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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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내가 언론에 대해 한 가지 아는 바가 있다면, 정부와 국민에게 뭐가 우선이고 뭐가 나중인지 결정하는 주체가 바로 뉴스라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대형 방송사들은 단수 보도에 충분한 분량을 할애하지 않을 것이다.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는 수준의 자극적인 자료 화면을 확보하지 않는 한. 

뉴스에서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할 때는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pg 35)



직관적인 제목에 보기만 해도 목말라 보이는 여성이 그려진 표지.

책을 다 읽고 다시 보니 표지가 이 책의 내용을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460페이지 정도로 살짝 두껍다는 느낌을 주는 책인데 출장길에 나선 기차 안에서 모조리 읽어 버렸을만큼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내용은 굉장히 심플하다.

미국 남부가 배경이며 십대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느날 느닷없이 단수가 시작된다. 

가뭄이 계속 이어지고는 있었지만 물이 끊긴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마트의 물도 동이나고, 물 없이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족과 이웃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책의 핵심 줄거리이다. 


시작과 거의 동시에 단수가 시작되고 이어서 계속 사건들이 이어지기 때문에 한번 책을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하는 마력이 있었다.

책 서두에 소설이 곧 영화화된다고 써 있던데 정말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 내용이다. 

일단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성이 영화로 만들기에 상당히 좋게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은 얼리사라는 십대 후반의 소녀이며 주인공 답게 남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을 가진 성격으로 등장한다. 

얼리사에게는 몇 살 어린 개릿이라는 남동생이 있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 중 가장 어리기 때문에 주로 사고치는 역할을 담당하지만, 고난을 겪으면서 훌륭하게 성장해가는 캐릭터다. 


물을 찾아 집을 나선 부모님이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자 남매는 부모님을 찾으러 길을 나선다.

이 때 옆집에 사는 얼리사의 친구 캘턴이 합류하는데 캘턴의 캐릭터도 상당히 독특하다.

일단 캘턴의 아버지는 비이성적일 정도로 세계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단수가 시작된 이후에도 상당히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만, 금새 이웃들의 타켓이 되어 버린다. 

캘턴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다양한 생존 스킬을 배웠으며 성격도 아버지와 비슷한 편이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에게는 다소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보다는 인정이 있는 편이다. 


길을 떠나면서 재키와 헨리 등 추가적인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재키는 혼자 정처없이 떠돌며 소소한 범죄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이며 약간 '똘끼'가 있다. 

헨리의 경우에는 거래에 굉장히 능하며 사기도 잘치는 능글맞은 성격이다. 

이 둘의 경우에는 다소 현실적이지는 않은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찾는 여정에 있어서 마치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 조연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도 다른 십대들이 모여 절망적인 현실을 헤쳐나가는 여정이기에 당연히 갈등과 불화가 이따른다.

때로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하지만, 남은 물을 함께 나눠 마시며 서로의 생존을 돕기도 하고 

뒤쳐지는 친구를 안고 불길을 뚫기도 한다.  


물 부족으로 마치 좀비처럼 변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잔혹한 모습도 충격적이다. 서로 죽고 죽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어려움을 헤쳐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우정과 인류애도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살짝 두껍게 느껴졌지만, 문장이 쉽고 간결한 편이며 내용 전개도 빠르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지루함 없이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죽는 내용이 있기는 하나 묘사가 잔인한 편은 아니었으며, 뭔가 끈적한 스킨십이 등장할 법한 장면에서도 그냥 농담으로 퉁치는 등

영화로 만들었을 때 심의까지 고려한 듯한 전개도 종종 보였다. 

내용 자체는 아주 재미있는 편이지만, 문학에서 기대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아 이 부분은 좀 아쉬웠다. 

(물론 독자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일부러 문장을 쉽고 깔끔하게 쓴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었던 구절들을 남겨본다. 


어릴 때는 누구나 부모를 우러러본다. 우리 눈에 비친 부모님은 완벽하다. 

주변 세상과 나 자신을 재단하는 척도니까.

