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반짝 별 포코포코야 어디가 5
사카이 사치에 지음, 김현정 옮김 / 꿈터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포코포코야 어디가'라는 아동용 시리즈 동화책 중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주제가 시장에서 물품을 구매하고 행운권 추첨에 도전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아이가 흥미를 가질 것

같았다.

막상 책이 도착하니 아이보다 아내가 더 좋아한다.

일단 캐릭터들이 너무 귀엽다.

주인공인 포코포코는 작가가 창작한 가상의 동물인 것 같고 그 밖에도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어느 하나 귀엽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림 색감은 또 얼마나 이쁜지 보고 있으면 힐링이 절로 되는 느낌이다.

이 책이 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이라는데 집사람이 다 사고 싶다고 난리가 났다.

게다가 그림들이 깨알같이 디테일이 살아있다.

아래 그림에서도 포코포코 뒤에 개미가 작은 붕어빵을 먹고 있는 모습까지 그려둔 걸 볼 수 있다.

다행히(?) 아이도 엄청 좋아해서 책이 도착한 날 내리 세 번을 연속으로 읽어줬다.

글씨가 많지 않아서 6세인 우리 딸보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읽어주면 5분도 안 걸릴 분량이라 읽어주는 사람 입장에서 부담도 별로 없었다.

내용은 포코포코가 시장에서 이것저것 장을 보고 행운권을 받게 되는데 거기서 4등에 당첨되어 작은 별을 상품으로 받아온다는 내용이다.

단순한 스토리지만 주인공이라고 1등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아이에게 매 순간 늘 1등이기만을 바랄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살면서 어느 한 분야에서라도 1등이 돼보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당연히 1등 상품이 더 크고 예쁜 별이었지만 포코포코가 받은 것도 직접 구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덤으로 갖게 된 것이니 감사한 일이라는 것도 아이가 깨닫게 된 것 같다.

단순히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행위도 파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파는 사람에게 감사할 일이라는 것도 같이 알려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한 권밖에 없지만 집사람도 아이도 좋아해서 조만간 시리즈를 모두 구비해두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은미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쇼펜하우어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익숙할 테지만 그의 사상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는 학창

시절이 지나면 기억이 나지 않게 마련이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쓴 여러 저서 중 그의 사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책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한 해설서다.

그의 저서 자체를 읽기는 쉽지 않은 도전일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 수 있는 해설서를 택했다.

책을 펴자마자 저자가 이 책을 선택한 독자의 속마음을 꿰뚫어본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 제목을 들으면 무언가 알 수 없을 것만 같고

그래서 더 멋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제목을 이해하면 내용의 절반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pg 4)

후반부 참고 자료 목록을 제외하면 본문만 약 150페이지 정도로 얇고 작은 책이어서 부담이 없을 것 같았지만 중간쯤 읽다 보니 처음에 본 구절처럼 '제목만이라도 이해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이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은 없으나 그래도 내가 이해한 바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일단 쇼펜하우어는 이성이 강조되던 당시 철학계에 대한 반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인간의 현실은 항상 이성의 설명력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경험이었다.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주류 철학의 흐름과는 달리

그는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이고,

인간은 이 의지로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pg 16)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이성적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는 존재가 아니다.

거꾸로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 결론이 왜 말이 되는가를 설득하는 데 이성을 사용하는 존재다.

인간은 자신이 의욕하는 바를 행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행해야 했던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드는 존재인 것이다.

(pg 18)

먼저 제목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의지'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된다.

의지란 온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인데 그 원리는 우리 인간이 관측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 설명을 읽고서 자연(自然)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한자로 자연의 뜻이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인데 쇼펜하우어는 우주를 스스로 그러하게 만드는 힘을

바로 의지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라고 이해되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모든 만물을 지금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 생명의 원리, 생명 에너지, 즉 자연 속의 모든 힘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의지는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인 의지가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으로 현상한 것이 바로 세계다.

(pg 19)

우리는 이러한 의지를 직접적으로 관측할 수 없는 대신 그 의지가 발현되어 표상이 된 것들은 인식할 수 있다.

