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 - 도시 여자의 리얼 농촌 적응기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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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상깊은 구절

"그래요. 저는 강하니까요." -중략-

물론 자신의 힘 만으로 이루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가 궁지에 몰렸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pg 340)


얼마 전 읽었던 가키야 미우의 소설이 마음에 들어서 다음 책을 접하고 싶어 집어든 책이다.

'70세 사망법안, 가결'과 같은 참신한 재미를 기대하고 책을 들었다. 


스토리 라인은 앞 표지가 다 말해주고 있다.

'도시 여자의 리얼 농촌 적응기'라는 부제 아래에 한 여성이 농업인 복장을 하고 채소가 담긴 바구니를 든 채 이런 대사를 외치고 있다.

"직장도, 집도, 남자친구도 모두 잃어버렸지만 결혼으로 도망치지 않을 거야!"


30대 중반에 접어든 구미코라는 여성이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고용 만료 통보를 받은 날, 동거를 하던 남자친구에게도 이별 통보를 받는다.

멍하게 TV를 보던 중 농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인터뷰를 보고서는 자신도 농업의 길을 걷기로 하는 스토리이다.


평소 서평을 길게 남기는 편이지만 이 책은 딱히 길게 남길 포인트가 많지 않았다.

'70세 사망법안, 가결'에서는 읽는 내가 중년도, 여성도 아니었지만 주인공의 심정에 상당부분 감정이입도 되고 가슴에 와닿는 구절도 

많았는데 이 책은 그런 느낌이 적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가 없었느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은데, 스토리가 말끔하게 이어진다는 느낌이 부족했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왜 그런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나는 책 표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표지에서 줄거리를 다 이야기 해줘버리니 책장을 넘기면서 큰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구미코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이렇게 농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겠구만' 하는 정도의 생각 뿐이지, 

이를 어떻게 극복해 갈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겉표지부터 결혼으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버리고 있으니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이성과의 만남들은 결과가 

뻔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구미코의 문제 해결이 대체로 주변 사람들의 선심성 도움을 통해 해결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물론 구미코도 노력은 한다. 

농업을 배우고, 직접 농가를 찾아 다니면서 농지를 찾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 인맥을 쌓는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노력은 그녀의 경제적 자립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진짜 중요한 도움들은 갑자기 뚝 떨어진 주변 사람들의 선심성 도움들 덕분이다.

심지어 자신을 싫어한다고 했던 선배까지 나서서 농작물 판매 홍보를 도와주는 기가막힌 상황도 발생한다. 


결국 혼자 살만하다고는 하지만 굉장히 의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귀농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농촌 사람들이 보여주는 말도 안되는 텃세와 통행세, 마을 발전기금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요구하는 행위들이 매스컴을 타면서, 농촌 사람들이 구미코처럼 혈혈단신으로 시골을 찾은 이방인에게 따뜻하게 

자신의 것을 내어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개인주의가 우리나라보다 심하다고 알려진 일본에서 이런 스토리가 나온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은 여성이 남성의 경제적 도움 같은건 받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다른 여성들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결론으로 흐르게 된다. 

애초에 남성의 도움은 여성의 종속을 가져다주지만 여성의 도움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모든 경제적 의존은 일정부분의 종속을 필연적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전에 접한 '70세 사망법안, 가결' 같은 경우에는 등장인물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하면서 젠더 불평등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도록 유도한 측면이 있어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면, 이번에는 그 정도가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으로 전개되어 개인적으로는 작가에게 조금 실망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누군가가 '가키야 미우'의 책을 권해달라고 하면 망설임없이 '70세 사망법안, 가결'을 권해주겠지만, 

이 책 이후로 작가의 책을 정주행하려고 했던 내 자신의 계획은 약간 망설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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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없는 기분
구정인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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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너무 살아 있는 내 딸과 너무 죽어 있는 내 아버지.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앞에 가는 두 사람을 계속 바라봤다.

내 가족은 저 두 사람, 내가 속한 곳은 여기. 자꾸 확인하고 싶었다. (pg 24~25)



이제 대한민국에서 누군가에게 '우울증이 있다' 라는 사실은 딱히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손으로 삶을 마감하고 있고

뉴스 사회면에서는 매일같이 우울증 환자들의 결말과 살아남은 유족들의 슬픔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런 뉴스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이번 달 초, 동생이 삶을 마감했다.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였고 대단히 준비를 많이한 흔적이 보였다. 

