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오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점차 세계를
인식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떨렁 혼자 태어나게 된다면 인식할 세계가 없기 때문에 자아도 형성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논리를 연장해 보면, 결국 인간 역시 의지의 일부일 뿐이고 의지는 '나'라는 개체의 생성과
소멸에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 역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그의 철학이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라는 용어로 설명되는데, 후반부에 소개된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의 저자는 동양(불교) 철학의 관점으로 보면 쇼펜하우어의 '무'는 마치 '해탈의 경지'처럼
무한과 순환을 뜻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단순한 허무나 염세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이 논리를 인간관계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 또한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의지의 발현일 뿐인지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태어날 수 없다. 이는 타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인한 고통과 타인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지만, 이것이
단지 제 멋대로인 의지의 발현일 뿐임을 아는 사람은 그 고통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