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들 걷는사람 소설집 4
임성용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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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혼자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신은 알고 있다. 

적당히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혼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스팔트 위의 중앙선처럼, 될 수 있는 대로 중앙으로, 할 수 있는 만큼 가지런하게, 끝없이 이어지며 내버려 둘 수 있는 혼자.

말 그대로 그대로의 혼자. (pg 105)



설 연휴에도 집, 삼일절 연휴에도 집에만 있다보니 좋은 책과의 만남도 잦아지는 것 같다.

이번에도 생소한 작가의 단편집을 만났다.

책 소개를 보고 선택하는 것이니 당연히 내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겠으나, 

종종 실패도 하는 걸 보면 책과의 인연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처럼 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책은 내 취향에 너무도 잘 맞아 읽은 소감을 쓰는 마음이 한결 가볍다.


230여 페이지에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최근에 읽은 단편집들이 대체로 너무 짧은 호흡이어서 아쉬움을 주었던 것에 반해 이번 단편집은 일단 길이면에서도 마음에 들었다. 

단편집이니 각각의 이야기들마다 주제가 있지만 작품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들이 비슷해서 

마치 한 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이야기들이 매우 어둡다. 그러면서도 또 무겁다. 

단편이지만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을 장면들이 여럿 등장한다. 

특히나 살인이 스토리 진행에 큰 영향을 주는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예 화자의 직업이 살인청부업자여서 일거리를 처리하듯 진행되는 살인부터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살인, 

이념 대립으로 인한 맹목적인 살인 등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와 역사의 어두운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공원 조 씨'와 책의 제목이기도 한 '기록자들'은 내용 일부가 겹쳐지며 같은 세계관 속 다른 이야기라는 느낌도 전해준다. 

'공원 조 씨'만 읽은 뒤에는 인재(人災)로 가족을 잃은 한 정신병자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 같지만 

'기록자들'까지 읽고 나면 뭔가 '공원 조 씨'에도 더 큰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위 두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총 7개의 단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맹순이 바당'일 것이다.

제주 4.3 항쟁으로 남편을 잃고 낯선 곳으로 도망쳐 자신을 지우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 서사가 여느 장편소설 못지 않게 탄탄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준다. 

본 작품이 2018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라 하니 제목으로 검색하면 원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끝분은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들러붙은 빨갱이 여편네 냄새가 가려져야 했다. 

누가 들어도 우스운 이름이어야 한다. 끝분은 점례 동생 순이를 떠올렸다. 

이름은 순이였지만 맹한 구석이 있어 동네사람들이 맹순이로 불렀다. 

끝분은 맹순이가 되기로 했다. (pg 172)

물론 다른 작품들 역시 충분한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편이니 이런 '어두침침한', 그러면서도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도 후회없는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제주 4.3 항쟁이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의 피해자들, 88올림픽 당시 소외된 계층 등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만한 

역사적 장면들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어서 작품 속 이야기들의 현실감도 높이고 등장인물에 공감하기도 쉽다.

책의 후반부에 작가의 말이 실려 있는데 작가가 이런 느낌의 작품을 쓰게 된 심리적 배경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시선과 선택은 늘 지하를 향했다.

눅눅한 지하에서 환상을 이야기하고, 지상의 세상을 헐뜯었다.

산등성이보다 골짜기를 좋아하고 그늘이 없는 사람은 사귈 수 없었다.

쇼윈도 속의 동물보다 버려진 짐승들에게, 온화한 스승보다는 괴팍한 스승에게 마음이 더 갔다. (pg 231)


뭔가 내 성향과 비슷한 작가를 한 명 더 알게된 것 같아 기쁘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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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모 있는 어원잡학사전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시리즈
패트릭 푸트 지음, 최수미 옮김 / CRETA(크레타)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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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는 것이 의사소통의 기본 매개이다 보니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자연히 언어도 변화하게 된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 사용하는 단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빈번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리즈시절'이라는 단어의 '리즈'가 축구팀 이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듯이 말이다. 


이 책은 오랜 세월 사용해 온 영어 단어들의 어원을 작가가 마음 가는 대로 정리해 모아둔 책이다. 

국가나 지역 이름, 생물, 제품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독자들의 흥미를 이끈다. 