정말 힘든 것은 동생을 잃었다는 상실감보다는 막내 아들을 잃은 부모님을 보는 것이었다. 

나까지 질질짜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맨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측면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정말 눈물이 나지 않았다.


긴 위로휴가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한 인터넷 서점에서 과거에 쓴 서평으로 적립금을 받게 되었다. 

간만에 책이나 사자 싶어서 들른 사이트에서 이 책 제목을 보게 되었고, 잠깐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자신의 요즘 심경이 딱 책 제목과 같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바로 주문했다.

결재한 날 바로 도착했지만 이래저래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안되서 책을 받은지 1주일이나 지난 뒤 들춰보게 되었다. 

만화인지라 쉽게 읽을 수 있었고 내용의 몰입도도 좋아 앉은 자리에서 모두 읽었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이 우울증 환자이며, 아버지가 고독사한 뒤 자신의 우울증 진행 경과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게 된 후부터 작가의 심경 변화가 덤덤하지만 상세하게 묘사되는데, 

작가와 내가 처한 상황이 상당히 비슷해서 공감이 잘 갔다. 


작가에게는 아버지가 늘 속을 썩이는 존재였다. 

나에게 동생도 비슷한 존재였다. 

동생 덕을 보기는 커녕 제발 제 앞가림이라도 잘 해서 내 삶에 방해가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솔직히 했었다.

그래서 장례식 때 집안 어른들이 내 손을 잡고 '이제 쓸쓸해서 어쩌니, 이제 너 혼자라서 어쩌니' 따위의 위로를 했을 때 

그렇게 와닿는 느낌이 없었다. 

자신이 원해서 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있기까지 부모님이나 나에게 알리지 않았다. 

동생에게 가족이 그렇게까지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는데 내가 그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슬퍼하는 것은 

내 자신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쎄. 내 자신의 지금 심정이 이렇다.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정말 기분이 없는 기분이다. 

하지만 작가처럼 뛰어내리고 싶다거나 식욕이 없다거나, 무기력한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

그래도 매일 출근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도 하고 있고, 끼니를 챙겨 먹고 있다. 

아이의 재롱을 보며 집사람과 웃고 떠들 수도 있다. 


장례식 때 직장 동료들이 찾아와 생각보다 덤덤해서 놀랐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나 같은 사람들은 상황이 다 정리되고 나면 뒤늦게 타격이 온다는 말을 했었다.

벌써 보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은 그 타격이 온 것 같지 않다.


"혜진씨에게는 진정한 애도의 기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애도요?"

"누군가를 보낸다는 건, 그리움, 슬픔만이 아니라 쌓인 분노를 털어낼 시간도 필요한 일이에요." (pg 187)


작가가 상담사와 나눈 이야기의 일부이다.

나도 그런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 지난 보름간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장례식도 치뤄야 했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녀석의 뒷처리도 도맡아야 했고, 부모님의 심경도 살펴야 했다. 

남편이 평소보다는 집안에 신경을 쓸 수가 없어 피곤함이 더해진 집사람의 눈치도 봐야 했고

가끔 삼촌을 찾는 아이에게 태연하게 이제 삼촌이 없다고 알려주기도 해야 했다. 


아마 당분간도 정신이 없을 예정이다. 

아직 동생의 49재도 남아있고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들도 남아있다. 

멀리서 장례식을 찾아준 분들, 부의금을 전해준 분들과 다만 소주라도 한잔씩 기울여야 할테고, 

직장에서도 내가 해주기만을 기다려온 일들이 산적해있다. 

집사람과 아이도 매일같이 내가 언제 들어오는지만 바라보고 있다. 


이런 모든 정신없음이 해결되고 나면 나는 진정한 애도의 기간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고 나면 나도 작가처럼 우울함을 느끼게 될까.

아니면 그냥 훌훌 털어버리고 마치 원래 외동이었던 것처럼 잘 살 수 있을까. 


서평을 가장한 일기를 쓴 것만 같다.