십 대가 되면 슬슬 부모님이 훼방꾼처럼 느껴진다. 더는 완벽하지 않을뿐더라 심지어 내 인생을 쥐고 흔드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부모님은 영웅도 아니고 악당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나약한 인간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pg 180)


그렇다.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을 때 가장 괴로운 점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유리를 깨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묵묵히 쓸어 담고 남은 유리 조각을 밟지 않길 바라는 것뿐이다. (pg 376)


자연재해 중 가뭄으로 인한 단수란 피부에 와닿는 주제는 아닐 수 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단수가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가 많지 않고 태풍이나 해일에 비해 피해가 클 것이라 예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단수는 그리 호락호락한 재해가 아니었다.

단순히 물이 생존에 필수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인간이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 얼마나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비록 픽션이지만 그 속에서 본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과 절박함 속에서의 심리변화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자연을 보호하고 미리 예방하지 않으면 심각한 재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재해를 통해 인간 사회도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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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
케빈 크로슬리-홀랜드 지음, 제프리 앨런 러브 그림, 김영옥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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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신이라고 모두 선하지는 않아. 그리고 거인이나 난쟁이라고 모두 나쁘지도 않지. 

 네가 최선의 모습일 때를 생각해봐, 강글레리. 그때가 바로 네가 가장 신과 같을 때야.

 이제, 네가 최악의 모습일 때를 생각해봐. 그때가 바로 네가 가장 거인과 난쟁이 같을 때지." (pg 27)



북유럽 신화가 이렇게까지 조명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마블 영화'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낯선 이미지였던 북유럽 신화 속 인물들을 우리가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영상물로 구현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에 적힌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라는 문구만 보아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세 명의 배우를 떠올릴 수 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실제 신화를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 등장한 것 같아 얼른 보고 싶었다. 


일단 받아 들자마자 기분 좋은 묵직함이 있다. 

책의 페이지는 300페이지 미만으로 크게 두껍지는 않으나 종이의 크기 자체가 일반적인 책에 비해 굉장히 크다. 

책장을 휘휘 넘기다 보면 간결하지만 인상적인 색채들의 일러스트와 정갈하게 번역된 신화 이야기가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특히 이 책을 소개하면서 일러스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책의 매 페이지마다 감각적인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검은색 위주로 마치 그림자처럼 표현하고 있고, 등장하는 장면들에 맞게 배경에 색채가 더해지는데,

그림을 보는 재주가 없는 편인 내 눈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깔끔하면서 주제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었던 그림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아래 그림에서 맨 우측은 로키, 가운데는 토르인데 좌측에 기묘하게 생긴 신이 있다.

이 신이 '다리가 긴 자'라고 불리는 호니르이다. 누가 봐도 다리가 긴 자이다. 


 

(pg 172-173)


글씨가 작은 편이지만, 일러스트의 비중이 크므로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의 자녀가 있다면 함께 읽어도 재밌을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유럽 신화 속 다양한 신과 거인, 난쟁이들이 등장하지만 부제에 충실하게 핵심 이야기들은 오딘과 토르, 로키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그런 편이지만, 북유럽 신화 역시 등장인물들이 인간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물론 묘사되는 외형적인 특징들이야 신과 거인, 난쟁이들이 각기 특이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그 행동의 동기들을 살펴보면 매우 인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은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몸 담고 있는 조직이 평균적인 조직이라면 한번쯤 겪어본 일일 것이다. 


오딘은 한때 아스가르드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이제는 부서져버린 거대한 성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략-

"우선, 아스가르드 전체를 두르는 성벽을 다시 지어야 합니다. -중략-"


오딘의 아내, 프리가가 물었다. 

"그럼 누가 건축을 담당하지요? 우리 중에 어느 신이 지을 건가요?"


초목과 황금의 신들을 이끄는 신, 프레이르가 말했다. 

"나는 작물을 자라고 익게 만들 수는 있지만 벽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청춘의 황금 사과를 지키는 신, 이둔이 말했다. 