각각의 어원들은 길어야 2-3페이지 정도로 짧게 정리되어 있다. 

제목에서도 '잡학'이라고 밝혔고 책의 분량이나 깊이로 볼 때 언어학을 바탕으로 한 심도있는 내용은 아니다. 

작가도 학자가 아닌 유투버라고 하니 뭔가 대단한 지식을 마주한다기 보다는 몰랐던 사실들을 흥미롭게 줏어듣기 좋을 것 같아 

접하게 된 책이다. 


목적에 맞게 각 단어별 어원을 짧지만 꽤나 충실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문체도 너무 진지하지 않으면서 마냥 가볍게 읽히지도 않게 완급을 잘 조절한 것 같다. 

각 단어들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고,

출퇴근 길에 가볍게 한 두 페이지씩 읽기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아쉬움도 좀 남았던 책이다.

일단은 원문 자체가 영어권 독자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거나 공감하기 어렵게 쓰여진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번역가도 나름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가 재미있을 거라고 적었을 법한 문장들이 크게 재미 요소로 와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어 자체의 기원을 다루는 책이니만큼 언어의 장벽을 넘기가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특히 우리가 해당 단어를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동물'편에서 이런 면이 좀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때문에 '동물'쪽에서는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그 중에서는 유독 '하마'가 인상적이었다.

하마가 한자로 河馬, 즉 강에 사는 말이라는 뜻인데 영어 'Hippopotamus'의 어원도 강에 사는 말이라는 뜻이란다. 

전혀 말처럼 생기지 않은 동물인데 의외로 어원에 충실하게 국문화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의 동물을 국어로 표현할 때 원래 그렇게 하나 싶기도 했지만 이후에 등장한 기린은 한자 '麒麟'과 'Giraffe'의 어원에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아쉬운 점이 없진 않았지만 이 책을 접하게 될 사람들에게는 동물 이후에 등장하는 '사물과 소유물' 부터

재미가 쭉 올라가게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우리도 화장실에서 '비데'를 쓰면서 '구글'을 검색하니 그런 단어들의 어원은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레고'의 뜻이 '잘 놀다'였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언젠가 엄마가 집사람에게 나 키우던 얘기를 하시면서 '쟤는 레고 하나만 던져주면 하루종일 잘 놀았어'라고 하셨었는데,

어원을 알고나니 레고는 정말 이름값을 잘 하는 장난감이었던 모양이다. 


여하간 긴 연휴동안 양가 어디도 못가고 집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동안 짬짬히 보기에 좋았던 책이었다. 

어원 자체를 알아가는 재미는 큰 편이기 때문에 우리 말의 어원도 이렇게 쉽고 짧게 잘 알려주는 책이 나와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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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알고리즘 - 왜 인공지능에도 윤리가 필요할까
카타리나 츠바이크 지음, 유영미 옮김 / 니케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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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모든 그룹을 모든 면에서 공평하게 대우하는 해법은 없다. 이것은 디지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의 특수성이 아니다. 

각각의 집단이 어떤 행동을 서로 다른 비율로 할 때 모든 결정이 그러하며, 인간이 내리는 결정도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pg 238)



인공지능, 머신러닝, 빅데이터, 알고리즘...

아마 요새 가장 핫한 키워드들이 아닐까 싶다.

미래 직업으로 각광받는 분야이기도 하니 미래를 준비하는 청소년,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도 관심있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도 관심은 있지만 그런 개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몰랐었는데 

한 권으로 관련 키워드들을 공부할만한 책인 것 같아 접하게 되었다.  


생물학 전공의 자연과학자였다가 데이터가 주는 통계적 의사결정에 매료되어 데이터 과학자가 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저자가

알고리즘의 개념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면서 현재 인공지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와 있고, 이 인공지능에서 활용되는 알고리즘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판단 기준까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왜 인공지능에도 윤리가 필요한가?'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총 330여 페이지로 살짝 두꺼운 감이 느껴지는 책인데 앞의 약 200페이지 정도까지는 핵심개념을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인공지능 관련 핵심 용어들의 개념을 잘 모른다 할 지라도 인공지능에 윤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강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개념들을 이해한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앞 부분을 잘 읽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전문가 입장에서 일반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이고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지만

태생이 문돌이인 내 입장에서는 그런 저자와 번역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핵심 개념들을 온전히 이해했는지 여전히 의문이긴 하다. 


