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부유할 수 있었고 수탈의 대상인 노동계층은 생존에 필요한 소득 정도만 지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사회와 기술이 발전하면서 토지와 핏줄보다는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되기 시작했고, 

타인의 노동력을 온전히 수탈하는 존재였던 상류층은 고급 지식과 스킬로 무장한 '노동하는 엘리트'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 막대한 소득을 올린 이들은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들이 다시 엘리트로서 기능하게 함으로써

과거의 신분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능력주의가 대두되면서 엘리트들의 성과가 온전히 개인의 성취로 포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획득한 학위나 각종 자격들은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노력해서 획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바로 그 '노력을 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부자들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피해는 누가 보는가?

특이하게도 저자는 전 계층이 모두 피해를 본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최빈층은 소득이 올라갈 기회가 점점 더 없어지는 셈이므로 피해를 보는 것이 당연하게 예상된다.

중산층 역시 마찬가지다. 


엘리트의 막대한 교육 투자는 성과를 낳는다.

현재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의 학업 격차는 대법원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소송의 판결을 내린 1954년의 흑백 학생 간 

격차보다 더 크다. (중략)

교육 불평등은 부유층과 저소득층을 갈라놓을 뿐 아니라 갈수록 부유층과 중산층 사이에도 장벽을 만드는 추세다.

예를 들어 현재 부유층 어린이와 중산층 어린이의 학업 성과 격차는 

중산층 어린이와 저소득층 어린이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다. (pg 82-83)


결국 '능력주의'가 주장했던 능력에 따른 계층 상승의 기회라는 것이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의 평균 소득은 계속해서 오르지만 이것이 상위 1%이하에 해당하는 부자들의 소득 증가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크다.


당연히 평균소득의 상승으로 인해 중산층도 절대적인 수준에서는 과거보다 잘 사는 것이 당연하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은 절대적인 수준에서의 경제적 환경 변화가 아니라 과거에 비해 계층간 이동이 과연 증가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산층의 상위 계층으로의 유입은 더 어려워지고 빈곤층으로의 전락은 더 쉬워지고 있다. 


모든 경제부문을 통틀어 혁신 때문에 중산층 직종이 소수의 폼 나는 직종과 대다수 암울한 직종에 밀려나고 있다. (중략)

1975년 이후 상위 1%의 소득이 3배 증가하는 동안 중위 실질 소득은 고작 10분의 1 정도 늘어났으며 

2000년 이후 중위 소득은 사실상 정체된 상태다. (pg 79)


남들이 사는 부유한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기보다 내가 사는 가난한 사회의 중심에 서야 더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중략) 

능력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중산층이 된다는 것은 시대에 뒤처질 뿐 아니라 퇴행하는 것이며, 성장보다는 유지에 전력하고 

인정사정없이 뒤떨어지는 생활방식에 빠져 있는 것이다. (pg 87-88)


여기에서 말하는 '폼 나는' 직종이란 주로 금융, 의료, 법조, 정보기술 쪽에서 일하는 엘리트들로서 연봉 10억대 정도를 예시로 들고 있다. 

문제는 능력주의의 추구로 인해 엘리트간의 세습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엘리트 계층은 온전한 수혜자여야 할텐데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능력주의의 문제점이다. 


과거의 지주들과는 달리 현재의 엘리트는 누구보다도 과도한 업무량과 막대한 책임감을 떠안고 있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금전적인 보상은 매우 큰 것이지만 실상은 번 돈을 쓰면서 쉴 여유시간조차도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게다가 엘리트들이 사회 혁신의 고도화를 이룩하면 할수록 중산층의 직업은 더욱 더 사라져가므로

엘리트의 자녀들 역시 실패하면 중산층의 직업으로 살아가기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엘리트의 자녀들은 성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더욱 문제는 그런 삶이 마치 성공한 삶인양 포장되고 그러한 경제적 대가가 따르지 않은 삶은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는

사회적 분위기에 있으며 이는 '공정함'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부모의 경제력이 우수한 학업 성적과 명문대 입학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과연 '정당한 결과인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란 것도, 우수한 사교육을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실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사 외모도 경쟁력이고 실력이라며 성형수술이 권장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문제점은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역시나 사회문제라는 것은 해결책이 너무도 어렵다.

