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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자살했다 - 상처를 품고 사는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곽경희 지음 / 센시오 / 2020년 11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가족의 자살은 슬프고 아픈 일이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떠안은 고통과 슬픔을 말로 표현하고 풀어내야 한다.
그래야 점점 가벼워지고 마침내 떠나보낼 수 있다. (pg 95-96)
여러모로 2019년과 2020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오래도록 기억될 해가 될 것 같다.
작년에 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녀석이 만 나이로 서른이 되기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동생이 죽었지만 슬퍼할 수 없었다.
그래봐야 형은 기타친족일 뿐인데 직계비속인 자식을 잃은 부모님 앞에서 나까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었고 나를 기다리는 직장과 일이 있었다.
신기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덤덤한 내 모습에 놀라며 어줍잖은 위로들을 건냈다.
하지만 나라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나보다.
아니,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걸까?'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제목을 보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고 책 소개를 읽자마자 이 책은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배송이 오늘 왔고, 애가 잠든 저녁 9시부터 읽기 시작해 벌써 다 읽고 서평을 남기고 있다.
이 책은 장황하게 소개할 필요가 없다.
주변에 자살한 사람이 있다면 그냥 무조건 꼭 보라고 권해주고 싶을 뿐이다.
특히나 자살한 사람이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일수록, 그리고 그 시점이 조금 지난 사람일수록 더 추천하고 싶다.
저자는 네 아이를 둔 엄마로서 배우자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상처를 많이 극복했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용기도 생겼다.
따라서 가까운 사람을 자살로 잃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사건이 주는 충격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난 상태라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여유 정도는 생긴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사건을 막 경험한 직후에는 이런 책도 별 위로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시간이 좀 지난 뒤가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소개는 이것으로 끝이다.
주변 사람 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지인이 있어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하라.
나도 분위기를 보아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될 때 부모님께 추천해줄 생각이다.
이 이후로는 자신의 상처를 책이라는 공개적인 매체를 통해 가감없이 드러낸 저자의 용기에 감동해 나의 이야기를 좀 쓰려고 한다.
내 이야기 속에 이 책에서 감명깊게 읽었던 구절들을 인용해두었다.
가까운 극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털어놓았던, 그것도 술 기운을 빌려 횡설수설 했던 이야기들이다.
내 개인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후의 글은 별 재미가 없을 것이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건 지난 해 여름이었다.
자신의 차에서 번개탄을 피웠고 이를 경찰이 발견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자신을 포함 우리 가족 누구와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낯선 포항의 어느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
오랜시간 준비한 흔적이 보였고, 남긴 유서의 내용도 심플했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만이 간략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적혀있을 뿐이었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녀석이 살던 부산 근처의 한 절에서 제사를 올린 후 재를 뿌렸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간 녀석인지라 우리도 따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묘도 아무런 표시도 없이, 남은 것 하나 없게 다 태워 뿌렸다.
그리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은 계속 많았고 처자식과 함께 사는 삶도 변함이 없었다.
연말 즈음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복되는 일상이 점점 견딜 수 없어졌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되나'와 '이렇게 열심히 살아 뭐하나' 라는 양 극단의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자식을 제외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루틴을 차지하는 직장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운이 좋게도 이전 직장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직장을 옮길 수 있었다.
직장 근처로 이사도 했다.
셋이 살기에는 비좁았던 투룸 빌라에서 오래되긴 했지만 깨끗하게 수리된 아파트로 옮겼다.
새로 바뀐 일상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게 진짜 내 삶이 맞는지 가끔 의심스럽기도 하다.
부모님도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가끔 딸아이와 놀다 우시는가 하면 왁자지껄하게 한잔 기울이는 와중에도
대화가 끊기고 어색한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일쑤였다.
살아 있는 게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중략-
혹여라도 남편이 죽은 것을 아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나를 본다면 "남편이 죽었는데도 저 여자는 잘만 돌아다니네"라며
수군댈 것 같았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저 여자는 남편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먹을 걸 사러 나왔어?"라며 욕을 할 것만 같았다. (pg 91-92)
위에 적힌 저 감정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언젠가 술에 취해 집사람에게 하소연을 했을 때 집사람이 자신도 어릴 적 아버지(장인어른)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힘들었다며,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거라며 위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교통사고나 병으로 가족을 잃는 것과 자살로 잃는 것은 같은 사망이라 할지라도 느낌이 매우 다르다.
일단 전자는 뭔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다.
아무리 내가 교통신호를 잘 지켜도 일방적으로 달려드는 차를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내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크게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자살로 인한 죽음은 좀 다르다.
그들은 무언가를 깨끗이 청산한다는 마음으로 그 길을 갔는지 모르지만 남은 가족은 평생 그들의 죽음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
이는 그들이 자살로써 내던져버린 그 짐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무겁다.
그 짐을 내려놓으려면 결국 먼저 간 그와 같은 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 (pg 95)
나도 그랬다.