그만큼 감정적으로 상당히 공감되는 책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회상 장면을 빼면 마치 내 이야기 같은 느낌도 많이 들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적립금을 받게 되고 하필 이 책을 산 것 보면, 그리고 이 책을 부모님 댁에 다녀온 오늘 읽게 된 것을 보면,

역시나 책과의 인연도 필연인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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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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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각기 다른 위치에 발 딛고 서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연대란 완전한 일치와 공감이라기보다는 타인과 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차이를 함께 마주하며

공감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g 174)



간만에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을 가진 책을 만났다.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가난'이라는 단어는 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부족한 사회보장과 복지제도는 '정상적인' 삶의 노선에서 조금만 삐끗해도 돌이킬 수 없는 가난의 굴레로 떨어지게 된다는

공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건국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지금의 젊은 세대.

그들이 보는 대한민국의 가난은 어떤 모습일까?


부모 세대가 습관처럼 강조해온 안정된 정규직과 성공 신화를 버릴 수도, 

현실화시킬 수도 없는 21세기 저성장 한국 사회에서 제 처지의 비참함을 호소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른바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학교든 가족이든 경쟁은 이제부터라고 다그친다. -중략-

정체불명의 불안은 미세먼지를 타고 각자의 몸 깊숙이 파고든다. 

일상에선 모임을 최소화하고, 얼굴을 맞대지 않는 사이버공간에선 극단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조롱하고 압살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모두가 피곤하고, 힘들고, 억울하다. (pg 9)


이 책은 한 대학교수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빈곤 관련 활동가들을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을 담아낸 책이다.

'빈곤 관련'이라고는 하지만 세계 경제 규모 11위에 빛나는 대한민국에서 '빈곤'이라는 키워드로만은 활동을 이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 노숙자, 여성 등 다양한 키워드를 가지고 함께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골고루 들어가 있다. 


최근에 고시원 화재 사건이 있었기 때문인지, 주거복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창문이 없는 방에 묶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통해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월 몇 만원에 지나지 않는 '창문비'는 그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을 정도로 큰 차이였다는 점과

실제 고시원에는 고시생이 아닌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도심 한복판에도 곳곳에 빈곤층이 숨어 있으며 우리가 그들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는 사실도 말이다. 

용산참사가 일어난지도 벌써 10년. 그 때의 충격은 이미 잊혀졌지만 우리 사회의 주거복지는 얼마나 개선되었는가?


용산참사는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는 이익을 위해 기획된 '재개발 사업'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배제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국 사회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든 누릴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믿어왔던 공간이 실질적으로는 '부자'에게만 허용되고,

'빈자'에게는 일체 허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한 결과가 바로 용산참사이기 때문이다. (pg 49)


과연 2019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라 말할 수 있는가?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부자에게 허용되는 자유와 빈자에게 허용되는 자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양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므로 지금도 유효하다 하겠지만, 지난 10년 동안 많은 복지 제도와 정책들이 시행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개선 효과를 낸 부분도 분명 많을 것이다 .

이러한 성과들이 모두 정부에서 알아서 해준 것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정부에게 목소리를 내고, 싸우고, 부딪히고, 설득해서 얻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이 책에서 만나고 있는 많은 활동가들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빈곤층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다.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장애인이 아니면서 장애인 운동을 하는 활동가, 노숙자가 아니면서 노숙자 운동을 하는 활동가 등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그들과 함께 연대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면서 활동가 자신도 빈곤과 아주 동떨어진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없는 활동가들도 많았다. 

왜 그들은 더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김윤영 활동가는 활동을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의 70퍼센트는 분노라고 말했다.

'이놈의 세상 너무 나쁘기 때문에 가만두면 안 돼!"라든지 "너무 화가 나고, 너무 말이 안 된다!"는 식의 분노가 

스스로를 계속 활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동력은 활동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라고 헀다.

함께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pg 72)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였다. 모든 사람들은 불합리한 뉴스를 보며 분노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쉽게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저마다의 일상으로 나아간다. 

결국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빈곤 없는 세상'도 비슷해요. 빈곤이 철폐된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긍정형으로 문장을 만들어 이야기하기는 너무 어렵고, 

"그것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고 이야기하면서 과정을 통해 다가가는 거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최소한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죽음을 결심하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최근 건강 관련 설문조사에서 암이 발생했을 때 어떤 점이 가장 걱정되냐고 물어보면, 

'죽을까 봐 걱정된다.'는 대답보다 '가족들이 가난에 빠질까 봐 걱정된다.'는 대답이 더 높게 나온다고 해요. 