내가 이해한 바를 최선을 다해 정리하면, 고전적인 알고리즘은 수학공식으로 명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 

'이런 인풋을 이렇게 가공하여 이런 아웃풋을 도출하라.'라고 하는 매우 명확한 프로세스를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알고리즘이라고 한다. 

하지만 머신러닝을 통해 빅데이터라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 속에서 인간이 쉽게 찾을 수 없는 연관성을 찾아내는 것도

알고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알고리즘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런 형태의 알고리즘은 '이런 엄청난 인풋이 있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경향성을 분석하여 이번에는 무엇이 좋을지 추천해보라' 정도의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알고리즘인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알고리즘은 설계자가 의도한 바를 100% 구현하는 것이므로 결과값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으며

알고리즘 설계가 옳다면 항상 최적의 결과값을 도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네비게이션에 현존하는 모든 도로의 데이터가 들어 있고, 현재 위치와 목적지 간의 최단거리 길을 찾도록 알고리즘이 짜여 

있다면 새로운 도로가 나지 않는 이상 이견의 여지가 없는 값이 도출된다.


하지만 머신러닝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값은 이런 형태의 결과값이 아니다. 

저자가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빅데이터를 활용한 머신러닝 방식은 고전적인 알고리즘 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휴리스틱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인터넷 사이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상품을 구매한 데이터가 입력된 알고리즘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그 사이트에 로그인 할 경우 30대 남자에게는 이런 구두가 잘 팔리므로 잘 팔리는 구두 순서대로 추천을 한 뒤 

구두와 매칭할만한 옷들을 추천해 주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 목록들 중 내가 어떤 것을 사거나 혹은 사지 않는다면 그 데이터가 또 다른 사람의 의사결정에 활용되는 데이터가 되고 

이것이 축적되면서 더욱 정교한 추천 목록을 작성하는 알고리즘으로 성장하게 된다. 

즉 이런 형태의 알고리즘이 도출하는 결과값이 '반드시 이걸 사게 될 껄!'이 아니라 '이걸 좋아할 확률이 높은거 같은데?' 정도의 

결과값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기대하는 결과값의 형태가 일단 다르고, 

고전적인 알고리즘에 비해 결과값의 도출 과정에 설계자가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많으며 

결과값 역시 인간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해당 알고리즘을 의사결정 전반에 확대해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빅데이터를 통해 도출된 '경향성' 자체가 주는 신비로움 때문이다. 

가령 마트에서 기저귀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맥주도 함께 구매하는 비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마트 입장에서는 마케팅 포인트로 매출을 높일 좋은 기회가 된다. 

왜 기저귀와 맥주가 그런 상관관계를 보여주는지는 관심 대상이 아니다. 


물론 어떤 검색어를 입력할 때 AI가 자동으로 연관 상품을 올려주는 것 정도는 우리 삶에 큰 부작용을 가져다 주지도 않을 뿐더러

때로는 편할 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기저귀를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맥주도 산다면 기저귀 옆에 맥주가 있으면 쇼핑이 더 편리할 것이다. 

(물론 그 AI가 활용하는 데이터들이 그 데이터를 생산한 자들의 동의를 얻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채용 과정에 AI를 도입한다거나 법정에서의 형량결정 등 인간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결정도 

이런 인공지능에게 맡기고자 하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저자는 이런 부분에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고전적인 알고리즘처럼 '이 사람은 범죄자다'라는 결과값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 중 70%가 범죄자가 된다' 정도의 결과값을 주는 알고리즘을 믿고

이 사람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는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다 많은 사람들이 기계가 인간에 대해 인간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일까?

그것은 우선 컴퓨터가 인간은 도저히 분석할 수 없는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그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현재 우리 스스로 인간의 판단력을 별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pg 8)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학습하는 요소를 가진 인공지능은 늘 플랜B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학습하는 결정규칙은 늘 구체적인 트레이닝 데이터와 선택된 많은 변수들에 좌우되고, 

머신러닝의 대부분의 방법에서 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다. (pg 203)



분명 기계가 인간보다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머신러닝 알고리즘이 인간을 능가하는 면은 다음과 같다. 

