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파수꾼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올해는 작가의 책을 몇 권이나 읽게 될까 개인적으로도 궁금해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생일 기념으로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읽어보라며 건네받은 책인데 책의 발매일이 내 생일이라는 게 놀랍다.

물론 우연이겠지만 이런 우연들이 쌓여가는 것이 삶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 역시 우연한 만남이 쌓여 개인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클럽의 호스티스인 엄마가 누군지도 모를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태어나게 된 주인공 레이토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인생을 허비하다 절도죄를 저지르고 만다.

징역도 살게 되는구나 자포자기하고 있을 무렵, 자신에게 상당한 재력을 가진 이복 이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이모 덕분에 범죄 이력이 남지는 않게 된다.

그 대가로 한 사당에 있는 녹나무의 파수꾼 자리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나무가 소원을 들어주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는 설정이다.

물론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소원을 직접적으로 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 이 나무의 비밀을 파헤쳐 가는 것이 작품의 기본 뼈대라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감상을 어떻게 남기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는데 '인연'과 '기억'이라는 단어로 정리하면 어떨까 싶다.

가정을 꾸리며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깨달은 거지만 인생의 큰 줄기는 살면서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과의 만남은 전적으로 우연한 일이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는 오로지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레이토 역시 녹나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사연과 고민을 듣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움을 주며 그 스스로도 내면적으로 성장해간다.

그 과정에서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면면도 제법 흥미롭다.

부친의 외도를 의심해 뒷조사에 나서는 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자신에게 쏟아진 과도한 기대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포기해버린 한 천재 음악가와 그의 음악을 되살려보려는 동생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자신의 핏줄이 아님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친자식처럼 키운 아버지와 그의 유지를 성실히 잇고자 하는 아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것은 세대를 넘나드는 '기억'이다.

누구나 자식을 키우게 된다면 자신의 좋은 점만을 전수해 주고 싶어 할 것이다.

자신의 약점과 단점들은 되도록이면 닮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자식의 기억 속 나와 내 기억 속 나는 다르다.

이 작품에서의 기억 역시 이런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다.

판타지적인 설정으로 한 사람의 기억을 온전히 전수할 수 있지만, 원하는 부분만 똑 떼어 전수할 수가 없다.

결국 나의 약점과 단점도 모조리 전수되는 셈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 부모님의 모습도 그렇다.

그땐 그렇게 싫었던 모습이 나이가 들면 이해가 될 때도 있고, 어릴 땐 좋았던 부분이 크고 나면 부담스럽거나 귀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을 알게 모르게 모두 전수받아 우리는 또 살아가고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것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에둘러 쓰긴 했지만 550페이지에 이르는 짧지 않은 작품임에도 역시 흡입력도 있고 재미도 충분했다.

오랜만에 작가의 작품 중 누구도 살해되지 않은 작품을 읽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처럼 현실과 소소한 판타지가 만나 있으면서 재미와 감동 포인트가 있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짜감정
김용태 지음 / 미류책방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보다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면 인간관계가 달라진다'라고 적힌 부제가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분노나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을 때 참으라고 한다거나 그저 울지 말라고 다그치는 등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행동을 하기가 쉽다.

그러다 책 부제를 읽고 문뜩 '내가 너무 아이의 감정을 억압하며 키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자신부터가 감정 표현에 그리 익숙하지도 않기도 하고 말이다.

저자는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삶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묵혀둔 감정은 우리의 정신건강은 물론이고 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감정은 느끼고 표현되지 않으면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쌓여 호시탐탐 밖으로 나올 기회를 엿보거나,

제발 자기를 알아 달라고 떼를 쓴다.

(pg 5)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슬픔, 분노, 두려움, 불안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표면 감정이며 그 이면에는 수치심이라는 근원적인 감정이 숨어있다고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나오게 마련인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촉발한 이유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근원적인 이유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의 무의식 속에 있는 근원적인 어떤 것이 타인의 언행으로 인해 건드려지면 부정적인 감정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똑같은 언행이라 하더라도 내 기분 상태에 따라 화가 날 때도 있고, 그냥 넘어가질 때도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감정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화가 나고 분노한 감정은 결국 내 것이다.

상대방의 자극에 의해서 화가 난 것이긴 하지만

상대는 자극을 했을 뿐 화가 난 것은 나 때문이다.

내 안의 분노, 열등감, 외로움 등이 건드려지면서 화가 난다.