"나는 건축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벽을 짓는 모든 이에게 매일 사과를 한 알씩 주겠습니다. 

 그러면 벽이 완성되는 날까지 처음 시작했던 때의 그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거에요."


황금빛 머리칼이 돋보이는 토르의 아내, 시프가 말했다.

"우리도 하고 싶습니다. 

 거인들을 비롯해 저 아래 세상에 있는 음흉하고 무서운 존재들을 막아내려면 벽이 꼭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신들은 석공이 아닙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성벽을 지을 수 없을 겁니다."


토르가 외쳤다.

"심지어 나도 저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짓진 못하겠습니다!"


오딘이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할 줄 아는 말이 '할 수 없다'와 '못 하겠다' 뿐인가 보군요." -후략- (pg 31)


다소 기니 3줄 요약을 하자면,

신들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아스가르드의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재건을 하려고 하는데 모든 신들이 자신이 원래 하던 일이 아니므로 본인은 못하겠고, 

하겠다는 자가 있으면 도와는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결국은 할 수 있는 다른 자(난쟁이)를 찾는데, 이마저도 일을 다 끝내고 약속한 보상을 주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린다.

결국 신이 난쟁이를 등쳐먹는 엔딩으로 끝이 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는 근엄하기 그지 없는 오딘이지만, 토르가 자신을 구해준 아들에게 적이 타고 다니던 훌륭한 말을 선물하려고 하자

말을 탐낸 오딘이 손자 대신 나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며 징징대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건 어지간한 인간 할아버지도 하지 않을만한 짓이다;;)

후반부에 이러한 신들의 모습을 조롱하는 로키의 독백이 등장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로키는 툭하면 신이 나서 야단법석인 신들을 경멸하듯 쳐다봤다.

'저런, 아주 어린애가 따로 없군. 절대 어른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야. 

 저들이 내 꾀에 매번 속아 넘어가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니까.' (pg 203)


결국 우리는 신화라는 형태를 빌려 우리와는 다른, 보다 강하고 영속적인 존재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지만 

그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회의 단면들을 보게 된다. 

신화 역시 인간의 창작물이므로 이러한 면들이 인간이 가지는 상상력의 한계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신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욕구와 동기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화를 믿고 따르던 당시 사람들에게 위안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신화라는 이야기가 갖는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북유럽 관련 책을 두 번째 읽은 것인데, 이전에 접한 작품과는 그 형태가 아주 달라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전에 봤던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서평: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0581182520)에서는

각 신화 속 인물 별로 세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방대한 양으로 훑는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 책은 부제에 충실하게 세 명의 신 위주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흥미를 높였다. 

두 책을 굳이 비교하자면 정보의 양적인 측면에서는 이전에 본 책이, 독서의 즐거움 측면에서는 이 책이 더 훌륭했다. 


이 책 하나만 놓고 보자면, 이 책을 모두 읽고서 '아, 난 이제 북유럽 신화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라고 자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유럽 신화 속 인물들의 이름이 익숙하다면 다채로운 그림과 함께 즐겁게 읽으면서 

북유럽 신화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에는 더할 나위없이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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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의 발견 - 오늘부터 가볍게 시작하는 일상 우울 대처법
홋시 지음, 정지영 옮김 / 블랙피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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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상깊은 구절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는 제멋대로 세상에 태어나 제멋대로 죽는 존재다.

사실 살아가는 목적이나 사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이라는 커다란 시점에서 생각하면 자손을 남긴다는 목적이 있을 뿐이다. 

아무런 사명도 목적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스스로 정하면 된다. (pg 161)



뭐 읽을 만한 책 없나 인터넷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던 중 눈에 띄는 책 소개를 발견했다.

요즘 의욕이 많이 없어져서 고민이었는데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우울증을 겪고 퇴사했다가 약물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자신에게 이런 저런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고, 

그 중 효과가 있었던 것들을 묶어 이렇게 책을 펴 내게 되었다고 한다. 