저자도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해주고는 있지만 미국과의 현실 차이 때문일지 나에게는 그다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서 녹을 먹고 있는 입장이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입학정원의 상당 부분을 차상위계층에게 할당하는 제도만 보더라도 그렇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에서도 기회균등전형을 운영하고는 있지만 그 비율이 아주 적은 편인데다, 이 전형을 둘러싼 잡음이 굉장히 많다.

심지어는 이 전형으로 온 학생들을 '기균충'이라고 부르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가난한게 벼슬이냐는 글이 에브리타임에 올라온다.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검색해보라.)

이 전형의 비중을 늘린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찬성하지만 글쎄...대학들이 엘리트 주의의 선봉장인 언론의 공격을 이겨내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길게 쓴 감이 없진 않지만, 책 자체가 500여 페이지로 두꺼운 편이고 내용도 마냥 쉬운 것이 아니어서 정리하기가 다소 까다로웠다.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현실과 한국의 현실이 온전히 일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실 분석 측면에서는 대체로 수긍이 가는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부의 대물림은 부모의 노동소득을 교육에 투자하여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과 같이 노동소득 증가폭을 아득히 상회하는 불로소득의 상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더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드래곤도 훌륭한 대학, 대학원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재드래곤과 같은 교육을 받은 일반인이 삼성 회장이 될 수는 없듯이

엘리트들의 교육 세습 역시 자신들의 재산 세습을 가리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같은 것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내 자식이라서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 '뛰어나기 때문에' 물려주는 것이라고 포장하기 위해서라는 의미이다.)

당장에 각 국가별로 자수성가한 부자의 비율을 조사한 인터넷 자료들만 보아도 우리와 미국은 그 격차가 상당한데, 

그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이수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미국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소득수준에 따라 교육기회 자체가 박탈되고 있다면 사실 우리나라에는 이렇게까지 고학력자들이 많을 수가 없다. 

박사 학위를 들고 시간강사를 전전하는 사람들도 많은 사회에서 엘리트들의 교육세습이 지금처럼 큰 빈부격차를 만들어내는 

주요 요인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해결책으로 저자가 제시한 방안 중 우수 명문 대학의 정원을 늘리는 등의 주장도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당장에 의사 수가 모자란다고 정원을 늘리려고 했을 때 의사협회가 했던 반응만 보아도 얼마나 말도 안되는 주장인지 잘 알 수 있다.)

'이 정도 하면 엘리트들도 이 정도는 양보하겠지' 정도의 생각은 엘리트 개개인들에게 물어보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엘리트 '집단'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신들이 획득한 특권을 조금도 내려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문제인식 자체는 매우 의미가 있었다.

능력주의라는 것이 공정함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 그리고 능력주의의 최고 수혜자인 엘리트들 역시 

능력주의가 자신의 삶을 끝없는 경쟁 속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려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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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자살했다 - 상처를 품고 사는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곽경희 지음 / 센시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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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가족의 자살은 슬프고 아픈 일이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떠안은 고통과 슬픔을 말로 표현하고 풀어내야 한다.
그래야 점점 가벼워지고 마침내 떠나보낼 수 있다. (pg 95-96)


여러모로 2019년과 2020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오래도록 기억될 해가 될 것 같다.

작년에 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녀석이 만 나이로 서른이 되기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동생이 죽었지만 슬퍼할 수 없었다.
그래봐야 형은 기타친족일 뿐인데 직계비속인 자식을 잃은 부모님 앞에서 나까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었고 나를 기다리는 직장과 일이 있었다.
신기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덤덤한 내 모습에 놀라며 어줍잖은 위로들을 건냈다.

하지만 나라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나보다.
아니,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걸까?'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제목을 보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고 책 소개를 읽자마자 이 책은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배송이 오늘 왔고, 애가 잠든 저녁 9시부터 읽기 시작해 벌써 다 읽고 서평을 남기고 있다.

이 책은 장황하게 소개할 필요가 없다.
주변에 자살한 사람이 있다면 그냥 무조건 꼭 보라고 권해주고 싶을 뿐이다. 
특히나 자살한 사람이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일수록, 그리고 그 시점이 조금 지난 사람일수록 더 추천하고 싶다.