(pg 63)

상대방이 자극한 강도가 세면 셀수록 그것은 나의 중심에 가까운 것이 건드려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열받게 한 그 상대방에게 "당신 덕분에 내가 어떤 감정에

짓눌리고 있는지 알게 됐다"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pg 67)

부정적인 감정이 대체로 인간관계에서 나온다고 해서 타인과 교류하지 않으면서 살 수는 없다.

게다가 진짜 고립되어 생활한다 해도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히키코모리들이 마냥 행복할 것이라 생각되지 않듯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고 올바르게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상담을 하며 개발한 7단계의 감정 조절 훈련을 제안한다.

물론 그 모든 단계를 개인이 혼자 수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첫 번째 단계인 '느낌 알아차리기'와 2단계인 '느낌 표현하기'까지만 연습해도 자신의 감정을 보다 수월하게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에 '짜증이 난다', '화가 난다' 등 단순하게 생각하는 감정이지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진짜 무엇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행위 만으로도 그 감정에 휘둘리는 시간이 짧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모두 단독자들이다.

서로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두 단독자 사이에는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인간은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pg 102-103)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내가 지금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이다 보니 아이에게 앞으로 부정적인 감정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하되 감정에 지배되지 않도록 잘 들어주고 감싸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는 다짐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워낙 화가 많은 사람인지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최대한 느끼지 않도록 해주면 좋겠지만 사람이 살면서 긍정적인 감정만 느끼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훨씬 현명한 길인 것 같다.

어떤 감정을 느끼든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부정적 감정이든 긍정적 감정이든 감정을 느끼게 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감정에 얽매여 왜곡된 삶을 살지 않으려면,

역설적으로 어떤 감정이든 환영해 주고 돌봐 줘야 한다.

(pg 241)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사는 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감정을 경험하는 것과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려면 감정들이 주는

메시지들을 잘 읽어야 한다.

(pg 266)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금기시되는 사회다 보니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 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의 수도 점점 늘어나는 게 아닐까.

나 자신부터도 감정을 좀 더 솔직하게 직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고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보일 때에도 책을 읽기 전보다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습 자본주의 세대 - 88만원 세대는 어쩌다 영끌 세대가 되었는가?
고재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책 내용을 너무나 잘 요약하고 있는 책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저자가 쓴 책이어서 공감대가 클 것 같았다.

현 정권을 탄생하게 한 배경이자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제1관심사는 역시나 부동산이다.

주거비가 생활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고 있다는 소식은 언론에서도 지겹게 듣을 정도로 집값이 개인의 재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따라서 '집 혹은 집값의 상당 부분을 부모에게 지원받을 수 있는가'는 이제 신분을 가르는 질문이 되었다.

어지간히 이름이 알려진 직장을 가졌다고 해도, 전문직에 종사한다 치더라도 노동소득만으로 집을 장만해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부동산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자료도 꽤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를 예로 들면 82년생을 기점으로 '자가'에 사는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집값은 워낙 고액이라 재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그러니 주거 사다리를 자산 증식의 사다리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 중략 -

지금은 다단계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일을 하는 서른도 사다리를 찾지 못해 아우성이다.

노동으로 모은 종잣돈만으로는 계층 이동에 성공할 수 없다.

바야흐로 세습 자본주의의 막이 올랐다.

(pg 28)

제목에 '세습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있어서 경제 이론들이 난무하는 책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 책은 사실 86년생 저자가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세대 담론을 나열한 에세이집에 가깝다.

그 핵심에는 언론에서 MZ세대라며 80년 이후 출생자들을 손쉽게 묶어 통칭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가만히 나눠보면 그 특징과 성장 배경, 처한 환경이 꽤 이질적이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같은 MZ세대 안에서도 무겁게는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 규모로 나눌 수도, 가볍게는 슬램덩크를 만화로 먼저 본 세대와 애니를 먼저 본 세대로 나눌 수도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거리 응원이 가능했던 세대와 그렇지 못했던 세대로 나눌 수도 있겠다.

물론 세대를 세세하게 나누는 행위 자체가 사회학적으로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세대가 가진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려면 우선 세대를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됐든 저자는 나와 같은 80년대생으로서 80년대생이 어떤 삶을 살아와야 했는지를 담담하게 풀어 놓는다.

입시 경쟁을 뚫고 들어간 대학, 그 대학을 나와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88만원 세대라는 꼬리표가 붙는 삶.