우울증.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젠 짜증이 나는 단어다.


최근에 우울증으로 친동생을 잃었다.

우울증을 겪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도 있겠지만, 우울증을 가진 사람과는 말을 섞는 것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다.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듣고 있다 보면 끊임없는 자책과 세상에 대한 원망 속으로 빠져든다. 

위로하려고 하면 '니가 뭘 아느냐'고 하고 공감해주다 보면 '역시 나 같은 건 살 필요가 없지' 따위의 말들로 대화가 이어진다.

진짜 우울증 환자들 카운슬링 하는 심리치료사들은 죽으면 사리가 엄청 나올거다. 


동생이 우울증 진단을 처음 받은 것이 12, 13년 전이니 우리 식구들은 10년이 넘게 우울증을 가진 가족을 알고 지낸 셈이다.

물론 나도 동생도 집 나와 산지 오래 되서 사실 얼굴 볼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툭툭 올라오는 동생의 우울증은 굉장히 신경 거슬리는 일이었다. 


더욱 짜증나는 것은 동생 사후에 그 우울함이 다른 식구들에게도 전염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엄마도 내 딸 아이와 잘 놀다가도 가끔 눈물을 글썽이는가 하면, 나도 뭔가 요즘 의욕이 없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일이 한참 바쁠 시즌이어서 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팔, 이렇게 살아 뭐하나'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배송 오자마자 약간의 당혹감이 들었다. 

우울증 환자가 쓴 책이라고 해서 약간은 칙칙한 책을 떠올렸는데 귀엽기 그지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인사를 하고 있다. 

(집사람이 표지 귀엽다고 엄청 좋아했다.)

(앞 표지)


한없이 귀여운 표지였지만 책을 받아 들자마자 동생 얼굴이 떠올라 미간이 찌뿌려졌다. 

만약 한 1년 전에 내가 이 책을 알게 되어서 동생에게 선물했다면 그 자식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책 읽을 마음의 여유는 있었을까? 이런거까지 선물한다며 내 인생 갈 때까지 갔다고 더 싫어했을까?


여하간 찜찜한 마음으로 책을 폈다. 

우울증 환자들은 어떤 것 하나에 깊이 집중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한다고 저자도 밝히고 있기 때문인지, 

방법들 하나하나가 길지 않고 문장도 간결한 편이다. 

더구나 페이지 순서대로 쭉 읽을 필요도 없다. 

목차만 보고 땡기는 것만 읽어도 좋을 구성으로 되어 있다. 


책을 처음 접할 때에는 저자가 일본인인줄은 몰랐는데 책이 일본어 번역투여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흔히 말하는 오타쿠 말투가 더러 눈에 띈다.)


​책 뒷표지 날개 부분에 보면 자신의 우울 정도를 간단히 체크할 수 있는 리스트가 있다.

여기에 하나라도 해당이 된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리스트를 보면서 '여기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긴 한가?' 라고 생각했는데

집사람한테 물어보니 집사람은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단다;;;

여하간 난 두어개쯤은 해당되는 것 같아서 진지한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참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당사자가 직접 쓴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현상에 대한 대책을 이야기하면서 그 현상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제시하는 대책은 영 현실적이지 

못할 때도 많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 썩 신뢰가 가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자가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을 쉽고 간단하게 잘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나름대로 난이도와 효과까지 자신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제시해주고 있다. 


슬프지만, 우울증을 앓아본 적 없으면서 이 병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하는 법이다. -중략-

심지어 같은 우울증 환자라고 해도 서로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도, 우울증도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를 세운 다음 "알아주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 정도만 알아줘도 충분해!"라고

스스로 긍정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pg 151)


다 읽고 난 소감이지만, 나는 걱정한 것처럼 그렇게까지 우울한 편은 아닌 모양이다. 

작가가 병을 앓고 있을 때를 서술한 부분들을 보면 난 그 정도까지 심각한 수준은 분명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작가가 제시한 해결책 중에서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들이 꽤 되었다.