1) 임의의 데이터에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있다는 점

2) 다양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있다는 점

3) 약한 상관관계도 통계 모델에 집어넣어 유익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 (pg 206)


위에 해당하지 않는 사례라면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의사결정에 활용하는 것은 단순한 '참고자료' 수준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특히 특정 국가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채용과정, 형량 결정, 복지 수혜자 선별 등 개별 인간이 크게 영향을 받는 

결정이라면 머신러닝 알고리즘은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한 챗봇이 혐오성 발언을 쏟아내다 운영이 중지되는 사례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어찌되었든 머신러닝 알고리즘은 '입력된 데이터' 안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 

즉 그 데이터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알고리즘을 통한 해결책도 고스란히 같은 문제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데이터의 수집에서부터 다양한 윤리적, 사회적 문제에 봉착한다. 


이런 편향에서 어려운 것은 해석이다. 

부적합 평가를 받은 지원자들도 해당 업무를 잘 해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이것이 부당한 차별일까? 

이 예에서는 기계가 데이터 안에서 차별을 발견했고, 차별을 계속 이어갔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전에(정당하건 부당하건) 차별이 있었다면, 

기계는 이 차별을 학습할 거라는 사실이다. (pg 224)


그러므로 데이터 확보가 이미 편향된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면 인공지능을 통한 해결책 역시 편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편향성을 인지하여 이를 수정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주체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다. 


모든 그룹을 모든 면에서 공평하게 대우하는 해법은 없다. 

이것은 디지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의 특수성이 아니다. 

각각의 집단이 어떤 행동을 서로 다른 비율로 할 때 모든 결정이 그러하며, 

인간이 내리는 결정도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pg 238)


인공지능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재 인류가 개발한 인공지능의 수준이 '극도로 약한 인공지능'에서 '매우 약한 인공지능' 정도로

개선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선진국들의 경쟁적인 투자로 더 강한 인공지능으로의 개발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저자는 의외로 이 부분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알고리즘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에서 대부분의 결정은 현재와 미래의 행동에 관계된다.

이 사람이 근무에 적합한 자질이 있을까? 대출금 상환을 할까? 테러리스트일까?

여기서는 100퍼센트 옳은 결정규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계의 결정은 늘 통계적 특성을 띨 수밖에 없다. -중략-

인간은 범행을 저지르거나 저지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70퍼센트의 절도나 폭행은 없다. 

그런 결과는 통계적 표현이다.  (pg 241)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인간들이 이 세상의 실험실에서는 비학문적으로 여기는 것을 기계에게는 허용하는가이다.

관찰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는 이 가설을 테스트해보지도 않고, 

곧바로 다른 상황을 판단하는 데 활용하도록 허락하고 있지 않은가. (pg 277)


강한 인공지능의 유용성이 리스크보다 더 높을 수 있을까?

인류가 삶의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찾아내지 못할 만큼 미련하지 않기에, 

강한 인공지능을 개발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pg 296)


정리하자면 인공지능에도 윤리가 필요하므로 해당 부분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인재들의 양성은 물론이고, 

인공지능 활용에 관련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개입도 분명 필요하다. 

(관련 인재들은 최근 한국 고등교육에서 열광적으로 요구되는 '융복합적인 인재'의 전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현재 이상으로 강한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도 자문하고 있다. 

그 유용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미치는 부작용이 너무 클 것이라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터 과학자로서 밝힌 주장이기에 읽는 입장에서는 매우 의외라고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천히 읽으면서 관련 개념들을 이해하다 보니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인공지능에 대한 환상이나 

막연한 기대감이 많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인공지능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거나, 혹은 반대로 인류를 지배하거나 하는 미래가 생각보다도

아직 많이 멀었다는 점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강한' 인공지능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도 조금씩 동의가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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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교
이동륜 지음 / 씨큐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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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1은 참 좋은 숫자다. 1은 자신을 몇 번 곱해도, 즉 몇 제곱을 해도 자신이 되는 자존심 높은, 변하지 않는 숫자다.