누구는 영끌이라도 강남권에 입성이 가능하고 누구는 끌어모을 영혼조차 없는 삶.

국가는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 중략 -

구조와 환경, 정책이 제공하는 경제적 사다리 따위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금수저가 아닌 사람이 기댈 언덕은 없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나의 삶은 일그러진다.

우리는 뉴밀레니엄의 삶에서 그걸 배웠다.

(pg 87)

언론인이 쓴 에세이 같은 느낌의 책인지라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비중이 컸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인터뷰도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전 직장을 졸업한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윤석열의 지지자로 변화된 후 가진 인터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조희연의 제자, 윤석열의 지지자'라는 제목이 붙은 이 인터뷰는 현 민주당의 씁쓸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인 정치 성향상 이해가 가는 행보는 아니다.)

이쯤에서 책을 읽을 사람들 중 혹시 오해할까 하는 말이지만 딱히 특정 정당을 옹호하기 위한 인터뷰는 아니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해도 국민의힘을 지지하지는 않을 내가 읽기에도 그리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혹 정치 성향이 다르더라도 걱정 말길 바란다.

게다가 저자가 대학 시절 읽었던 책들이 소개되는데 이 책들의 면모만 보더라도 저자가 현 진보 세력에 대해 상당한 애증의 시각을 갖고 있지 않은가 싶다.

이래저래 지금 80년대생들이 꽤나 힘들게 산다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징징대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진보와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보수로는 설명하기 힘든 지금 30대의 복합적인 정치 성향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도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현재 30대가 보이는 진보적 무당파 성향의 기원이

2000년대 대학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비운동권을 지지했던 망탈리테가 뿌리 깊게 남아 있다고 본다.

이들은 대학 시절부터 북한 문제에는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보다 보수적이었으나,

비정규직 등 경제 이슈에 대해서는 진보 성향이 강했으며,

복지에 관해선 양대 정당의 노선보다도 전향적인 인식을 가졌다.

또 민주화의 성취를 높게 평가했던 세대였다.

(pg 185)

노동시장에서 우리 처지가 비참해졌다고 소리내어 외치면서도

그 노동시장의 한편에 자리한 현실은 외면했다.

세상이 '88만원 세대'의 삶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지금 88만 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는 눈을 감았다.

(pg 299)

사실 대한민국에서 불평등을 논한다는 것은 이젠 식상할 정도로 너무 당연한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대론 역시 그리 신선한 주제는 아닌지라 읽기를 망설였던 책이었지만 확실히 같은 80년대생이어서 그런지 저자의 개인적인 삶의 궤적이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고 책 내용 중에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었다.

세대와 세대 간에는 또렷한 경계선이 있다.

'부장 세대'는 아랫세대를 칭찬할 때 이렇게 말한다.

"그 친구, 참 괜찮더라. 요즘 애들 같지 않아."

요즘 애들 같지 않아야 인사고과를 잘 받는다.

(pg 167)

공감은 공감이고 지금 젊은 세대가 증여 없이 자신의 삶을 일구는 것이 어려운 것은 기정사실이다.

뾰족한 대책이 있을법한 주제도 아닌지라 읽고 나서 방향성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책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가 지금 젊은 세대에 다시금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짜 이대로는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소멸하는 국가가 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빈곤의 가격 - 원자재 시장은 어떻게 우리의 세계를 흔들었는가
루퍼트 러셀 지음, 윤종은 옮김 / 책세상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제가 'Price wars', 즉 가격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다.

여기에서의 전쟁이란 기업들이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벌이는 경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전장을 의미한다.

저자는 원자재 가격이 치솟을 경우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 경제적으로 취약한 곳에서 실제 분쟁이나 내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들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 책을 썼다.

저자는 원자재 가격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요와 공급' 측면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원자재를 대상으로 한 선물 투기 등 금융 파생상품이 원자재 가격 상승에 미치는 영향이 크며 이 대가가 고스란히 원자재 생산국에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모술을 폐허로 만든 파괴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매매된 파생상품의

마법이 나비 효과를 일으킨 결과다.

워런 버핏이 '금융의 대량살상무기'라 칭한 파생상품은 말 그대로

포탄과 박격포, 미사일과 수류탄으로 바뀌었다.

(pg 117)

책에서 주목하는 원자재는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곡물 등의 식량이다.

