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상깊은 구절

기적 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pg 228)



문돌이인 주제에 유독 역사쪽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하면 흔히 '지루하다'라는 편견을 가지기 쉬운데, '누가 몇 년도에 무슨 일을 해서 이렇게 되었다.'라는 식의

서술이 쭉 이어지는 역사책이라면 당연히 재미가 없을 법 하다.

하지만 이 책은 특정 시대를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 것이 아니고, 역사의 특정 순간마다 주목할만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지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접하게 되었다.


출간된지 꽤 오래된 책이라 하는데 책을 덮고 나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일단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데 집사람이 책 제목을 보더니 '재미없지 않아?'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완전히 틀린 질문이었다.


역사책인 주제에 재미가 있다.

그 재미의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독특한 서술 방식이었다.

대체로는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당시의 시대상과 배경, 그리고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들의 심리적인 변화까지도 묘사해 두었다. 

이미 그 결과가 정해져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함에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쫄깃한 긴장을 느끼게 하는 작가의 마력 넘치는 문체가

일단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옳긴이의 글에서 작가가 인물 평전을 잘 쓰기 위한 전제로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글을 쓰면서 무엇에 중점을 두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인물들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살아있는 사람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 중략 -

 그러려면 역사가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역사가는 현 상황에 대한 지식을 가진 심리학자이기도 해야 합니다." (pg 379)


게다가 도스토옙스키 파트는 마치 서사시처럼 구성되어 있고 톨스토이 부분은 희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심리를 예측해서 시나 희곡으로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상당히 몰입감 있게 잘 구성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제목에 '광기'와 '우연'이 강조되어 있듯이 등장하는 총 14개의 스토리에는 인간의 광기와 운명의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흥미로운 역사들이

담겨 있다. 

생사가 오락가락 할 정도로 병을 앓는 와중에도 작곡을 놓지 않았던 헨델,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들여 기어이 영국과 미국 사이에 

해저 케이블을 연결하는 데에 성공한 사이러스 필드의 이야기에서는 역사를 빛낸 인물들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잘 엿볼 수 있었다. 


기적 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pg 228)


또한 처음으로 캘리포니아에 진출해 사업을 벌이다 우연히 발견된 금으로 인해 결국 파멸을 맞고 마는 서터의 이야기나

별 볼일 없는 평범한 군인이었던 루제 드 릴이 술자리에서 어쩌다 제의 받아 프랑스 국가를 작곡하게 되는 이야기에서는 

역사에 있어서 우연히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갖는 엄청난 파급력도 잘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후회해봤자 잃어버린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 인간의 삶에서나 역사에서나 마찬가지 이치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르친 것은 천 년을 들여도 되돌릴 수 없다. (pg 75)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 역사 속 인물들이 한 행동 기저에 어떤 심리가 있었고 어떤 우연한 상황이 겹쳤기 때문인지,

역사적 사실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접근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읽으면서 툭툭 등장하는 작가의 주옥같은 문장들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가는 아직 권력을 거머쥐지 못했을 때는 늘 본능적으로 자신의 나쁜 행위를 지지해 줄 사상가를 찾는 법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이 한심한 사상가를 밀쳐내면 그만이다. (pg 27)


평온한 시절에는 조심성, 복종, 노력, 신중함과 같은 시민적 미덕들이 큰 도움이 되지만 웅대한 운명의 순간이 오면 이런 미덕들은

불길 속에 맥없이 녹아내리고 만다.

웅대한 운명의 순간은 늘 천재만을 택해서 불멸의 형상을 부여하는 반면, 우유부단한 자를 경멸하며 밀쳐낸다. (pg 181)


1837년에 전보가 등장하면서 이제껏 분리된 삶을 살던 인류는 처음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세계사에서 중요한 해가 우리 교과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 교과서 저자는 아직도 어떤 장군이나 국가가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가 인류가 함께 진정한 승리를 거둔

이야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g 225-226)


책이 살짝 두꺼운 감이 있지만 총 14개의 각기 다른 스토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지루할 틈 없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수업 교재로 사용되는 책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의 책이면 수업 교재여도 학생들이 지루하지 않게 

역사를 공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