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다행히 부부입니다 - 너무 밉지도 좋지도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명로진 지음 / 아침의정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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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둘이 딱 맞아서 안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아도 맞춰 가며 사는 것. 

이게 진짜 좋은 부부관계의 열쇠가 아닌가 싶다. (pg 220)



새해 처음 주문한 책인데 제목이 하필 이래서 집사람에게 약간 민망했다.

집사람에게 불만이 있는 건 전혀 아니고(?!) 순전히 저자가 좋아서 구매한 책이다. 

지난 저서인 '전지적 불평등 시점'을 읽고 단숨에 팬이 되어 버려서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에 빨리 받아보게 되었다.


이전작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책이었다면

이번 책은 '부부'라는 다소 가벼운, 하지만 보다 연륜이 좀 있는 사람들을 겨냥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전작에서는 실제적인 사례와 인문학 고전 속 지식의 조화를 통한 서술 방식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번 책에서는 인문학 고전 보다는 저자와 주변 사람들의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등장하는 사례들의 수위가 생각보다 쎄서 읽는 내내 '진짜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다가도 

역시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유교 선비가 숨어 있었던게 맞구나 하는 것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부부사이라는 것이 물론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니 누군가의 사례가 직접적으로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이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 사례를 읽더라도 누군가는 '내 배우자도 그럴지 모르니 감시를 강화해야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내 배우자는 그렇지 않을테니 난 사람 잘 만났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 역시 어떤 것들은 굉장히 흔하게 발생하는 경우고 어떤 것들은 너무도 특수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례들을 통해 부부가 보편적으로 지켜가야 할 서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일텐데

저자가 사례 이후에 들려주는 이런 저런 충고들이 이런 면에서 제법 가슴에 와닿았다. 


남자의 영혼에는 아이가 산다. -중략-

그러니 때로 아내가 엄마가 되어 주는 게 맞다.

하지만 그와 같은 비율과 중량으로 남자가 아내의 아빠가 되어 주어야 한다.

여자의 영혼에도 아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그 영혼 깊은 곳에서 홀로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보듬어 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pg 20)


결혼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육아 이야기도 꽤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 부부도 둘 다 워낙에 무난한 성격이라 그런가 지금까지도 크게 다퉈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가 처음 태어나고 1년이 채 안되었을 때는 언성이 높아진 적이 몇 번 있었다. 

사실 별 일도 아니었는데 그냥 서로 피곤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고 다행히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잘 지나간 것 같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이 좋은 부부였던 우리도 다툴만큼 아이를 키워보니 결혼도 큰 일이지만 육아는 너무도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내 나이대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딩크로 사는 것을 선호한다는데 육아의 고충을 주변 지인이나 SNS 등을 

통해 많이 접해본 영향도 분명 있을 것이다. 

특히나 돌봄노동을 해결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장 큰 고민이다. 


아이를 낳았다고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자. -중략-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봐주면 믿을 수 있고 좋지만 반대급부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제일 심각한 건, 내 아기가 내 아기가 아니고 부모의 아기가 된다는 거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소리가 지겹지 않나? '내가 너희 애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소리까지 듣고 싶은가? (pg 50-51)


집사람이 임신 전부터 일을 그만 둔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 해당되진 않지만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여자가 일을 그만 두고 애나 보라는 꼰대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느냐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되려 책 전반적으로 꽤나 페미니즘 시각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니 여성 독자라면 공감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해결책은 책을 통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내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돌봄노동 지원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개차반인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언급하고 싶다. 

맞벌이 부부면 어린이집 대기도 상위권에 들어갈 수 있고 돌봄 시간도 긴 편이어서 곧 죽어도 국공립 보내겠다는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어지간하면 다 들어갈 수 있다.  

다만 둘이 벌어도 벌이가 크지 않다면 둘 중 한 명의 소득은 돌봄노동에 투입되는 비용 빼고 나면 남는게 별로 없을 거라는건 사실이다. 


육아라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고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가족이란 전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누가 더 기여하고 덜 기여할 수는 있지만 기여도가 0인 경우는 없다.

하다못해 젊은 부부 옆에 가만히 누워 있는 백일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도 제 역할이 있다.

그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부부는 힘을 얻는다. 

새근새근 잠자는 아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젊은 아빠, 엄마는 낮에 있었던 힘든 일을 잊고 내일 다시 일할 기운을 얻는다. (pg 69)


자식이 생기니 왜 자식을 낳는지, 부부에게 자식이 왜 필요한지는 이제 조금 알겠다. 

나도 지금은 결혼 후 자식을 갖지 않는 부부들에게 경제적으로 많이 쪼들리는 것 아니라면 한 명 정도는 가지라고 권하는 편이다. 


문제는 자식이 부부와 함께 사는 시간이 대략 20년 전후일텐데 부부가 같이 사는 시간은 이보다 훨씬 길다는 것이다. 

자식 보며 사는 삶이 끝났을 때도 부부가 서로를 보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물론 지금 생각에서는 가능할 것 같지만 그 순간이 적어도 15년이나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때 내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또 내 배우자가 어떻게 변해있을지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저자는 이런 충고를 남겼다. 


둘이 딱 맞아서 안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아도 맞춰 가며 사는 것. 

이게 진짜 좋은 부부관계의 열쇠가 아닌가 싶다. (pg 220)


나는 불행한 동거보다는 행복한 별거를 종용한다.

혐오로 가득한 결혼생활을 하느니 자기애에 기반한 이혼 생활을 제시한다.

자기애가 먼저이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내도 자식도 사랑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행복해지고 싶은가?(결혼하고도?) 그렇다면 우선 당신 자신을 돌보라. 

나머진 모두 나머지다. (pg 263)


책이라는 공개적인 매체를 통해 부부 이야기를 담아 내서 그런가 저자의 아내에 대한 찬양과 미안함을 표현한 구절이 꽤 많다. 

책 분량이 긴 편이 아닌데도 그런 부분이 꽤 길게 느껴졌던 걸 보면 그 부분을 넣어야 했던 저자의 심정에도 

모종의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전작처럼 재밌는 문체와 생생한 사례들 덕분에 읽는 시간이 즐거운 책이었다. 

주제가 부부사이인만큼 인문학적 소양으로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시도도 별로 없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만하리라 생각한다. 

책을 읽은 직후에는 결혼생활을 좀 해본 중년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좀 더 생각해보니 그 때면 이미 늦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 같아서 젊은 부부들에게도 한 번쯤 권해봄직하겠다. 

단 하나 아쉬움이라면 전체적으로 분량이 좀 짧은 것 같아서 각각의 사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좀 더 들어갔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그 덕에 굉장히 빨리 읽을 수 있어서 좋은 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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