우리가 관측하는 주변의 모든 것들, 자연물, 동식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의지 그 자체가 아닌 의지가

발현된 '표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표현으로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표상으로밖에 세계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세계를 감지하는 방식이 표상이라는 것이다. - 중략 -

세계는 인식 주관에게 포착된 일종의 상(像)이고

주관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객관이다. - 중략 -

우리는 무엇인가를 만지고 느끼면서 자기 자신을 자각한다. - 중략 -

이런 순간이 바로 스스로를 주관으로 발견하는 순간이다.

(pg 64-65)

이 표상을 관측함에 있어서 우리의 오감은 물론 이성이 작용하게 된다.

당시 철학계에서는 이성에 대한 신뢰로 신체를 열등한 것으로 치부했다면, 쇼펜하우어는 이성 역시

뇌라는 신체 한 기관의 활동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체(오감)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주체가 있기 때문에 객체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주체가 주어질 때 객체가 있을 수 있고, 객체가 주어질 때 주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는 동시적으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는 객체가 있기 때문에 주체일 수 있고,

객체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객체일 수 있으니 이 말은 맞는 말이다.

(pg 67)

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오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점차 세계를

인식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떨렁 혼자 태어나게 된다면 인식할 세계가 없기 때문에 자아도 형성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논리를 연장해 보면, 결국 인간 역시 의지의 일부일 뿐이고 의지는 '나'라는 개체의 생성과

소멸에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 역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그의 철학이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라는 용어로 설명되는데, 후반부에 소개된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의 저자는 동양(불교) 철학의 관점으로 보면 쇼펜하우어의 '무'는 마치 '해탈의 경지'처럼

무한과 순환을 뜻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단순한 허무나 염세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이 논리를 인간관계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 또한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의지의 발현일 뿐인지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태어날 수 없다. 이는 타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인한 고통과 타인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지만, 이것이

단지 제 멋대로인 의지의 발현일 뿐임을 아는 사람은 그 고통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세계의 본질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의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의지의 객관화가 이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갈등 속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 개별자에게 체현된 의지와 저 개별자에게 체현된 의지가 본래 하나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개별자에게서 체현되면서 충돌하고, 이때 고통이 생긴다.

(pg 107)

그래서 쇼펜하우어를 공부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다른 개체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으면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의지 자체에서 벗어나 '의지의 자유' 상태에 이르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고 했다.

또한 이러한 상태가 바로 불교의 '반야바라밀'의 경지와도 같다고 표현했다.

모든 법을 초월하여 법의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 자체가 없는 상태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충만한 상태.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운 경지라고 하니 이렇게 밖에는 정리를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히 이 부분이 여태까지 우리가 쇼펜하우어 하면 떠올렸던 단어인 '허무'나 '염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은 확실히 들었다.

동양 사상에 보다 익숙한 사람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오히려 서양 사상이라기보다는 동양 사상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부분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아래와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노자의 도덕경 중 한 부분이 떠올랐다.

행복은 고통을 그 이면으로 하고 있다.

충분히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물이 맛있고, 충분히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맛있다.

그러니 행복이 있으려면 필연코 고통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삶의 비밀이다.

(pg 134)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에 빈 공간이 있으므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난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으므로 방의 쓸모가 생겨난다.

있음의 유용함은 없음에 달려 있다.

(웨인 다이어, '치우치지 않는 삶'의 pg 90)

두 구절이 마치 대구를 이루는 것처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책 자체는 매우 짧고 간결하다.

저자가 쉽게 쓰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 읽으면서 잘 느껴지긴 하지만 철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읽기엔

마냥 쉬운 책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원작을 보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쉬울 것임에는 틀림없으므로 그의 철학을 맛보고 싶다면,

또 그의 저작 중 어떤 책을 읽어보면 좋을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저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뜻밖에도 어느 날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에서였다.

법의학자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예능 프로에 나왔는데 아래와 같은 말을 하길래 무척 인상이 깊게 남았다.

TV를 거의 보지 않아 몰랐는데 '그것이 알고 싶다'에 자주 등장하는 법의학자라 한다.

책을 사려고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 익숙한 이름과 함께 자극적인(?) 제목을 가진 책이 있길래 선뜻 주문했다.