적어도 그런 상황은 잘못되었다고 봐요. (pg 74)


우리나라의 복지제도도 분명 세월이 지남에 따라 좋아지고 있다.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혹은 우리 자식 세대에서 그 복지제도 덕분에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성과는 모두 이 책에서 찾아본 사람들과 같은 활동가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책 자체는 적당한 두께에 인터뷰 녹취록이 포함되어 있어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도 젊은 세대가 현재 빈곤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각기 다른 위치에 발 딛고 서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연대란 완전한 일치와 공감이라기보다는 타인과 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차이를 함께 마주하며

공감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g 174) 


책 초입 부분에 대다수의 글을 학생들이 쓰고 교수가 검수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위 문장은 학생이 쓴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멋진 문장이었다.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본 활동가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타인의 고통에 같이 아파했던 사람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타인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게 읽은 책이었지만, 학생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책이어서 빈곤에 대한 해결책, 정책적인 제안 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은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학생들이 가슴으로 느끼며 적어준 멋진 문장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가슴에 와 닿았던 문장들 몇 개를 인용하며 책 소감을 마치고자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는 빈곤은 학생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매번 마주치는 홈리스들에게 관심을 갖기를, 

강제 철거나 부양의무제에 따른 수급 정지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삶을 되돌아보기를, 

더 나아가 집요한 항의와 집회로 이들의 '몫'소리를 전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기를 요구하는 게 정말 무리한 것은 아닌지 

소심한 우려가 들기도 한다. 

'개천에서 난 용'의 시대가 저물면서 빈곤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좌초되는 현실이 

주변의 빈곤을 바라볼 기회를 더욱 닫아버렸다. (pg 9)


약자성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이 사람이 가진 개인적인 특질을 집단 전체로 덮어씌울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자체가 약자에 대한 사회적 태도에요. 

예를 들어 서울역에 다양한 노숙인들이 있지만 그중 한 명만 술에 취해 있어도 "역시 노숙인들은 다 술을 먹는다."라고 하거나, 

한 명만 싸워도 "저 사람들 저래서 안 돼."라고 이야가하죠. (pg 68)


꼭 마을 행사가 아니더라도, 이 동네에 정부나 기업, 종교 단체 등이 와서 주민들한테 뭔가를 계속 나눠줘요.

그러다 보니 여기 있는 분들이 받는 것에 길들여져요.

그래서 진짜 비인간화, 대상화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죠.

주는 사람도 그냥 별 마음 없이 주고, 받는 사람도 감사한 마음이 딱히 안 생겨요. 

오히려 그런 게 당연한 권리처럼, 안 주면 화가 나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pg 193)


우리는 자본주의적 경쟁 속에서 남들보다 우월하게, 남들보다 더 빠르게 노력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그러한 삶에 익숙해져왔다.

불안한 세대인 우리에게는 우울이 지배적인 감정이 되어버렸고 자기 삶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아 

타인의 비참에 눈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세대 안에서 각 개인의 빈곤이란 물질적인 빈곤보다 실존의 빈곤, 관계의 빈곤, 소통의 빈곤이 되었다.

그리고 빈곤은 단절을 낳기에 이르렀다. (pg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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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팬티 예쁘지? 토이북 보물창고 10
프랜 마누시킨 지음, 발레리아 페트로니 그림, 마술연필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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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태어난지도 어느덧 26개월이 지났다. 

말도 빠르고 걷기도 빠르고 키도 또래들보다 커서 잘 자라주고 있구나 싶지만 아직 배변을 가리지는 못하고 있다. 

사실 부모인 나와 집사람이 아직 엄두가 안나서 배변훈련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막상 하면 다른 것들도 금새 따라하는 아이니 잘 해주리라 믿지만 막상 기저귀를 뗀다는 것이 부모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물론 아이에게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기저귀를 뗏다가 자면서 실례를 했을 때 부모가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을 봐야 한다거나  

어린이집에서 실례를 했을 때 선생님이나 친구들 보기에 부끄러운 상황 등을 겪어야 할 터이니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육아 가이드들마다 배변훈련 부분을 보면 훈련 과정에서 아이에게 무리한 스트레스를 주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아직 기저귀를 떼기에는 다소 두려운 아이들을 위해 기저귀를 떼고 팬티를 입는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며 

자신이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주는 매우 훌륭한 그림책이다. 


