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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
케빈 크로슬리-홀랜드 지음, 제프리 앨런 러브 그림, 김영옥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인상깊은 구절
"신이라고 모두 선하지는 않아. 그리고 거인이나 난쟁이라고 모두 나쁘지도 않지.
네가 최선의 모습일 때를 생각해봐, 강글레리. 그때가 바로 네가 가장 신과 같을 때야.
이제, 네가 최악의 모습일 때를 생각해봐. 그때가 바로 네가 가장 거인과 난쟁이 같을 때지." (pg 27)
북유럽 신화가 이렇게까지 조명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마블 영화'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낯선 이미지였던 북유럽 신화 속 인물들을 우리가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영상물로 구현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에 적힌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라는 문구만 보아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세 명의 배우를 떠올릴 수 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실제 신화를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 등장한 것 같아 얼른 보고 싶었다.
일단 받아 들자마자 기분 좋은 묵직함이 있다.
책의 페이지는 300페이지 미만으로 크게 두껍지는 않으나 종이의 크기 자체가 일반적인 책에 비해 굉장히 크다.
책장을 휘휘 넘기다 보면 간결하지만 인상적인 색채들의 일러스트와 정갈하게 번역된 신화 이야기가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특히 이 책을 소개하면서 일러스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책의 매 페이지마다 감각적인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검은색 위주로 마치 그림자처럼 표현하고 있고, 등장하는 장면들에 맞게 배경에 색채가 더해지는데,
그림을 보는 재주가 없는 편인 내 눈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깔끔하면서 주제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었던 그림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아래 그림에서 맨 우측은 로키, 가운데는 토르인데 좌측에 기묘하게 생긴 신이 있다.
이 신이 '다리가 긴 자'라고 불리는 호니르이다. 누가 봐도 다리가 긴 자이다.
(pg 172-173)
글씨가 작은 편이지만, 일러스트의 비중이 크므로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의 자녀가 있다면 함께 읽어도 재밌을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유럽 신화 속 다양한 신과 거인, 난쟁이들이 등장하지만 부제에 충실하게 핵심 이야기들은 오딘과 토르, 로키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그런 편이지만, 북유럽 신화 역시 등장인물들이 인간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물론 묘사되는 외형적인 특징들이야 신과 거인, 난쟁이들이 각기 특이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그 행동의 동기들을 살펴보면 매우 인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은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몸 담고 있는 조직이 평균적인 조직이라면 한번쯤 겪어본 일일 것이다.
오딘은 한때 아스가르드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이제는 부서져버린 거대한 성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략-
"우선, 아스가르드 전체를 두르는 성벽을 다시 지어야 합니다. -중략-"
오딘의 아내, 프리가가 물었다.
"그럼 누가 건축을 담당하지요? 우리 중에 어느 신이 지을 건가요?"
초목과 황금의 신들을 이끄는 신, 프레이르가 말했다.
"나는 작물을 자라고 익게 만들 수는 있지만 벽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청춘의 황금 사과를 지키는 신, 이둔이 말했다.
"나는 건축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벽을 짓는 모든 이에게 매일 사과를 한 알씩 주겠습니다.
그러면 벽이 완성되는 날까지 처음 시작했던 때의 그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거에요."
황금빛 머리칼이 돋보이는 토르의 아내, 시프가 말했다.
"우리도 하고 싶습니다.
거인들을 비롯해 저 아래 세상에 있는 음흉하고 무서운 존재들을 막아내려면 벽이 꼭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신들은 석공이 아닙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성벽을 지을 수 없을 겁니다."
토르가 외쳤다.
"심지어 나도 저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짓진 못하겠습니다!"
오딘이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할 줄 아는 말이 '할 수 없다'와 '못 하겠다' 뿐인가 보군요." -후략- (pg 31)
다소 기니 3줄 요약을 하자면,
신들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아스가르드의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재건을 하려고 하는데 모든 신들이 자신이 원래 하던 일이 아니므로 본인은 못하겠고,
하겠다는 자가 있으면 도와는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결국은 할 수 있는 다른 자(난쟁이)를 찾는데, 이마저도 일을 다 끝내고 약속한 보상을 주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린다.
결국 신이 난쟁이를 등쳐먹는 엔딩으로 끝이 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는 근엄하기 그지 없는 오딘이지만, 토르가 자신을 구해준 아들에게 적이 타고 다니던 훌륭한 말을 선물하려고 하자
말을 탐낸 오딘이 손자 대신 나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며 징징대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건 어지간한 인간 할아버지도 하지 않을만한 짓이다;;)
후반부에 이러한 신들의 모습을 조롱하는 로키의 독백이 등장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로키는 툭하면 신이 나서 야단법석인 신들을 경멸하듯 쳐다봤다.
'저런, 아주 어린애가 따로 없군. 절대 어른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야.
저들이 내 꾀에 매번 속아 넘어가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니까.' (pg 203)
결국 우리는 신화라는 형태를 빌려 우리와는 다른, 보다 강하고 영속적인 존재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지만
그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회의 단면들을 보게 된다.
신화 역시 인간의 창작물이므로 이러한 면들이 인간이 가지는 상상력의 한계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신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욕구와 동기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화를 믿고 따르던 당시 사람들에게 위안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신화라는 이야기가 갖는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북유럽 관련 책을 두 번째 읽은 것인데, 이전에 접한 작품과는 그 형태가 아주 달라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전에 봤던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서평: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0581182520)에서는
각 신화 속 인물 별로 세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방대한 양으로 훑는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 책은 부제에 충실하게 세 명의 신 위주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흥미를 높였다.
두 책을 굳이 비교하자면 정보의 양적인 측면에서는 이전에 본 책이, 독서의 즐거움 측면에서는 이 책이 더 훌륭했다.
이 책 하나만 놓고 보자면, 이 책을 모두 읽고서 '아, 난 이제 북유럽 신화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라고 자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유럽 신화 속 인물들의 이름이 익숙하다면 다채로운 그림과 함께 즐겁게 읽으면서
북유럽 신화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에는 더할 나위없이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