저자는 네 아이를 둔 엄마로서 배우자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상처를 많이 극복했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용기도 생겼다.
따라서 가까운 사람을 자살로 잃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사건이 주는 충격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난 상태라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여유 정도는 생긴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사건을 막 경험한 직후에는 이런 책도 별 위로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시간이 좀 지난 뒤가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소개는 이것으로 끝이다.
주변 사람 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지인이 있어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하라.
나도 분위기를 보아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될 때 부모님께 추천해줄 생각이다.


이 이후로는 자신의 상처를 책이라는 공개적인 매체를 통해 가감없이 드러낸 저자의 용기에 감동해 나의 이야기를 좀 쓰려고 한다.
내 이야기 속에 이 책에서 감명깊게 읽었던 구절들을 인용해두었다.
가까운 극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털어놓았던, 그것도 술 기운을 빌려 횡설수설 했던 이야기들이다.
내 개인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후의 글은 별 재미가 없을 것이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건 지난 해 여름이었다.
자신의 차에서 번개탄을 피웠고 이를 경찰이 발견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자신을 포함 우리 가족 누구와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낯선 포항의 어느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

오랜시간 준비한 흔적이 보였고, 남긴 유서의 내용도 심플했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만이 간략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적혀있을 뿐이었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녀석이 살던 부산 근처의 한 절에서 제사를 올린 후 재를 뿌렸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간 녀석인지라 우리도 따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묘도 아무런 표시도 없이, 남은 것 하나 없게 다 태워 뿌렸다.
그리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은 계속 많았고 처자식과 함께 사는 삶도 변함이 없었다.

연말 즈음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복되는 일상이 점점 견딜 수 없어졌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되나'와 '이렇게 열심히 살아 뭐하나' 라는 양 극단의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자식을 제외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루틴을 차지하는 직장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운이 좋게도 이전 직장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직장을 옮길 수 있었다.
직장 근처로 이사도 했다. 
셋이 살기에는 비좁았던 투룸 빌라에서 오래되긴 했지만 깨끗하게 수리된 아파트로 옮겼다.
새로 바뀐 일상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게 진짜 내 삶이 맞는지 가끔 의심스럽기도 하다.
부모님도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가끔 딸아이와 놀다 우시는가 하면 왁자지껄하게 한잔 기울이는 와중에도 
대화가 끊기고 어색한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일쑤였다.

살아 있는 게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중략-
혹여라도 남편이 죽은 것을 아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나를 본다면 "남편이 죽었는데도 저 여자는 잘만 돌아다니네"라며
수군댈 것 같았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저 여자는 남편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먹을 걸 사러 나왔어?"라며 욕을 할 것만 같았다. (pg 91-92) 

위에 적힌 저 감정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언젠가 술에 취해 집사람에게 하소연을 했을 때 집사람이 자신도 어릴 적 아버지(장인어른)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힘들었다며,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거라며 위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교통사고나 병으로 가족을 잃는 것과 자살로 잃는 것은 같은 사망이라 할지라도 느낌이 매우 다르다.
일단 전자는 뭔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다. 
아무리 내가 교통신호를 잘 지켜도 일방적으로 달려드는 차를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내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크게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자살로 인한 죽음은 좀 다르다.

그들은 무언가를 깨끗이 청산한다는 마음으로 그 길을 갔는지 모르지만 남은 가족은 평생 그들의 죽음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
이는 그들이 자살로써 내던져버린 그 짐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무겁다.
그 짐을 내려놓으려면 결국 먼저 간 그와 같은 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 (pg 95)