무언가 집중할 거리를 찾아 책을 읽는다든지, 게임을 한다든지, 출퇴근 길에 되도록이면 걷는다든지 등등

나도 모르게 요즘 들어 자주 하는 것들이 해결책으로 많이 제시가 되어 있었다. 

최근에 음주하는 빈도와 강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점은 다소 우려스럽지만, 그래도 술 대신 다른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조만간 이런 습관도 조금씩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덮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책이 좀 더 일찍 나왔었다면 동생에게 추천해줄 수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과연 동생의 삶에도 변화가 있었을까? 너무 궁금해진다.

내 동생과 같은 상황에 있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도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우울증 환자가 책을 진득하게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이 이 글을 쓰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읽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울증 환자는 늘어가는 추세다.

출산율도 나날이 감소하는데 그나마 태어난 사람들 중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으니 정말 문제는 문제다.

이런 현상에 경종을 울리는 글들은 넘쳐나지만, 그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런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는지를 알려주는

책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미가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부분이 괜찮았지만, 번역에 있어서 원문을 너무 충실하게 살리느라 약간 일본어를 쓰는 오타쿠 느낌이 드는

문장들이 더러 눈에 띄여서 다소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었다.


서평에 채 담지 못했지만 인상적이었던 구절들을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일기는 작은 행복을 줍는 훈련이다. (pg 093) 


세상에는 잘난 체하며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이 많고, 칭찬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지 않으면 인생이 괴로워진다. 

그러니 자신의 재능에도 눈을 돌려보자.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의 달리기 실력이나 피카소의 그림처럼 뛰어난 재능이 아니어도 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잘하는 능력 정도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 (pg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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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사랑을 배운다
그림에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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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연인에서 부부가 되고 부부에서 부모가 된다.

그렇게 예측 가능한 수순에서도 겪어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 중략 -

당연히 부모가 아이를 키우게 될 거란 생각.

실상은 아빠를 아빠로, 엄마를 엄마로 키우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단 걸 알았다.

어쩌면 세 아이가 보호자 없이 함께 자라고 있는 셈이다. (pg 214)



이런 제목을 가진 책이 집에 도착할 거라고 아내에게 얘기하자 아내가 "자기가 이 책을 본다고? 웬일로?"라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아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실은 책 소개를 보면서 내가 보고 싶다기 보다는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었다.



예쁜 샛노랑 표지에 아이와 엄마가 사랑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담긴 표지를 보니 뭔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이 책 가득 실려있을 것 같아서 육아를 하는 아내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소개를 보니 인스타그램에 그림과 글을 연재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책은 조금 얇다 싶은 두께에 그림이 절반, 나머지 절반도 글이 3분의 1, 여백이 3분의 2이다.

전형적으로 인스타에서 볼 수 있는 글들을 책으로 그대로 옮긴 느낌이 든다.

그냥 그림 보면서 글만 읽겠다 하면 30-40분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분량이지만, 

이런 책들이 대체로 그렇듯 한번에 쭉 읽기 보다는 옆에 두고 커피 한잔 하면서 한 두장씩 보는 것이 제 맛일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생각보다 공감되는 것이 많지 않았다.

워낙 감성만 담겨 있는 책이어서 그럴까. 

구체적인 컨텍스트 없이 단편적인 감상들만 주욱 나열해 두고 페이지가 넘어가면 바로 다른 감상이 이어지다보니 

확실히 몰입도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뭐랄까...정말 인스타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 최적화 된 컨텐츠를 구태여 종이책의 형태로 묶은 느낌이랄까.

SNS에 올라온 컨텐츠를 책 읽는 것처럼 처음부터 정독하면서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 하나, 사진 하나 보면 바로 다른 사람의 다른 글과 사진들로 넘어가면서 보게 된다. 

