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몸은 과학이 된다 - 죽음 이후 남겨진 몸의 새로운 삶
메리 로치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빌리버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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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지만 그럼에도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죽음이라는 것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시체'나 '사체', '시신'과 같은 단어들은 되도록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죽은 육신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우리가 죽은 육신을 통해 어떤 과학적 이익을 얻고 있는지를 취재한 결과물이다.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 책이 상당한 재미를 준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재미 삼아 해마다 연말이 되면 그 해에 읽었던 책 중 재미있었던 책들을 몇 권씩 선정해 보고는 하는데 이 책이 올해의 목록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강력한 확신이 든다.

'사체의 사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은 역시나 의학적인 목적의 해부실습이나 장기 이식 등이 떠오를 것이다.

이 책 역시 의대에서 활용되는 카데바부터 시작하고 있다.

카데바는 의학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나 가족의 시신을 기꺼이 기증한 결과물이므로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사용 후에도 기증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해부 실습에 사용된 시신들을 기리는 행사에서 한 여학생이 남긴 인사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글만 읽으면 다소 섬뜩할 수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 누가 한 말인지를 떠올리면 꽤나 애틋하게 느껴질 것이다.

해부학 도감의 그림에는 손톱의 매니큐어가 나와 있지 않답니다. 색깔은 당신이 골랐나요? 그 매니큐어를 제가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있나요?

당신의 손 안에 대해 말해 주고 싶었답니다.

제가 환자를 볼 때마다 언제나 당신이 거기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길 바라요.

복부를 진찰할 때에는 당신의 장기를 떠올릴 거예요.

그리고 심장 박동을 들을 때에는 당신의 심장을 손에 들고 있던 기억을 떠올릴 거고요.

(pg 46-47)

물론 이렇게 사체에 예우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기나긴 시신 활용의 역사 속에서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전에는 인체를 연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의사들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체를 손에 넣었다.

심지어는 몰래 무덤을 파내 의사들에게 파는 행위로 생계를 이어가는 계층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합법적으로 쓸 수 있는 사체가 부족한 까닭에 시체를 파내려는 해부학자들과 시체를 파내지 못하게 하려는 대중들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세태가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이어졌다.

대체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들은 가난한 계층이었다.

(pg 61)

사체의 활용은 의학적인 목적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의 안전성 개선과 같은 산업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범죄를 더 잘 추적하기 위해 다양한 환경에서 어떻게 부패하는지를 연구하기도 한다.

후반부에는 우리가 생을 마감한 후 어떻게 하면 지구에 덜 해로운 방식으로 처리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도 사체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역시 매장 문화에서 지금은 화장 문화로 완전히 바뀌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좁은 나라에서 이 정도의 변화도 상당한 발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나라들에서 사체를 보다 환경에 덜 해로운 방식으로, 심지어는 사체를 자연에 온전히 돌려보내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의 신체 역시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훌륭한 비료가 될 수 있다.

이런 물질들을 그저 태워 없애기 위해 화석 연료를 사용해가며 대기를 오염시킬 이유가 딱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역시 자연의 일부인만큼 다시 자연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관념의 동물인지라 종교적인 이유, 문화적인 이유 때문에 아직은 유족들이 이러한 방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수목장도 결국은 화장 후에 하는 것인지라 오염물질의 발생은 물론이고 유기물질의 순환 측면에서도 아주 자연친화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꽤나 실리적이기 때문에 화장을 굳이 하지 않고서도 수목장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심지어 그 방법이 화장보다 비용 측면에서도 저렴하다면 이를 선택할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마사크와 마찬가지로 그는 가족들이 심은 나무가 죽은 사람이나 동물의

세포를 흡수하면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된다는 구상을 하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과학으로서는 이게 부활에 최대한 근접하는 겁니다."

(pg 352)

위에서 언급한 사례 외에도 사체가 인류의 발전 혹은 지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이 꽤 많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은 뒤에는 소개한 여러 방법 중 하나로 처리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까지는 밝히지 않을 생각이므로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물론 사체의 처리는 온전히 유족의 희망에 따라야 한다는 대원칙에는 저자도 동의하고 있으므로 너무 거부감을 갖지는 않아도 좋겠다.

전체적으로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과학 이야기지만 금기시된 주제를 다루고 있고, 과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로서 취재한 바를 쓴 글이라 전혀 현학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사체라는 주제를 이렇게 유쾌하게 다루어도 괜찮은 걸까 싶을 정도로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서 읽다가 웃음이 터지는 순간도 꽤 많았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고, 또 자신도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기에 죽은 뒤 내 육신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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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케빈 J.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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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지만, 한때 남녀 간의 성향 차이를 비롯한 개인의 특성 차이들이 강력한 사회화의 증거라는 이론이 득세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유전학을 비롯한 생물학 전반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그러한 주장은 점차 힘을 잃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에는 생각보다 타고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에 충실하게 이 책 역시 우리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고 있는 과학 교양서다.