나도 그랬다.
녀석에 비하면 참 순탄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부모님 말씀 적당히 잘 듣고 적당히 공부해서 나름 괜찮은 대학을 나오고 나름 괜찮은 직장에 들어갔다.
나름 괜찮은 사람을 만나서 나름 예쁜 딸 아이를 낳았다.
아주 잘 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은 달랐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한 운동은 결과가 좋지 못했고, 억지로 들어간 대학도 결국 스스로 그만두고 말았다.
중학생 즈음부터 우울증 증세가 있었고 고등학교 때에는 자살 시도도 한 차례 있었다.
우울증 병력이 있으면 군대도 면제였지만 취업에 불리하다며 박박 우겨서 현역으로 다녀왔다. 
자기 먹고 살 건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큰 소리를 쳤지만 들어가는 곳마다 저임금과 고용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우울증 증상도 '이 새끼 진짜 죽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빠졌다가도 금새 웃으며 한잔 기울일 때면 '이제 괜찮은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진짜로 가 버렸다.
나에게 생활비가 모자란다며 60만원만 꿔달라는 것이 마지막 부탁이었다.
다음 달에 꼭 주겠다는 말에 무심하게 이체만 해주고 만 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그러니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나도 차라리 망했어야 했나. 
나도 뭔가 실패해서 같이 좌절을 겪었어야 했나.
비트코인이라도 해서 빚이라도 왕창 졌으면 이 자식이 좀 덜 힘들었을까.
나도 동생에게 애 분유값이 모자라니 30만원만 꿔달라고 해봤으면 어땠을까.

물론 바보같은 생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계속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걸 막기가 쉽지가 않다.

나는 생각을 달리 함으로써 그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들의 죽음에 우리는 먼지 하나 보탠 게 없다.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라 온전히 피해자이다. 
게다가 이때까지 느꼈던 고통으로도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
그러니 나는 그 짐을 얼마든지 내려놓아도 된다. (pg 95)

흔히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돌이킬 수 없다고 한다.
틀린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도 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과거도 있다.
남편이 떠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이지만, 
그의 죽음을 해석하는 나의 그릇된 생각은 다시 돌이켜 좋은 생각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과거이다. (pg 139)


지금은 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가 살아있는 소나무 옆에 죽은 소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이 썼다.
물론 책을 쓰기 위해 MSG가 좀 쳐진 느낌이긴 하지만 꽤나 인상적이어서 원문 그대로 옮긴다. 

(pg 124)

맥락은 다르지만 동생을 뿌린 절의 스님이 부모님과 나에게 해주셨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정확한 말의 토씨 하나하나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메시지였다.
'먼저 간 자식이지만 부모 가슴에 못 박은 불효자인 것만이 아니라 먼저 감으로써 우리에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된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으니 우리의 스승이 된 것이기도 하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때도 이 말을 듣고 굉장히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위에 인용한 저자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여하간 책을 보고 생각을 많이 고쳐먹게 되었다.
동생이 죽은 것을 계기로 이직할 생각을 했고 아내와 아이가 좀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동생이 간 후 아버지가 상속받으신 동생 집이 내 이사 날짜와 비슷하게 처분이 되었고 그 돈을 내가 이사할 때 빌릴 수 있었다.
이 책 역시 요즘도 가끔 술 마시면 우울해하는 나에게 동생이 보고 털어 버리라고 보내준 모양이다. 

그래서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결론을 내자면, 이 책이 나에게 왜 도움이 되었는가를 밝혀야 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나의 깊은 절망과 뼛속까지 사무친, 소화되지 않은 설움을 토하고 싶었는데 그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말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픔과 괴로움은 아예 꺼내지도 못한다.
그저 적당히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입에서 길고 지루한 잔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만 한다. (pg 229)

진짜 위 문구는 자살 유가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아마 부모님도 비슷한 경험이 수도 없이 있을 것이다.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도 슬프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다.
동생의 죽음이 내 삶과는 무관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사람들의 값싼 동정이나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덤덤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눈물이 나면 울고 원망하고 싶으면 욕도 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

사실 동생은 법적으로 기타친족에 해당한다.
배우자를 잃고 네 명의 자녀를 홀로 키워야 하는 저자에 비하면 내 상실은 매우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더 힘든 타인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해서 내 힘듦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의 위로가 없어서 더 좋았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건, 상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전문가를 찾고 우울이 자신을 삼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자신의 사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자살로 가족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요즘들어 많이 느낀다. 
심지어 지금 직장에서는 누가 형제관계를 물으면 외동이라고 한다.
한번은 '전혀 외동같지 않네요'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외동이 된지 얼마 안됐거든요'라고 대답했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어서 더 캐묻지는 않았지만 대화가 어색해지기엔 충분했다.
사실 지금도 이런 질문을 받을 땐 어디까지 이야기하는 게 맞는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눈치없이 묻는다면 이제는 그냥 덤덤하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게 흉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내가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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