그렇게 일정 시간의 간격을 두고 드문 드문 올라오는 감성적인 글과 그림이라면 스쳐 지나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겠지만 

책이라는 매체는 한번 집어 든 이상 한 장만 읽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진짜로 집에서 커피 한잔 하면서 옆에 있는 책 중에 하나를 꺼내 들어 아무데나 펴고 읽는 것이 아니라면

출퇴근 길 지하철 같은 곳에서 펴들고 쭉 읽는 맛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책이 가지는 물리적인 공간의 한계라는 특성이 이런 컨텐츠에게는 맞지 않는 형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g 78-79)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찍은 페이지처럼 일반적인 부부라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게 만드는 부분들도 있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가슴 한 켠을 울컥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부분들도 많다.

단지 나와는 좀 맞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아직 철이 덜 든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저자보다는 아내나 아이에게 충실한 남편이자 아빠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돈은 저자가 훨씬 더 많이 벌겠지만)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 상황이야 누구나 비슷한 아픔과 기쁨을 겪겠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들은 집집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집은 글쎄...집사람 이야기도 들어 봐야겠지만 저자의 상황에 비하면 아내가 전업맘이니 아이가 늦게까지 보육시설에 있지도 않고

나도 평균적인 직장인에 비해 퇴근이 빠른 편이라서 아이가 집에 오고 2시간 뒤면 집에서 아이와 함께 한다.

아내에게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일이어서 집사람 시간을 보장해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편이고

아이가 잠드는 순간 우리 부부도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모든 집안일을 9시 이전에 끝내고 있다.

(사람들이 믿지 않지만 나는 평일에도 집안일을 꽤 많이 한다. 날 아는 사람들은 아내에게 물어보아도 좋다.)


뭐, 이건 그저 남편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내가 보면 또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는 다 봤으니 아내에게 감상의 바톤을 넘겨야겠다. 

아내가 읽고서 재밌었다고 한다면 이 책을 접하게 된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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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1 : 인간은 외모에 집착한다 (5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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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생기고 나서 아이들 책을 종종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은 사실 아이 핑계로 읽게 된 것은 아니다.

책 소개를 보는데 내가 너무 궁금해서 꼭 보고 싶었다. 

(내 딸이 이 책을 보려면 적어도 8년 정도는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정재승이라는 익숙한 이름에 '인간은 외모에 집착한다'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진짜 인간은 왜 외모에 집착하는걸까?



(좌측: 동봉된 Brain Map 브로마이드, 우측: 책 표지)


이렇게 아이들이 좋아할법한 다소 정신없어 보이는 표지를 하고 있다.

게다가 부록으로 뇌에 관한 정보가 가득 담긴 브로마이드가 딸려온다.

(아이 방에 이런거 하나 붙여 두면 얼마나 있어 보일까!)


아이들을 타겟으로 한 책이니 내용이 전혀 어렵진 않았다. 

성인 기준으로는 20-30분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과 내용이었다. 


나의 니즈는 인간이 외모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나도 그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정말 부제에 충실하게 '인간은 외모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전달해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고자 했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는데도 별점이 후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사실 정재승 교수의 이름은 알쓸신잡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더 기대가 되었다.

정재승 교수가 쓴 어린이용 뇌과학 책은 얼마나 쉽고 친절하게 정보를 전달해줄지 궁금했다.

이 책에서 택한 접근법은 인간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외계에서 온 외계인 무리가 지구인을 관찰한다는 스토리이다.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처럼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아하는 접근법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아이들을 위해 만화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아래의 페이지가 그나마 텍스트가 많은 페이지에 속하며 대부분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pg 70-71)


또한 각 챕터 마지막에 외계인이 쓴 관찰보고서의 형태로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어서 

아이들에게 책을 권하는 부모에게도 긍정적으로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토리 자체도 재미있고 등장하는 외계인과 지구인들도 나름 캐릭터 설정이 잘 되어 있어서 지들끼리 티격대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이게 1권이고 계속 시리즈로 나온다고 하니 이 외계인들이 지구인의 어디까지 알게될지 계속 궁금해진다. 

고등학생 정도 되면 약간은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 정도라면 재밌게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딸도 빨리 커서 이런 책을 보며 아빠와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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