제목에 충실하게 매주 시체를 검시하는 직업을 가진 저자의 법의학 소개와 죽음에 관한 철학을 담은 책이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1부에서는 법의학의 맛보기가 담겨있다.

법의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저자가 법의학자로서 사건 해결에 기여한 여러 가지 충격적인 살인 사건들이

소개되어 있다.

법의학자는 확실한 증거로써만 진실을 추구한다.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든,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든

서사에 관심을 두기보다 명확한 증거에 입각해서 추론하는 것이다.

경험으로 쌓인 느낌이라든지 감각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결정적 판단은 오롯이 백퍼센트 과학적 증거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법의학이다.

(pg 55)

1부를 읽고 나면 법의학자의 존재가 강력 범죄 해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된다.

여기서 놀라웠던 점은 우리나라 법의학자의 수가 5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불현듯 이 사람들이 매수라도 당한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지기도 했다.

의사의 길을 가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라 할 수 없다는데, 얼마나 많은 외압과 유혹이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2부에서는 법의학 관점에서 죽음의 정의와 형태를 다룬다.

죽음의 형태라는 것이 다소 생경할 텐데,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것들을 밝혀내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물에서 건져낸 주검을 의학적이나 과학적으로 검사해

사망 원인이 익사임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스스로 투신했다면 자살일 것이고, 술에 취한 채 수영하다가 익사했다면 사고사이며,

강제로 물을 먹여 죽였다면 타살이다.

(pg 133)

여기서 더 나아가 존엄사, 안락사를 비롯한 연명치료 선택에 대한 히스토리는 물론 현재 일부 국가에서 시행 중인

의사조력자살까지 다루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어떤 제도의 시행 여부를 지지하거나 반대한다는 명확한 의사 표현은 없지만, 우리 스스로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그 의견이 존중받아야 하며 그에 따른 죽음의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세상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의료 행위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처분당하는 것이 요즘 우리 사회 죽음의 대세가 아닌가 싶어 씁쓸한 심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대세를 거슬러 이제 우리는 죽음을 당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pg 142)

이 책의 백미는 3부부터 시작되는 저자의 죽음에 대한 고찰이다.

하지만 이 3부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1, 2부를 꼼꼼히 읽어둘 필요가 있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우리가 스스로 죽음에 대해 미리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준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물질적, 심리적 정리가 있을 것이다.

각종 채무관계를 정리하고 유산이 있다면 어떻게 물려줄 것인지를 먼저 정하는 것이 물질적인 정리일 테고,

심리적 정리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인정하고 미리 인사를 나누고,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모습은 어땠으면 좋겠는지를 미리 의사소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 정리가 잘 안되기 때문에 죽음을 느닷없이 맞이하게 된다.

나의 스토리를 스스로 종결하지 못하고,

나의 내레이션을 마지막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남이 대신 마치게 하는 것이다. - 중략 -

내 인생의 마지막은 반드시 내가 종결지어야 한다.

(pg 238)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과거와 달리 사람들이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가 사망하게 될 확률이 점차 높아진다는 데 있다.

예전처럼 가족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 중환자실에서 홀로 온갖 호스들을 몸에 감고 불과 몇

개월 정도나 연장 가능한 연명치료를 전전하다 세상을 뜨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통계로 보면 1989년에는 전체 사망자의 77.4%가 집에서 사망했지만 2012년에는 집이 18.8%로 감소한

반면, 의료기관은 70.1%, 사회복지시설은 11.1%로 높아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어 늙어가다가 어느 순간 생의 기미가 푹 꺼지는 지점이

찾아왔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 중략 -

그러나 지금은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를 남길 틈도 없이

병원에서 아무런 준비나 의식 없이 마지막 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처럼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pg 215)

여기에서 저자가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추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인지라 생각보다 많이 팔린 것 같진 않아서 아쉬웠는데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서평: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0393453216)

여하간 그 책의 논지와 3장에 담긴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둘 다 읽어본 바로는 두 책 모두 상당히 좋은 책이며 읽는 재미도 있어서 추천하고 싶다.

