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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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다소 긴데 쇼펜하우어가 생전에 쓴 수많은 글 중에 인생에 지침이 될만한 짧은 글들을 묶어 낸 책이라 보면 되겠다.

그의 철학이 '염세주의'라는 단어로 대표되기는 하지만 최근에 읽은 책들로부터 그의 철학이 욕구 그 자체로부터의 자유로움을 강조했으며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 사상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따위 세상 다 같이 죽어버리자'라는 의도의 사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염세'라는 단어가 붙게 된 이유에는 다분히 서양학자들의 시선에서 본 편견이 큰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여하간 그의 철학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꽤 많은 울림을 주는데 막상 그의 저작들을 읽으려면 굉장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아포리즘이라는 짧은 형식으로 독자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춰주는 책이 나온 것 같아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보게 되었다.

엮은이는 고통받는 현시대의 젊은이들이 절망을 새로운 삶의 철학으로 승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법한 글들을 골랐다고 한다.

그 목적에 충실하게 그의 대표작들뿐 아니라 일기나 편지의 비중도 커서 그의 철학 저서들보다 훨씬 그의 삶에 더 가깝게, 그래서 우리의 삶에도 더 와닿게 느껴지는 글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짧은 글들이 여럿 엮여있는 터라 공통된 주제를 뽑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먼저 그의 철학이 단순히 '염세주의'라는 단어로 요약하기 힘든 이유를 잘 보여주는 글들이 많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의 삶을 대변하듯, 열심히 주어진 삶을 살아내라는 그의 메시지는 '염세'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내를 그대의 의복으로 삼아라.

의복을 벗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지리라. - 중략 -

신념을 그대의 양식으로 삼아라.

육신의 굶주림으로 고통받지 않게 되리라.

신념을 잃은 인간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다.

실패하고 낙오하는 자들은 대게 참을성이 부족하거나 신념을 갖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던 사람들이다.

(pg 38)

우리는 항상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삶이 허락된 이유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죽음의 준비는 오직 이것뿐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

두려움과 아쉬움과 남겨진 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의 눈치만 보던 우리들이

당당하게 죽음과 대면하여 공포도, 후회도, 근심도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것.

(pg 48)

거의 200년 전의 철학자지만 그의 통찰은 현재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인간의 사회라는 것이 발전한 과학 기술을 제외하면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아래의 구절들은 현대의 지식인이 썼다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일 정도로 지금의 사회를 잘 설명하는 듯하다.

오늘날 체면과 명예가 그 사람의 전부인 양 절대적인 대접을 받는 이유는

이 시대의 인간관계, 혹은 권위와 신분이 편견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체면을 중시하는 까닭은,

내세울 인간성이 직분에서 얻은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다.

능력이 없으니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도 못하고, 그런데 또 권력은 욕심나고,

그러니 스스로 자기 이름에 금칠을 해버리는 것이다.

(pg 34)

계층과 계층이 분열되고, 세대 간의 의사소통은 오래전부터 단절되었다.

한 국가 안에 여러 개의 국가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부자들의 나라, 가난한 자들의 나라, 늙은이들의 나라, 젊은이들의 나라가

쉴 새 없이 충돌하고 비난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pg 193)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인상적인 글들도 많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좌절과 고난을 겪게 될 텐데 그럴 때 힘을 줄 수 있을 구절들도 많아서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힐링'이라는 단어가 그리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지만) 읽으면서 힐링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불행이 터졌을 때보다 불행이 지나간 후가 더 중요하다. - 중략 -

불행은 그 자체로 징계다.

불행이 이미 지나갔는데 자기 징계를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비극이 된다.

(pg 152)

스무 살 이후 멈춰버린 몸의 성장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성숙이 필요하다.

정신의 성숙이란 의지로써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20년간 형성된 의지의 표상으로 이후의 5~60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수학의 기본개념만 깨우쳐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성장 이후의 성숙이 필요한 까닭이다.

(pg 203)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군주와 같다.

그는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자신의 성을 지켜내고, 독립된 지위를 누리고,

그에게 명령하는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의 삶은 스스로 판단한다.