녀석에 비하면 참 순탄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부모님 말씀 적당히 잘 듣고 적당히 공부해서 나름 괜찮은 대학을 나오고 나름 괜찮은 직장에 들어갔다.
나름 괜찮은 사람을 만나서 나름 예쁜 딸 아이를 낳았다.
아주 잘 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은 달랐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한 운동은 결과가 좋지 못했고, 억지로 들어간 대학도 결국 스스로 그만두고 말았다.
중학생 즈음부터 우울증 증세가 있었고 고등학교 때에는 자살 시도도 한 차례 있었다.
우울증 병력이 있으면 군대도 면제였지만 취업에 불리하다며 박박 우겨서 현역으로 다녀왔다.
자기 먹고 살 건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큰 소리를 쳤지만 들어가는 곳마다 저임금과 고용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우울증 증상도 '이 새끼 진짜 죽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빠졌다가도 금새 웃으며 한잔 기울일 때면 '이제 괜찮은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진짜로 가 버렸다.
나에게 생활비가 모자란다며 60만원만 꿔달라는 것이 마지막 부탁이었다.
다음 달에 꼭 주겠다는 말에 무심하게 이체만 해주고 만 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그러니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나도 차라리 망했어야 했나.
나도 뭔가 실패해서 같이 좌절을 겪었어야 했나.
비트코인이라도 해서 빚이라도 왕창 졌으면 이 자식이 좀 덜 힘들었을까.
나도 동생에게 애 분유값이 모자라니 30만원만 꿔달라고 해봤으면 어땠을까.
물론 바보같은 생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계속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걸 막기가 쉽지가 않다.
나는 생각을 달리 함으로써 그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들의 죽음에 우리는 먼지 하나 보탠 게 없다.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라 온전히 피해자이다.
게다가 이때까지 느꼈던 고통으로도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
그러니 나는 그 짐을 얼마든지 내려놓아도 된다. (pg 95)
흔히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돌이킬 수 없다고 한다.
틀린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도 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과거도 있다.
남편이 떠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이지만,
그의 죽음을 해석하는 나의 그릇된 생각은 다시 돌이켜 좋은 생각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과거이다. (pg 139)
지금은 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가 살아있는 소나무 옆에 죽은 소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이 썼다.
물론 책을 쓰기 위해 MSG가 좀 쳐진 느낌이긴 하지만 꽤나 인상적이어서 원문 그대로 옮긴다.
(pg 124)
맥락은 다르지만 동생을 뿌린 절의 스님이 부모님과 나에게 해주셨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정확한 말의 토씨 하나하나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메시지였다.
'먼저 간 자식이지만 부모 가슴에 못 박은 불효자인 것만이 아니라 먼저 감으로써 우리에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된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으니 우리의 스승이 된 것이기도 하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때도 이 말을 듣고 굉장히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위에 인용한 저자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여하간 책을 보고 생각을 많이 고쳐먹게 되었다.
동생이 죽은 것을 계기로 이직할 생각을 했고 아내와 아이가 좀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동생이 간 후 아버지가 상속받으신 동생 집이 내 이사 날짜와 비슷하게 처분이 되었고 그 돈을 내가 이사할 때 빌릴 수 있었다.
이 책 역시 요즘도 가끔 술 마시면 우울해하는 나에게 동생이 보고 털어 버리라고 보내준 모양이다.
그래서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결론을 내자면, 이 책이 나에게 왜 도움이 되었는가를 밝혀야 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나의 깊은 절망과 뼛속까지 사무친, 소화되지 않은 설움을 토하고 싶었는데 그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말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픔과 괴로움은 아예 꺼내지도 못한다.
그저 적당히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입에서 길고 지루한 잔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만 한다. (pg 229)
진짜 위 문구는 자살 유가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아마 부모님도 비슷한 경험이 수도 없이 있을 것이다.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도 슬프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다.
동생의 죽음이 내 삶과는 무관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사람들의 값싼 동정이나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덤덤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눈물이 나면 울고 원망하고 싶으면 욕도 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
사실 동생은 법적으로 기타친족에 해당한다.
배우자를 잃고 네 명의 자녀를 홀로 키워야 하는 저자에 비하면 내 상실은 매우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더 힘든 타인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해서 내 힘듦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의 위로가 없어서 더 좋았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건, 상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전문가를 찾고 우울이 자신을 삼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자신의 사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자살로 가족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요즘들어 많이 느낀다.
심지어 지금 직장에서는 누가 형제관계를 물으면 외동이라고 한다.
한번은 '전혀 외동같지 않네요'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외동이 된지 얼마 안됐거든요'라고 대답했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어서 더 캐묻지는 않았지만 대화가 어색해지기엔 충분했다.
사실 지금도 이런 질문을 받을 땐 어디까지 이야기하는 게 맞는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눈치없이 묻는다면 이제는 그냥 덤덤하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게 흉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내가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