멋있어 보이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마무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삶이 있고 100가지의 죽음이 있는 것이다. - 중략 -

죽음과 친숙한 삶이야말로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삶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삶을 묻는 이유다.

(pg 246)

마지막으로 저자가 40분간 강연한 영상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책을 다 읽은 후 쭉 돌려봤는데 이 책 내용의 한 60% 정도는 커버하는 것 같다.

한 40분 정도 되는 영상인데, 보고 난 뒤의 감동 역시 책의 6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책 역시 2-3시간이면 다 읽으니 어지간하면 책을 먼저 본 뒤 내용 리마인드용으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말도 재미나게 잘 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시간 압박이 있는 영상물이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책으로

읽었을 때의 감동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b_jbtR0En_U

일반 사람들 중에는 분명 영생을 준다 해도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각자의 운명을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는 영생을 기다리며 환상에 빠져 지내기보다는

우리의 지금 이 순간을 낭비 없이 꽉 채우는 온전한 현재의 삶을 사는 것이다.

(pg 265)

다행히 저자가 매우 쉽게 저술했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

책도 작고 분량도 270여 페이지로 얇은 편이어서 2-3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읽은 시간 대비 충분한 지식과 생각할 주제들을 던져주는 책이라 생각했다.

저자가 충분히 강조한 바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유기체인 이상 삶의 종료 시점이 언젠가는 찾아올 수밖에 없다.

나도 아직 40도 안되었으니 한참 젊을 때라 할 수 있겠으나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

삶의 마지막 여정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미리 고민해 보고 가까운 사람들과 진솔하게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뭔가 읽을 것이 떨어진 느낌이 들 때 생각 없이 집어 들게 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작품.

그래도 이번 책은 다른 작품들과 느낌이 매우 달라서 새로운 느낌으로 재미나게 읽었다.


이 책만의 특징이라 한다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제4의 벽을 마음대로 넘나든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영화 속 '데드풀'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자신들이 소설 속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독자들에게도 끊임없이 말을 건다.

단순히 말만 거는 것이 아니라 시비도 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번 소설은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다.

그러므로 독자가 아무리 메모를 해 가며 꼼꼼히 읽는다 한들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소설에 나오는 힌트만으로는 결코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것이 이번 소설의 구조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논리적으로 범인을 찾아내려는 독자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대부분 직감과 경험으로 범인을 간파해 낸다.

(pg 57)


게다가 소설의 주인공이 '명탐정'이 아니고 '명탐적 옆에서 뻘짓을 하는 경찰'이다.

자신이 정확히 범인을 알아내면 명탐정과 역할이 겹치기 때문에 자신은 헛다리를 짚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경찰이 주인공인 것이다.


짧은 단편들이 묶여 있는 형태인데, 일단 주인공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그 주변에 항상 우연하게도

명탐정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때에도 '어이쿠, 하필 내가 여기 있었네!'라는 느낌으로 등장한다.)

어릴 적 인기였던 코난이나 김전일 같은 만화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이상하게 주인공이 어딜 가기만 하면 주변에서

항상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정면으로 비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흔한 클리셰들을 소개한 뒤 그 클리셰가 얼마나 뻔하고 지루한지를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사건을 해결한다.

밀실 살인, 사라진 흉기, 변장한 범인, 고립된 무대 등 추리소설에서 한 번쯤은 봤을법한 트릭들이 모두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건의 해결 방식 또한 황당하기 그지없고, '설마.. 또 밀실 살인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와 비슷한 대사들이

연이어 등장하니 읽다 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지점이 꽤나 많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접근법으로 책을 썼을까?

책의 후반부에 다른 작가가 쓴 해설에서 그 해답을 엿볼 수 있었다.

일본의 전형적이고 수준 낮은 추리물들에 대한 비판에 더해 작가 자신 역시 그런 추리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다는

자기검열이 합쳐진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라는 것이었다.


작가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다작을 한 작가라 아직도 못 본 작품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라 불리는 작품들은 '용의자 X의 헌신'을 제외하면 아직 접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런 자기검열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작가가 쓴 다른 추리소설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당장에 이 작품 역시 '명탐정의 저주'라는 후속편이 존재해서 읽을 것이 계속 생겨나는 느낌이다.