(pg 216)

250 페이지 정도로 얇고 짧은 글들의 모음이라 읽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책은 오래 두고 생각날 때 한두 개씩 읽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각 글마다 어느 저서에서 발췌했는지를 기재해 두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 하나를 제외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맛볼 수 있어 만족스럽게 읽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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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죽음
호세 코르데이로.데이비드 우드 지음, 박영숙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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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인터넷에 떠돌던 '혼돈의 카오스' 같은 제목인데 나름 심오한 뜻이 있다.

과학기술의 기하급수적인 발달이 인류로 하여금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할 수 있게 될 날이 곧 오리라는 내용의 책이기 때문이다.

삼단논법의 가장 유명한 예시가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대전제로 시작될 만큼 인간과 죽음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이를 과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라 흥미가 생겼다.

저자는 자연에 이미 수명이 굉장히 긴 생물들이 존재하고, 우리 몸속의 생식세포 역시 노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들며 '노화'라는 것 자체가 극복 가능한 질병으로 취급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곤충이나 작은 설치류 등의 동물 실험에서 이미 적게는 2배, 길게는 4-5배 이상 수명을 증가시킨 실험들을 소개하며 이러한 결과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노화를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은 질병 자체를 치유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 막대한 자원을 노화의 증상이 아닌 원인에 투입하게 해 줄 것이다.

(pg 106)

책을 읽기 전에는 노화가 만약 과학으로 극복 가능하다 하더라도 일론 머스크나 빌 게이츠 같은 부자들만 영생을 누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러움을 느끼며 죽어가는 선택지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반박들에 저자는 스마트폰이나 가정용 컴퓨터처럼 우리가 지금은 너무도 당연하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과학기술들이 개발될 당시만 하더라도 인류가 보편적으로 사용할 것이라 기대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노화에 대한 치료 역시 일부 부자나 권력자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암이나 치매 등 보통 노화와 함께 발생하는 질병들은 완치하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이러한 '증상'들에 투입될 자원을 노화라는 '근원'에 투입하여 원인 자체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이 부분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분야에 자금이 집중적으로 투입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 분야의 발전이 경제적으로도 시장 가치가 매우 클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에 유망한 투자처라는 주장에도 꽤 무게를 싣고 있다.

전 세계 의료비 지출이 매년 약 7조 달러에 달하며,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떠올려보자.

안타깝게도 거의 모든 지출이 삶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 이루어지며, 그럼에도 환자는

상태의 반전 없이 결국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지출에 따른 효과는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체 의료 시스템을 재고해야 하며,

그 결과 마지막에 지출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g 229)

인류가 노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근거는 생각 외로 간단하다.

반도체의 성능이 2년마다 2배씩 증가하는 것처럼 의학기술도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의 기대수명이 늘어나는 시간도 점점 더 단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술 발전으로 인한 기대수명의 증가 속도가 우리의 노화 속도보다 빠른 순간에 다다른다면 이론상으로 인류는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수명 탈출 속도는 기대수명이 수명이 경과하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연장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수명 탈출 속도에 도달하면 기술 발전으로 인해

기대수명이 매년 1년 이상 증가할 것이다. - 중략 -

커즈와일에 따르면 2029년까지 우리는 수명 탈출 속도에 도달할 것이다.

이는 그 순간부터 우리가 무기한으로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pg 161)

저자가 구체적으로 전망하는 노화 극복의 타임라인은 아래와 같다.

물론 일반적으로 걱정하듯이 여러 기계와 호스에 목숨을 저당잡힌 채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수명의 연장이 아니라 진짜 노화의 극복, 즉 정신과 육체가 온전히 기능하는 수명의 연장을 뜻한다.

인간 노화 역전을 위한 최초의 생명공학 치료법이 2020년대에 상용화되고,

2030년에는 나노기술 치료법이 등장하며,

2045년에는 노화를 완전히 제어하고 역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pg 285)

이후에는 우리가 아직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려 하지 않는 관념적인 부분에 대한 반박들이 이어진다.

많은 근거들이 제시되지만 그 근거 속의 논리는 대동소이하다.