저자는 초반부터 우리가 '유전적으로 타고난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흔히 떠올리는 유전의 양상이 과학적인 사실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부터 짚고 넘어간다.

예를 들어 쌍꺼풀이 없는 부모에게서 쌍꺼풀이 없는 아이가 태어났다면, 우리는 눈의 생김새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정해져 있어서 이것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유전자가 그렇게 개별 형질에 일대일로 대응되어 전달되는 경우는 눈 색깔처럼 비교적 단순한 외형적 특징에나 적용되는 특수한 케이스라고 하며, 뇌처럼 복잡한 구조를 가진 기관은 특정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들의 수도 많고 그 유전자들의 작동 방식 역시 굉장히 복잡하다고 한다.

유전체는 오히려 조리법이나 실험 프로토콜에 가깝다.

절차를 충실히 따라가면 인간의 뇌를 지닌 인간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조리법이 상세하더라도 시행할 때마다 결과물에 조금씩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완전히 똑같은 케이크를 두 번은 구울 수 없듯이 말이다.

(pg 99)

또한 돌연변이의 발생도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정 부분 돌연변이를 갖고 태어나는데, 이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유성생식을 하기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다.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다면 유전자에 결함이 없는 완벽한 자기 복사본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이 번성하는 이유는 이 방식이 가진 절대적인 이익 때문이다.

즉 주변 환경이 계속 변화하는 상태에서는 상대와 유전자를 결합할 때 발생하는 돌연변이들이 오히려 적응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태어난 후 일정 기간 성장할 때까지 계속해서 변화한다.

이러한 뇌 가소성은 주변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기에 유전자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뇌의 구조가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다고 한다.

일란성 쌍둥이가 같은 집,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해도 시선이 향하는 방향, 듣는 소리, 상호작용하는 타인 등 자극의 종류가 완벽히 겹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우리가 우리의 클론을 100개 만들면 그 100개가 다 각각 다른 성격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미키 17'처럼 복제인간을 다룬 SF 영화에서도 클론들의 성격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이론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성격과 같은 특성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특정한 유전자가 유전된다고 해서 그 유전자가 어떠한 특징을 결정짓는 유일한 요인은 아닐 가능성이 높고, 또한 그 유전자의 발현 정도도 개체마다 다를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성격이나 지능과 같은 특징을 결정하는 요인들이 유전되는 경향은 분명하지만, 각각이 발현되는 정도나 방향성은 개체마다 다르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전체에 부호화된 프로그램은 발달 규칙만을 명시할 뿐 구체적인 결과를 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는 유전적 변이가 많을수록 결과의 다양성도 커진다.

어떠한 유전자형이라도 다양한 잠재적 결과를 지닐 수 있지만,

그중 실제로 실현되는 것은 단 하나다.

바로 세상에 하나뿐인 고유한 개인이다.

(pg 382)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유전학의 발달을 통해 기대했던 의학 분야에서의 혁신이 아직까지 상용화되기 어려운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전까지는 특정한 돌연변이가 곧 특정한 질환이나 증상의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돌연변이의 보유 여부가 특정 질환이나 증상으로 곧장 연결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만약 단일한 유전자가 중증 질환을 유발한다면, 해당 개체는 성 선택에서 배제될 확률이 높으므로 그 유전자가 자식 세대로 이어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개체들에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돌연변이들이 유전될 확률이 높을 것이고, 이는 질병 연구의 어려움을 가중하는 요인이 된다.

또한 보통은 해당 돌연변이의 작용을 억제하거나 완화하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있어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반대로 특정한 방향으로 살짝만 유도하는 돌연변이일지라도 다른 유전자의 영향으로 그 증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평균적으로 부모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약 70개의

신생 돌연변이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돌연변이는 무작위로 발생하는 데다 우리의 DNA 가운데 실제 유전자는

약 3%에 불과하므로, 대부분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실제로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신생 돌연변이 수는 평균적으로 1개 정도이다.

그러나 운이 나쁘면 그 하나의 돌연변이가 정상적인 뇌 발달이나 기능을 위해

2개의 복사본이 모두 필요한 수천 개 유전자 중 하나에 발생할 수 있다.

(pg 350)

즉, 우리가 가진 창발성이라는 특징은 우리의 선천적 질병에도 적용된다.

누구나 돌연변이를 가지지만 그 돌연변이들의 상호작용이 천재적인 공감각을 만들기도 하고, 자폐나 ADHD와 같은 장애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특정 질환들을 일으키는 유전자들의 목록을 전부 알아냈다 하더라도 그 전부를 제거함으로써 그 질병이 아예 발생하지 않게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아직은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특히 정신질환에 관여하는 유전자는 뇌의 작동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의가 자칫하면 새로운 우생학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고려가 지금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도 강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정보의 양이 매우 많은 책이다.