세 가지 모두 의식주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가격 변동이 사람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품목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원자재 가격의 급격한 변동이 아랍의 봄과 이라크 내전, 브렉시트, 최근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원자재 수급의 변동 폭이 커질 경우 발생하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한 선물 투자는 점차 원자재 생산자와는 전혀 관계없이 숫자를 놓고 돈놀이를 하는 거대한 도박장이 되었다.

저자는 이 시장에서 생산되는 가치는 제로인 반면 부는 굉장히 신속하면서도 불균등하게(원자재 생산 국가에서 금융 선진 국가로) 이전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원자재 생산국의 평범한 국민들이 생활고라는 형태로 견뎌내야 한다.

시장의 혼돈이 현실의 혼돈을 낳고, 이것이 다시 시장의 혼돈을 키우면서

현실과 시장 사이에 놀라운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졌다.

언론, 알고리즘, 자원의 저주 등 혼돈을 증폭하는 여러 장치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가격이다. 가격은 다른 모든 장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pg 133)

이들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알샤바브나 IS 등의 무장 단체들에 끊임없이 새로운 인력이 충원되는 것도 생활고에서 출발한다.

굶어 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힘으로 빼앗는 쪽에 서다 죽겠다는 판단이 들면 이들 조직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온갖 음모와 선전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도 지울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 있다.

바로 돈이다.

(pg 199)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 해당 원자재 생산국이 비약적인 수익을 얻을 경우에도 문제는 발생한다.

해당 지역의 정치적 기반이 워낙 불안정하다 보니 갑자기 돈이 생기면 우선 군대부터 증강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자재 가격이 급변할 경우 원자재의 보유 자체가 하나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겠다고 마음먹은 데에는 러시아가 가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중요성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격 전쟁은 국가가 제 앞가림도 못할 만큼 약하거나

이웃 나라에 싸움을 걸 만큼 강해질 때처럼 양극단의 상황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가격 전쟁이 발발한 배경에는 금융 투기가 있었다.

(pg 207)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자재의 가격 변화가 사람들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니 해당 국가들의 분쟁이나 전쟁에 직접 뛰어들어 살상을 일삼은 자들이 비난받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못지않게 책임이 있는 거대 헤지펀드들은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저자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피가 묻어 있다.

헤지펀드들은 각지의 식량 가격을 끌어올려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알샤바브는 소말리아의 식량 가격이 오르자 사람들이 궁핍해진 상황을 기회로 삼아

더욱 잔혹한 일을 벌였다.

그러나 헤지펀드와 알샤바브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알샤바브는 민간인의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반면 가격 급등을 유발한 금융 투기자들은 아무런 질책이나 비난을 받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들에게 정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pg 313)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시장에 아무런 규제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이름은 찬란히 빛나고 있고 자본은 국경도 규제도 없이 그저 스스로의 몸집을 불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정치인과 중앙은행들은 금융 카지노의 중심에 있는 룰렛이

쉬지 않고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 중략 -

그들은 사람들을 실업과 압류, 부채의 늪에 빠뜨려 더 빈곤하게 만들고 가난한 나라들을

파산과 붕괴, 혁명과 전쟁 상태로 몰아가는 방식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인플레이션의 대가는 이번에도 힘없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pg 409)

선물이나 옵션이라는 금융 개념 자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발생하는 나비효과를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데, 저자는 최대한 전문 용어 없이 자신이 직접 전장을 찾아다니며 오감으로 체험한 경험을 알기 쉽게 전달함으로써 이 나비효과를 우리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문장에 현학적인 느낌이 거의 없기 때문에 400페이지가 조금 넘어 살짝 두꺼운 느낌을 주는 책이지만 어려움 없이 술술 읽혔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금융의 칼이 실제 인간의 삶을 도륙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시장은 오로지 숫자로 표현되는 가상의 재산(실제 화폐조차도 아닌)을 다룰 뿐이지만 그 시장이 가져온 고통은 같은 인간의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어스 - 기만의 시대, 허위사실과 표현의 자유 Philos 시리즈 17
캐스 선스타인 지음, 김도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넛지'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유명한 캐스 선스타인이 이번에는 가짜 뉴스에 대한 책을 냈다.

국내에서도 정치나 연예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가짜 뉴스 논란이 뜨거운 상태라 저자가 어떤 논조를 펼쳐 냈을지 궁금했다.

몇 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타일러가 미국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른 외국인들과 토론을 했던 내용이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닌다.