결국 기술은 진보할 수밖에 없고, 그 과실을 목격하기 시작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바꿔서 '죽음을 인류의

가장 큰 적이자 끔찍한 적이지만, 우리가 물리칠 수 있는 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이성적인 두뇌와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죽음의 죽음'에 도달할 것이다.

(pg 229)

기본적으로 과학과 기술 발전에 호의적인 시각으로 쓰였기 때문에 죽음을 초월하는 것에 얽힌 도덕적 논의가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았다.

좀 더 거칠게 표현하면 아직도 이 주제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은 그저 '덜 깨인' 사람일 뿐이라는 접근법인지라 읽은 이에 따라서는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기술 발전의 혜택을 보편적으로 누릴 수만 있다면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인류의 역사상 불평등은 계속 존재해왔고, 이미 소득과 기대수명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 분야의 과실이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체감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상해 볼 뿐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사람들의 관념 변화 속도보다 월등히 빠르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 야기할 수 있는 여러 사회문제들에 대처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도 생각해 볼 문제일 것이다.

솔직히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사람이 영생을 누릴 시대가 과연 내 생전에 올까 싶은 의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생전에 그런 기술을 만나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보다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내가 그 기술의 수혜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 더 두려울 것 같다.

참고문헌 목록을 제외하면 약 350페이지 정도로 얇지 않은 두께이지만 저자들의 의견이나 주장보다는 이곳저곳에서 발췌한 사례나 인용문이 많아 생각보다 금방 읽히는 느낌이다.

기대한 것에 비하면 정보의 양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달리 말하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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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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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이자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자서전이 나왔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보게 되었다.

그를 최고의 작가라 칭하면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다작을 하는 성실한 작가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워낙 작품이 많아 개중 실망스러운 작품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뛰어난 상상력으로 읽는 재미만큼은 보장된 작가라는 생각이다.

이 책은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작가로서 살아가게 된 전반의 이야기를 특유의 문체로 재미나게 들려준다.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평범하게 시간 순서대로 엮어낸 것이 아니라 타로 카드의 아르카나로 운을 뗀 후 각 카드의 의미에 그가 만났던 사람이나 상황을 대입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주요 작품들이 어디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하게 되었는지, 등장인물들의 실제 모델이 있다면 누구였는지 등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평소 그의 책을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반가워할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의 팬들뿐 아니라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집필 습관이나 영감의 원천 등 참고할 만한 부분이 상당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하기보다 보여 주는> 이야기가 좋은 소설이다.

이를 위해 설명적인 대화는 최소화하고 상황만 독자에게 제시해

스스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pg 259)

작가의 삶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그의 끊임없는 관찰과 기록하는 습관이었다.

매일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해 스케줄을 정해놓고 정해진 시간에 항상 글을 쓰는데 그 일과 중에 꿈을 기록하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재밌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삶조차도 관찰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나는 현실을 일종의 영화나 비디오 게임처럼 대하는 습성이 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내가 내 삶을 멀리서 바라보는 구경꾼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pg 16)

자서전이라고 해서 자신의 성공적인 업적만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자신의 지병부터 시작해 실패했던 경험, 실수했던 일들은 물론 실패한 결혼까지도 언급된다.

그는 그 모든 경험들에서 배울 점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타로에 <나쁜> 아르카나는 없다.

장애물 경주에서처럼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무수한 시련이 있을 뿐이다.

그냥 실패하고 끝나는 일은 없다.

<성공하거나 배우거나 둘 중 하나>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pg 396)

전생 체험이라던가 최면, 명상을 통한 유체이탈 경험 등 믿기 어려운 경험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마다 다르겠으나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상상력이 뛰어난 편에 속할 테니 경험하는 부분도 남다른가 보다.

나는 우리가 모닥불 앞에 모여 앉은 부족원들에게 스릴 넘치는 사냥 이야기, 전투 이야기,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던 선사 시대 사람들을 비롯한 선조 이야기꾼들로부터

<이야기>라는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새삼 깨달았다.