참고 자료 목록을 제외하면 400페이지 정도의 두께인데 모든 장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용어도 많고 내용 자체도 어려운 편이어서 읽은 뒤에 잊어버리는 내용도 많지만, 읽는 동안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은 정말 많았다. (아버지 쪽 생식 세포의 나이가 젊을수록 아이의 돌연변이 발생 확률이 낮다는 유용한 정보도 습득할 수 있었다.)

약간의 도전의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과학의 힘으로 밝혀낸 '유전'이라는 것을 한 권으로 맛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었다.

누군가는 세상을 쉽게 헤쳐 나간다.

그러나 다른 이는 세상에 적응하고, 주위 사람과 잘 어울리거나

정신을 붙들고 사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차이를 부정한 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에 우리는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기를 넘어 환영할 수 있어야 한다.

(pg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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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열린책들 세계문학 295
허먼 멜빌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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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수년 전부터 한번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끝내 손이 가지 않았던 작품인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각 잡고 읽어보게 되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출시된 판본도 많은데 이번 책은 표제작을 포함해 총 다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작품들 모두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오래된 작품이지만 읽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첫 포문을 여는 작품은 역시 표제작인 '필경사 바틀비'다.

이 작품과 마지막 수록작인 '빌리 버드'는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데 재미나게도 등장인물의 성격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바틀비'가 자신의 생존마저 스스로 포기할 정도로 사회성이 극도로 없는, 그래서 그 누구도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라면 '빌리 버드'는 호감형 외모에 선천적인 선함을 가진, 그래서 세상 물정을 좀 모르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마저 갖추어 누구나 좋아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고 또 누군가에게 이용당해야만 하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기능이 부족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바틀비'는 스스로 소외의 길을 걸으며 식사마저 거부한 채 죽음을 택하고, '빌리 버드'는 그를 질투한 상관의 무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사형 선고를 받고 만다.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관계없이 한 인간이 사회에서 발을 붙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회가 정해둔 규칙에 따라 결정될 뿐이라는 점을 두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위 두 작품이 길이가 꽤 긴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짧았던 나머지 세 작품의 감상이 더 좋았다.

특히 당시 엘리트 남성들의 평온한 만찬과 제지 공장에서 자신도 잃어버린 채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여성들의 고된 노동 현장을 비교한 '총각들의 천국, 처녀들의 지옥'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처음 '총각들의 천국' 편만 읽었을 때는 '고작 밥 먹는 얘기를 뭘 이렇게 길게 썼나' 싶었는데 이후의 '처녀들의 지옥'을 읽고 나니 그 대비가 상당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인간들이 자신의 노예라고 호언장담하던 기계들이 보란 듯이 서 있고,

인간들이 비굴하게도 그 기계들을 섬기고 있었다.

노예들이 술탄을 섬기듯, 끽소리 못 하고 굽실거리며 기계들을 섬기는 인간들.

기계의 부속품인 회전 기어?

아니, 이곳 처녀들은 그보다도 못한, 심지어 회전 기어의 이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

(pg 125, '총각들의 천국, 처녀들의 지옥' 中)

이어지는 '빈자의 푸딩, 부자의 빵 부스러기' 역시 그 시대에 만연했던 경제적 불평등을 담아낸 작품이다.

비록 끔찍한 맛이었을지라도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빵 한 조각과 푸딩을 건넬 수 있었던 빈자의 집이 자선행사랍시고 귀족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배부하는 부자의 집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두 작품 모두 1850년대에 쓰인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저자가 관찰했던 사회의 불평등한 모습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대통령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일면 좋아지긴 했겠으나, 1850년대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과학 기술의 발전 정도와 비교하면 사회의 발전은 그보다 한참 못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아래의 문구에서 볼 수 있듯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를 바라보는 관점 같은 부분은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 공장도 결혼한 여자는 채용하지 않습니다. 일하다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해서요.

꾸준히 일할 사람, 일요일과 추수 감사절, 그리고 종교적 이유로 단식하는 날 빼고는

1년 365일 매일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 결혼한 사람은 영...

그게 우리 업계의 규칙입니다.

(pg 139, '총각들의 천국, 처녀들의 지옥' 中)

'행복한 실패'는 수록작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역자는 이 작품에서도 흑인 노예의 처지에 주목하면서 만연했던 차별을 지적하고 있기는 하나, 작품이 전달하고자 한 핵심은 '전화위복'이라는 사자성어에 더 가깝다.

