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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내가 언론에 대해 한 가지 아는 바가 있다면, 정부와 국민에게 뭐가 우선이고 뭐가 나중인지 결정하는 주체가 바로 뉴스라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대형 방송사들은 단수 보도에 충분한 분량을 할애하지 않을 것이다.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는 수준의 자극적인 자료 화면을 확보하지 않는 한.
뉴스에서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할 때는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pg 35)
직관적인 제목에 보기만 해도 목말라 보이는 여성이 그려진 표지.
책을 다 읽고 다시 보니 표지가 이 책의 내용을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460페이지 정도로 살짝 두껍다는 느낌을 주는 책인데 출장길에 나선 기차 안에서 모조리 읽어 버렸을만큼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내용은 굉장히 심플하다.
미국 남부가 배경이며 십대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느날 느닷없이 단수가 시작된다.
가뭄이 계속 이어지고는 있었지만 물이 끊긴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마트의 물도 동이나고, 물 없이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족과 이웃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책의 핵심 줄거리이다.
시작과 거의 동시에 단수가 시작되고 이어서 계속 사건들이 이어지기 때문에 한번 책을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하는 마력이 있었다.
책 서두에 소설이 곧 영화화된다고 써 있던데 정말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 내용이다.
일단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성이 영화로 만들기에 상당히 좋게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은 얼리사라는 십대 후반의 소녀이며 주인공 답게 남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을 가진 성격으로 등장한다.
얼리사에게는 몇 살 어린 개릿이라는 남동생이 있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 중 가장 어리기 때문에 주로 사고치는 역할을 담당하지만, 고난을 겪으면서 훌륭하게 성장해가는 캐릭터다.
물을 찾아 집을 나선 부모님이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자 남매는 부모님을 찾으러 길을 나선다.
이 때 옆집에 사는 얼리사의 친구 캘턴이 합류하는데 캘턴의 캐릭터도 상당히 독특하다.
일단 캘턴의 아버지는 비이성적일 정도로 세계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단수가 시작된 이후에도 상당히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만, 금새 이웃들의 타켓이 되어 버린다.
캘턴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다양한 생존 스킬을 배웠으며 성격도 아버지와 비슷한 편이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에게는 다소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보다는 인정이 있는 편이다.
길을 떠나면서 재키와 헨리 등 추가적인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재키는 혼자 정처없이 떠돌며 소소한 범죄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이며 약간 '똘끼'가 있다.
헨리의 경우에는 거래에 굉장히 능하며 사기도 잘치는 능글맞은 성격이다.
이 둘의 경우에는 다소 현실적이지는 않은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찾는 여정에 있어서 마치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 조연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도 다른 십대들이 모여 절망적인 현실을 헤쳐나가는 여정이기에 당연히 갈등과 불화가 이따른다.
때로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하지만, 남은 물을 함께 나눠 마시며 서로의 생존을 돕기도 하고
뒤쳐지는 친구를 안고 불길을 뚫기도 한다.
물 부족으로 마치 좀비처럼 변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잔혹한 모습도 충격적이다. 서로 죽고 죽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어려움을 헤쳐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우정과 인류애도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살짝 두껍게 느껴졌지만, 문장이 쉽고 간결한 편이며 내용 전개도 빠르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지루함 없이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죽는 내용이 있기는 하나 묘사가 잔인한 편은 아니었으며, 뭔가 끈적한 스킨십이 등장할 법한 장면에서도 그냥 농담으로 퉁치는 등
영화로 만들었을 때 심의까지 고려한 듯한 전개도 종종 보였다.
내용 자체는 아주 재미있는 편이지만, 문학에서 기대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아 이 부분은 좀 아쉬웠다.
(물론 독자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일부러 문장을 쉽고 깔끔하게 쓴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었던 구절들을 남겨본다.
어릴 때는 누구나 부모를 우러러본다. 우리 눈에 비친 부모님은 완벽하다.
주변 세상과 나 자신을 재단하는 척도니까.
십 대가 되면 슬슬 부모님이 훼방꾼처럼 느껴진다. 더는 완벽하지 않을뿐더라 심지어 내 인생을 쥐고 흔드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부모님은 영웅도 아니고 악당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나약한 인간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pg 180)
그렇다.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을 때 가장 괴로운 점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유리를 깨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묵묵히 쓸어 담고 남은 유리 조각을 밟지 않길 바라는 것뿐이다. (pg 376)
자연재해 중 가뭄으로 인한 단수란 피부에 와닿는 주제는 아닐 수 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단수가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가 많지 않고 태풍이나 해일에 비해 피해가 클 것이라 예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단수는 그리 호락호락한 재해가 아니었다.
단순히 물이 생존에 필수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인간이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 얼마나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비록 픽션이지만 그 속에서 본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과 절박함 속에서의 심리변화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자연을 보호하고 미리 예방하지 않으면 심각한 재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재해를 통해 인간 사회도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