작은 설화 하나에 공동체 전체의 긴장을 풀어 주고 구성원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다고,

그것이 종국에는 집단 정체성의 바탕을 이룬다고 나는 확신한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함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동질감이 싹트는 것이다.

(pg 92-93)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나이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작가가 61년생이니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벌써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겼다.

물론 작가라는 직업에 은퇴라는 개념은 없겠지만 그리 젊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작품을 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개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 이후의 작품들이 '개미' 이상의 놀라움을 안겨주지는 못하는 느낌이지만 그의 창작 활동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더 놀라운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의 작품은 많이 읽었었지만 작가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번 책을 통해 뭔가 작가와 더 가까워진듯한 느낌이 들어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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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캐너 다클리 필립 K. 딕 걸작선 13
필립 K.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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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자의 단편집을 읽은 후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장편 중 하나를 읽어보게 되었다.

제목이 음차라 무슨 의미인지 한 번에 잘 와닿지 않는데 '어두침침한 스캐너'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무언가를 통해 특정 대상을 관찰할 때, 아무리 해상도가 좋은 기계를 쓰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하려 노력한다 하더라도 본질과는 다른 무언가를 관찰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제목이다.

저자가 생전에 약물 중독으로 상당한 고생을 했는데 이 책은 그런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반-마약 소설이다.

주인공은 마약을 제조, 유통하는 거대 조직을 쫓기 위해 스스로 마약 중독자 행세를 하는 잠입 수사관이다.

설정상 공식 석상에서는 특수한 수트를 입어 외부에 자신의 외모와 목소리가 노출되지 않도록 하며 이름도 '프레드'라는 가명을 쓴다.

그리고 수사를 위한 나머지 시간에는 '밥 아크터'라는 이름의 약물 중독자 행세를 하며 다른 중독자 친구들과 함께 생활한다.

중독자 행세를 하려면, 또 진짜 유통망에 접근하려면 자신도 마약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지라 신중하고 더디게 수사를 진행하던 중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던 차에 그가 속한 조직에서도 그의 집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며 그의 집에 스캐너를 설치하게 된다.

즉 자기가 스스로를 감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후에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중생활과 약물의 영향이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수사를 하는 프레드와 약물 중독자인 아크터의 인격이 나누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저자 본인이 약물 중독으로 고생한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중독자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언어 습관이나 행동들이 얼마나 기괴하게 변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습을 감춰주는 수트나 홀로그램으로 재생되는 스캐너 등이 등장하긴 하나, SF적인 느낌보다는 마약이 지배한 세상을 그려내는 것에 더 치중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인간이 주변 환경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자아라는 것이 필요한데 마약은 이 자아라는 개념 자체를 무너뜨린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역시 자신이 했던 말이나 행동을 기억 못 하는 것에서 시작해 종국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서서히 잊어간다.

숨은 쉬고 배설은 하지만 '살아 있다고'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 있는 스토리인지라 결말은 언급하지 않겠으나,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라는 점은 알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죽은 사람에게는 미래랄 것이 거의 없다고, 마이크는 생각했다.

보통은 그저 과거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아크터-프레드-브루스에게는 과거조차 남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현재뿐이다.

(pg 427)

저자는 한번 마약으로 뇌가 망가지면 다음 기회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 강조한다.

물론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몰래 술이나 음식에 탄 것을 모르고 섭취하는 등)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범죄의 희생양이 된 케이스도 있을 수 있을 테지만, 어떻게든 약물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그 즉시 멈추고 치료 방법을 찾아야만 자신을, 자아를 지켜낼 수 있다.

"묵직한 것은 세상에 오로지 삶뿐이니." 배리스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단 하나뿐인 묵직한 여정이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덤에 이르는 여정.

모든 인간과 생명이 겪을 수밖에 없는 여정."

(pg 166)

도파민에 절여진 뇌는 행복감을 느끼지만 그 행복감을 지속하려면 더욱 많은 약물이 필요해지고 결국 뇌도 파괴되고 만다.

망가진 뇌는 행복을 감지해야 할 주체인 자아를 지워버린다.