읽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작품들을 주로 써서 그런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은 일단 집어 들 때 마음이

편하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재미가 보장되니 계속해서 읽게 되는 것 같다.

작가의 지치지 않는 창작 열정이 어디까지 갈지 개인적으로도 궁금해지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늑대
장마르크 로셰트 지음, 조민영 옮김 / 리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국열차'의 원작자가 그린 작품이라고 해서 일단 기대가 됐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져 독창적이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은 스토리를 구현해 내는 작가여서 이번에는 '늑대'라는

동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펼쳐냈는지 궁금했다.

책을 받아든 첫 느낌은 '가볍다'였다.

전체 페이지가 120페이지 미만으로 아주 얇은 편인데, 작품이 만화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짧은 분량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그래픽 노블이라기엔 글의 분량이 매우 적다. 그냥 만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실제로 후반부에 실린 해석까지 읽더라도 2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었다.

짧지만 강렬한 그림들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충분히 독자들에게 전해진다는 느낌이었고

다 읽고 난 후 스스로 생각해 볼 것들을 던져주기도 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국립공원 내 제한된 영역에서 방목으로 양을 키우는 노인 가스파르는 늑대로 인한 피해에 지쳐 암컷 늑대

한 마리를 쏴 죽인다.

이때 죽은 늑대의 새끼가 살아남아 가스파르와 대립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 후반부에 한 프랑스 교수의 작품 해설이 실려있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자원을 내어주는 존재라는 일반적인 서양의 자연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것이 해석 내용의 주된 내용이다.

해설에 따라 이해하든 각자 자신의 시각에서 이해하든 본 작품은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일단 나처럼 인간과 자연은 일방적인 관계일 수 없고 본래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은 저항할 수 없는 대자연이라는 것에 무의미하게 저항하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작품 속 늑대 역시 마찬가지지만 눈보라나 산사태 등의 자연 현상은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 현상에 앙심을 품고 복수심을 불태워본들 자연은 화를 내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작품 그 자체로만 감상한다면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양치기와 늑대라는 두 존재의 날카로운 대립과 처절한

복수극, 그리고 생존이라는 대전제 하에서의 극적인 화해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양 떼'는 두 존재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매우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대립은 그만큼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포효하는 대자연 앞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빚을 지게 된다.

늑대는 결코 인간을 위해 길들지 않았지만 인간이 허락하는 이상을 욕심내지 않게 되었고, 인간 역시 늑대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을 버리고 늑대의 영역을 지켜주며 자신의 자원을 기꺼이 나누었다.

저자가 의도한 작품의 핵심 주제는 아니겠지만 '복수'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작품 속 늑대가 가스파르에게 한 행위가 진짜 '복수'의 목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진짜 계획적으로 가스파르를 '엿 먹이기 위해' 행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저 본능에 따른 우발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가스파르에게 피해를 입힐 의도였다고 한다면 다른 늑대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굳이 저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 마리보다는 여러 마리일 때 더 효과적으로(?) 엿을 먹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뇌가 발달한 동물일수록 복수라는 행위를 실제로 할 수 있다고 하니 작품 속 늑대의 복수 역시 의도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는 인간이 아니기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동물이 본능에 충실한

것을 탓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스파르는 명백한 '복수'의 의미로 늑대를 추적한다.

그 결과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데,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자신이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

중간에 몇 번이고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그 늑대의 숨통을 끊지 않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복수심'이라는 것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감정이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이 불타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파멸시키고 싶은 마음.

전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이 제3자의 시각에서는 얼마나 덧없어 보일 수 있는지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짧은 작품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 자체가 가벼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이 온라인 서점에서 '청소년'도 아닌 '어린이'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다소 당황스러운 느낌이다.

물론 만화이고 글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아이들이 봐도 무방은 하겠으나, 아이들이 읽고 '음..역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지' 이상의 행간의 의미를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어린이를 너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작품을 너무 오버해서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길이는 짧지만 그림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책의 사이즈가 큰 편이기 때문에 편안한 장소에서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천천히 읽어본다면 생각보다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