한 발명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어 오히려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마치 탈무드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읽었지만 이 작품이 약 200년 전 작품이라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요즘 문학 작품들처럼 단문을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좋게 말하면 배경 묘사가 좋고, 나쁘게 말하면 문장이 꽤 장황한 편이라서 전개가 빠르다는 느낌은 전혀 없으므로 성격 급한 사람이라면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근대 미국 문학에서 저자의 작품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므로 인생의 과제 하나를 끝낸다는 느낌으로 도전해 보기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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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월드 도와줘! 초등 신문 1 : 절대 읽지 마, 신문 요미월드 도와줘! 초등 신문 1
김지균 지음, 이정수 그림, 요미월드 원작 / 서울문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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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글쓰기 실력 향상이나 논술 준비를 위해 신문을 읽으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종이 신문은 멸종 직전이고 인터넷으로도 유튜브 영상으로나 볼 뿐 기사 자체를 잘 읽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신문 읽기를 통해 기를 수 있는 역량은 지금 세상에도 충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초등학생을 가진 부모라면 꽤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신문을 읽는 것처럼 시사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의 지식을 재미나게 쌓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은 총 5개 챕터로 사회, 과학, 정치, 세계, 언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각각의 챕터마다 열 개 내외의 주제들이 수록되어 있고, 시작을 여는 이야기가 끝나면 어린이 신문 형태의 기사와 요점 정리, 간단한 문제가 수록된 페이지가 나온다.

이후에는 주제와 관련된 만화도 수록되어 있어서 줄글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도 일단 만화를 먼저 접한 다음, 흥미가 가는 부분들을 읽게 함으로써 줄글로 유도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다루는 주제도 초등학생용 책이라고 해서 결코 가볍지 않다.

노 키즈 존, 다문화 사회, 인구 감소 등 현대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다루기도 하고, 계엄령이나 진보, 보수처럼 우리나라를 이해함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정치적 용어들도 다루고 있다.

또한 한류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사례가 등장할 정도로 최신 정보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pg 108-109)

책 속 캐릭터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튜브에서 따온 모양인데, 아이도 나도 모르는 채널이었다.

해당 채널을 몰라도 우리 아이는 2권은 언제 나오냐며 정말 재미나게 잘 읽고 있으니 원작 유튜브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더욱 좋아할 것이다.

책에 담긴 콘텐츠들의 내용도 상당히 좋아서 잘만 읽는다면 아이의 시각이 크게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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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수집가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윤시안 옮김 / 리드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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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추리나 미스터리는 순수하게 흥미를 위한 장르라 그런지 한번 잡으면 손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난 작품들이 많은데, 일본은 이 장르의 저변이 넓어 우수한 작가도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이번 작품의 저자는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데, 수상 이력도 화려하고 본격 추리를 지향하는 작가라는 소개도 마음이 끌려서 읽어보게 되었다.

제목 그대로 작품의 주연은 '밀실수집가'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 표현을 빌면 '밀실 정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밀실 사건에 숨겨진 진상을 술술 풀어내면서도 정작 그 정체는 아무도 모르는 그야말로 미스터리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작품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총 다섯 개의 사건이 일어난다.

모두 같은 형식인데 짧게 배경과 인물의 소개가 이루어진 후 누군가가 죽게 된다.

사건의 현장과 진술을 종합하다 보면 해결이 쉽지 않은 밀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인물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쯤 묘연히 나타난 밀실수집가가 턱하고 사건을 해결해버린다.

320여 페이지 정도로 그리 길지 않은 책에 다섯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만큼 각각의 이야기는 꽤 짧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만들어 놓은 밀실 트릭의 수준은 가볍지 않다.

이런 작품들은 트릭 자체가 곧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독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주면서도 등장인물들마저 속아 넘어가는 교묘한 심리 트릭까지 구사해 내고 있어서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도전 욕구를 샘솟게 할 만하다.

참고로 작품 내에서 밀실수집가가 등장하면 곧바로 사건이 해결돼버리기 때문에 진짜 추리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밀실수집가 등장 이후 잠시 멈춰서 자신만의 추리를 펼쳐보기 바란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살짝 힌트를 주자면, 각 사건들마다 연도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 시대가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 사건과 마지막 사건의 시간차가 60년이 넘기 때문에 지금 시대에는 기술 때문에 불가능한 트릭이 그 시대에는 가능했을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즐거운 추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사건의 전말이 살짝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네 번째 사건인 '이유 있는 밀실'은 범인이 의도적으로 만든 밀실에 감춰진 비밀을 찾는 이야기로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재미를 주었다.

짧은 이야기 안에 수준 높은 밀실을 만들어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주면서도 사건이 해결되었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한 사건의 호흡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읽는 재미가 출중해서 앞으로도 밀실수집가가 더 활약할 수 있도록 시리즈로 나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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