대한민국 역시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닐지 모른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는 지금, 1977년에 출간된 이 책이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충분한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찰나의 행복 끝에 얻어지는 것은 텅 빈 자아와 타버린 뇌 뿐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렇겠지만 스토리 자체의 재미도 충분한 작품이므로 더워지는 날씨에 시원한 실내에서 부담 없이 읽기에 좋은 소설을 찾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2006년에 이미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주연이 무려 키아누 리브스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영화로도 이 작품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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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양철북 청소년문학 7
줄리아 월튼 지음, 이민희 옮김 / 양철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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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천안문 이야기라도 하려는 건가 싶은 제목을 가졌지만 핑크빛 가득한 표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 10대 청소년들의 성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도 참 재미난 것이 한쪽에서는 카디 비 같은 가수들이 자신의 성기를 자랑하는 노래로 큰 인기를 누리는데 다른 쪽에서는 10대들의 성 관련 이야기를 '쉬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존한다는 것이다.(하기야 카디 비 본인도 자식에게는 자기 노래를 들려주지 않는다고는 하더라만은)

그런 모순 넘치는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통통 튀는 10대 여성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되겠다.

주인공은 피비라는 여학생으로 학내 언론사에서 활동하며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라는 설정이다.

하지만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제2의 아이덴티티가 있는데, 바로 성 관련 지식들을 전달하는 한 블로그의 운영자라는 것이다.

사는 곳이 보수적인 동네인지라 익명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실수로 인해 글 쓴 위치가 노출되어 피비가 사는 동네에 그 블로그 운영자가 산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를 시장 후보자이자 극렬 보수주의자인 리디아 브룩허스트라는 여성이 알게 되면서 둘의 갈등이 시작된다.

리디아는 시장 후보이면서 동네의 유력 인사로서 불순한 사상을 전파하는 블로거에게 신상을 드러내라며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일개 학생 신분일 뿐인 피비가 이에 맞서 10대들에게도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야 하며, 자신은 의료적인 정보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라는 명분으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 주요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에 피비가 좋아하는, 또 피비를 좋아하게 되는 동료 남자아이들과의 파릇파릇한(?) 사랑 이야기가 더해져 그리 무겁지 않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들을 제법 많이 던져준다.

일단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올바르고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룬 이야기여서 흥미로웠다.

어차피 인터넷을 통해 모든 정보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 오히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판타지인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본다.

비단 성 관련 지식뿐 아니라 정치, 노동, 젠더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균형 있는 정보를 충분히 주는 것이 출처가 불분명한 가짜 뉴스들을 접하면서 편협한 시각을 갖게 되는 것보다 사회에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이 정보가 불편한 건 올바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말하기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우리 할머니가 가끔은 실렌시오 인코모도,

다시 말해 '불편한 침묵'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지.

그리고 그저 지켜보라고. 그러면 사람들은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몰라.

때때로 불편한 침묵이 우리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pg 161-162)

요즘 나온 작품답게 PC(정치적 올바름)적으로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기본적으로 여성의 시각이 많이 담겨 있고 인종적으로도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호르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라틴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듯이) 전형적인 백인계 미국인이 아닐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며 다분히 성, 인종차별적인 정치 메시지를 던지는 후보와 그 지지자들을 향한 분노 어린 시선이 작품 속에 많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뜬금없는 PC 요소들을 욱여넣어 스토리 전개가 어색해지거나 교조적으로 느껴질만한 부분이 없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주요 인물들이 10대라는 것이 번역을 통해서도 잘 느껴지는데, 단순히 영어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 아니라 진짜 우리나라 10대 학생들이 할법한 말들로 제법 현지화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엿보였다.

이게 과하면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잘 만든 영화 자막을 보는 것처럼 어색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스토리의 전개는 예상한 바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일어날 법한 일들이 일어나고 예상 가능한 수준에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만큼 전개가 매끄러웠고, 10대들이 궁금해할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다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하는 연인들이 '꽁냥'거리는 모습을 읽는 것도 오랜만이어서 즐겁게 읽은 것 같다.

대단한 스토리는 아니지만 재미의 측면은 충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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