일단 책이 보기에도 너무 예쁘다.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아이가 뜯어보고는 '내꺼?' '책?' 하면서 좋아한다. 

당장에 달려와서 읽어달라는 아이. 

부모된 입장에서 잘 자는 것, 밥 잘 먹는 것과 더불어 가장 예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책 크기도 아이 혼자 들고 읽기에 적당하고 그림도 너무 귀엽다. 




배변 훈련을 위해 산 아이 변기 위에서 책을 읽어본다. 

 


책이 도착한 날 아이 팬티를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총 7장 구매했다. 

갈아 입힐 때마다 '너도 이제 언니가 되었으니 기저귀 대신 이거 입는거야' 하면서 이 책과 함께 해야겠다.

유아용 그림책이지만 책을 보고 나니 나 스스로도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배변훈련을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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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어떻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나 - 석기 시대부터 부동산 버블까지, 신경인류학이 말하는 우리의 집
존 S. 앨런 지음, 이계순 옮김 / 반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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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고대 그리스인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네 자리를 알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네 집을 알라.'로 변경하려 한다. 
어쨌든 집은 사람들 각각에게 독특한 무엇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 자아와 공간이 결합하는 곳이다. (pg 297)



'집'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올테지만 나같은 집돌이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나에게 '휴가 내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으면 난 대체로 '그냥 집에 있고싶은데'라고 대답하는 편이다. 

여기서의 '집'이란 단순한 주거용 건축물(house)로서의 의미를 넘어, 내가 '집'이라고 느끼는, 매우 사적이면서도 나와 배우자, 

자식만으로 구성된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home)으로서의 의미가 강할 것이다.


이사를 해 본 경험이 있다면, 새로 이사간 집이 왠지 모르게 '우리집' 같은 느낌이 잘 안드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살다보면 금새 이 집이 '우리집'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집에 새로운 가족이 생겼을 때도 그렇다. 

나도 혼자 살다가 결혼을 했을 때, 부부만 같이 살다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잠깐이지만 집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곧 이게 '우리집'이라는 느낌이 생겨났다. 

이처럼 '집'이라는 느낌은 단순히 가옥 구조나 가족 구성원 등 어느 하나의 조건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집'의 느낌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이며 집이 인류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해졌다.


책을 받아들고 제목과 목차를 보니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미드 빅뱅이론의 한 장면을 캡쳐한 사진이 떠올랐다. 


 


위 사진은 우스개 소리지만, 이 책은 쉘든의 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고 학술적인 태도로 풀어가는 책이다. 

'학술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만큼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었다. 
문장 자체가 어렵기도 할 뿐더러 번역이 워낙에 번역체여서 그런지 한번에 이해가 잘 안된다. 
이것이 번역의 문제인지, 원문 자체가 어렵게 쓰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진도가 잘 나가는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게 된 힘은 역시나 '집'이라고 하는 것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인류는 누구나 집에서 살지만, 그 집의 형태는 문화권마다 다 다르다. 
또한 '우리집'이라는 느낌도 물리적인 공간에 국한된 느낌이 아니다. 
같이 사는 구성원, 구성원과의 관계, 그 속에서의 경험들이 축적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우리가 '집'이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아래 문장들도 한번에 이해되진 않는다;;)

주택은 즉석에서 집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배웠던 집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다른 장소와 상황에서 살더라도 집에 있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중략-
우리가 새로운 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걸 언제 알 수 있을까?
그건 몸의 항상성, 신체적, 정신적 피로에서 회복될 거라는 기대, 그리고 사회적 동시성과 연관된 느낌들의 총합이 우리의 거주지를
이 세상에서 다른 누구보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속한 장소로 느끼게 해 줄때다. (pg 78)

또한 '집'이라는 것은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잘 아는 동물들을 잘 생각해보면 집(둥지, 서식지, 거처 등 뭐라고 불리든)을 짓고 사는 동물들은 적지 않다. 
개미, 벌 등 곤충들도 집을 짓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집들이 인류가 생각하는 '집'과 동일한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개미나 벌 등은 아무리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종이라면 같은 종류의 집을 짓고 이는 본능적인 행동에 가깝다.
하지만 인류의 집은 생존 환경이나 가족의 구성, 사회적 계층, 민족과 역사 등에 따라 
모습과 개념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이는 문화적, 사회적인 행동에 가깝다. 