이 방송에서 타일러는 미국이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가짜 뉴스나 비방, 심지어는 혐오 표현이라 하더라도 이를 법으로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쳐 화제가 됐었다.

(이 책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궁금한 사람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Wy7LcYrxFgE)

타일러가 미국인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개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미국인들의 보편적인 자유관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이면에는 아래와 같은 전제가 깔려 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부가 허위사실을 처벌하거나 차단하려고 할 때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허위사실이 아니라 반대 세력이었다.

(pg 105)

저자는 미국인들의 이러한 신념의 근간이 된 몇몇 사건들의 연방 대법원 판례들을 소개하며 현재 미국이 이러한 신념을 가지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해당 판례들이 벌써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가짜 뉴스를 비롯한 허위사실의 유포를 지금처럼 계속 방관해도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사건' 판결이 내려진 때가

1964년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중략 -

오늘날 명예를 훼손하는, 아니면 파괴적인 발언을 유포하는 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쉽다. - 중략 -

기술의 변화를 생각할 때, 그 판결이 오늘날의 적절한 가치를 조화시킨

최선의 방식을 담고 있다면 오히려 기적일 것이다.

(pg 170)

물론 논지를 전개하기 전에 '허위 사실'이라고 하는 것의 정의부터 꼼꼼하게 고찰한다.

우리가 인사치레로 하는 하얀 거짓말도 넓은 의미에서는 허위 사실이지만 이를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규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허위 사실에 고의성이 있는지(당사자의 의식 상태), 해당 허위 사실로 인한 해악의 크기와 발생 가능성, 발생 시기 등 허위 사실의 규제를 위해 고려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지점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각 국가마다, 문화마다 모든 허위 사실을 규제하는 것과 허위 사실을 전혀 규제하지 않는 것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게 되는데 미국 사회는 현재 규제하지 않는 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는 것에 저자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 제기의 근원은 역시나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허위 사실이 전파되는 속도와 범위가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또한 해당 정보가 거짓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반복된 거짓 정보는 정보 수신인의 의사결정에 여러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많은 연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때문에 허위 사실에 대한 규제가 너무 느슨한 것은 표현의 자유는 보장할 수 있지만 오히려 민주주의의 건강성은 저하될 수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책의 중반까지 허위 사실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과 여러 연구 사례들을 공유한 뒤 저자는 아래와 같이 기준점을 하나 제시한다.

허위사실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위험이 있고, 표현의 자유를 좀 더 보장하면서도

그런 해악을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을 정부가 증명할 수 없다면,

그 허위사실은 헌법적 보호를 받는다.

(pg 125)

영문을 번역한 글이라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하기 다소 어렵지만, 쉽게 말하면 해당 허위사실의 해악이 크고 정부가 규제 외에는 그 해악을 막을 방법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건에 한하여 규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저자의 기준점 역시 국내법에 비하면 매우 소극적인 기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사실을 적시했다 하더라도 명예훼손으로 처벌이 가능하니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는 과도하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적어도 혐오 발언이나 심각한 타격을 주는 가짜 뉴스를 민형사상으로 처벌할 수는 있으므로 저자의 기준점보다는 허위 사실을 보다 더 폭넓게 규제하는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해당 기준점을 실제로 적용할 때는 위에서 언급한 의식 상태, 해악의 크기와 발생 가능성, 발생 시기별로 나누어 다양한 규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또한 정부뿐 아니라 온라인을 주도하고 있는 SNS 플랫폼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규제들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해당 규제에 공지나 알림 표시 등 우리 정서로 볼 때엔 '이게 규제인가?' 싶은 조치들도 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수호해 온 미국의 정서로는 저자가 제시한 매우 소극적인 범위의 조치조차도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법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아래의 문장으로 단호하게 책을 끝맺고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이 현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pg 216)

자유와 책임은 상충되는 가치이기 때문에 어느 선에서 규정하느냐는 나라와 문화, 역사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일 시기에 미국에 떠돌던 헛소리들이 우리나라 웹 커뮤니티들에 소개되면서 선진국이라 믿어왔던 미국의 이면이라는 반응들이 많았지만 실은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다만 그 헛소리가 인터넷을 타고 흐를 때 어느 선에서 규제를 받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책은 그 경계선을 어느 지점으로 설정할지를 나름대로 사고해 보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다분히 미국인의 입장에서 쓴 미국 사회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책인지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의 울림을 줄 수 있을지는 물음표가 남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