잘 생각해보면 유전학적으로 우리와 가깝다고 느끼는 원숭이과 동물들은 집단을 이루며 살지언정 집을 짓지는 않는다.
저자는 인류가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우리의 뇌가 발달해 온 과정과 관계가 깊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인류와 유전적으로 가까운 원숭이과 동물들은 새끼를 한번에 하나씩 낳는데, 
뇌가 발달한 만큼 그 종의 새끼는 미성숙하게 태어난다. 
새끼가 미성숙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새끼의 뇌가 성장할 때까지 많은 시간과 영양(에너지)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인 원숭이 새끼들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털에 매달려 다니는데 반해 
사람의 아기는 태어나면 스스로 잠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을 보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된 고대인류가 새끼를 성체로 키우기 위한 에너지를 얻으려고 불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이 불을 중심으로 집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집이 만들어지면서 한 거처에 장시간 머물게 되었고, 불을 중심으로 구성원이 모일 수 있는 장소도 생겨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식의 세대간 전수도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불을 이용해 천적과 추위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집은 인류 진화의 증거임과 동시에 인류의 진화를 촉진하는 한 요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전략- 우리는 집의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이렇게 매우 인간적인 시설을 형성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 사실상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러한 요소들이 완전히 현대적인 인간이나 거의 인간에 가까운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진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는초기 호미닌과 대형 유인원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형태의 생명체로부터의 중요하고 혁명적인 출발이었다.
집은 이러한 혁명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pg 159)

이 책은 이렇게 '집'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부터 시작해 현대사회의 인류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까지 
실로 방대한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담고 있다. 
사실 결혼, 출산율 저하의 가장 큰 원인으로 '높은 집값'이 항상 1순위로 거론되는 만큼, 
집은 단순한 '의식주' 중 하나인 생존수단의 개념은 아니다. 
저자는 집의 진화를 이야기하면서 비교적 현대에 등장한 '내 집 마련'의 신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겠지만, '집'을 사는 것(즉 소유하는 것)이 때로는 인생의 최대 목표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주택'이라는 단어를 '집'이라는 단어와 다른 의미로 사용하면서, 
'거처를 소유하는 것'과 '집을 갖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명의로 된 주택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집의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노숙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음성 언어를 말하거나 두 다리로 걷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집을 느끼는 능력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발달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인지적인 부분들이 모여 이것이 가능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집은 다양한 정서와 능력을 포함하고 있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들이 모두 잘 조화되고 있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세계인권선언이 주거를 하나의 권리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은 
주거가 단순히 피난처와 보호의 문제를 넘어선 그 이상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말이다. 
주택과 집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완전히 존재하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중략-
집이 더 이상 바깥세상의 스트레스 요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닐 때, 
또는 집의 조용한 즐거움으로부터 심리적 보상을 얻지 못할 때, 
또는 현실 세계의 맥락에서 집의 존재 자체가 더 이상 분명하지 않을 때, 
집은 인지적인 의미에서 발견하기 더 힘든 공간이 된다. (pg 290)

즉, '주택의 소유' 보다 우리가 중시해야 하는 것은 '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 DNA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 속 여러 요인들로 인해 '집의 느낌'을 잃고 '주택의 소유'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나 자신도 저자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인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네 자리를 알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네 집을 알라.'로 변경하려 한다. 
어쨌든 집은 사람들 각각에게 독특한 무엇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 자아와 공간이 결합하는 곳이다. (pg 297)

멋진 문구이다. 위 구절을 읽고 나니 왠지 이번 주말에는 집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책 자체는 두껍지도 않고 디자인도 훌륭해서 혹하기 쉽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나에게는 다소 어려웠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담긴 지식 자체가 어렵게 느껴졌다기 보다는 문장 자체가 현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딱딱하다고 해야 할까...
여튼 속도가 잘 나지 않는 문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내심 있게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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