루트를 씌워도 변화시킬 수 없다. 참 많이 나랑 닮았다. 나는 늘 1이었고, 1이어야만 한다. (pg 161)



책과의 만남도 사람과의 만남과 다르지 않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책을 받아보기 전 이런 저런 기대를 갖게 마련인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일단 페이지 수가 많지 않은데 20편 이상의 단편이 실려 있다고 하니 개인적으로 짧은 서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작가도 신인이라 이름에서 주는 기대감이 적었다. 


그런데 첫 작품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인간교를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 상당히 재미있다. 


특히 처음 두 작품인 '인간교'와 '황야의 5인'이 기가 막히다. 

둘 다 인간성을 갈구하는 로봇이 주제인데 단편이어서 작가가 둘 간의 연관성을 전제해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아이로봇'처럼 옴니버스식으로 쭉 이어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 같다. 

그 이후에도 '판단, 혹은 심판'이나 '바꿔줘' 같이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주제인 작품들이 종종 나오니 

작가의 로봇에 관한 작품들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 다음 책으로 나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봇이 되고, 로봇처럼 사세요." (pg 54)


'인간교'도 60페이지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위 문장까지의 진행이 정말 재밌었다. 

'황야의 5인'까지 두 작품만 합쳐도 약 90페이지 정도인데 총 270여 페이지 정도 되는 전체 분량에 비하면 

작가가 다른 작품에 비해 이 두 작품에 힘을 빡 실은 느낌이 분명히 난다. 


읽으면서 마치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로봇'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 같은 책들이 떠올랐다.

작가의 상상력은 그 두 책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만의 특색이 있다면 미래 사회를 그리면서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당히 디스토피아스러운 미래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책 표지도 어둡지만 안에 담긴 이야기나 삽화들도 대체로 어두워서 어두운 이야기 좋아하는(나같은) 사람들은 상당히 좋아할 것 같다. 

계속해서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을 발표해준다면 나름 덕후들이 생겨날 것 같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넷플릭스의 '러브, 데스+로봇'이나 옛날 '애니매트릭스'처럼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도 재미있을 것 같은 소재들이 많았다. 


'SF단편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긴 하지만 꼭 SF스러운 주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1부는 '미래', 2부는 '현실'이라는 부제로 단편들이 묶여 있는데, 

1부는 확실히 SF 느낌이 강하고 2부는 현실 사회 비판 쪽에 가까운 내용이 많았다. 

1부가 약간 어두운 맛이라면 2부는 매우 어두운 맛이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는 사회와 무섭도록 닮아있다.

나는 잠시 반역을 꿈꿨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pg 229)


'빌려줘'와 같이 소년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작품도 있고 '노인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등 섬짓한 살인사건이 주제인 작품도 있다. 

상상력이 돋보이지만 문장에 힘을 주고 있지는 않아서 특정 구절이 인상깊게 남는다거나 하는 건 많지 않았다. 

작품 길이들도 앞의 두 작품과 2부의 'numbers'를 제외하면 4페이지 정도로 짧은 편이지만 

각 작품들에서 보이는 작가의 상상력이 기발하고 내용도 상당히 충격적인 것들이어서 분량에 비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짧은 서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작가가 가진 상상력을 좀 더 긴 호흡으로 풀어주는 작품들이 후속으로 나와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각각의 이야기들이 짧은 만큼 출퇴근 길이나 육아 중에도 틈틈히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건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작가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후속작품이 나오면 또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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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치지 않는 삶 - 웨인 다이어의 노자 다시 읽기
웨인 W. 다이어 지음, 신종윤 옮김, 구본형 / 나무생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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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현실 속에서 '시작'은 종종 고통스러운 '끝'의 모습으로 위장을 해서 나타나곤 한다.

현재의 실망스러운 일 너머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알면 "이것 역시 지나갈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pg 121)



'노자의 도덕경을 서양인의 눈으로 해석한 책'이라는 책 소개가 마음에 들어 접하게 된 책이다.

물론 도덕경을 동양인의 눈으로 해석한 책도 본 적이 없지만 노장 사상을 쉽게 풀어 쓴 책들은 종종 접해왔었다.

무위자연으로 대표되는 노장사상은 다른 사상에 비해 규율이 적고 사회 제도에 대한 사색 보다는 인간 본연에 대한 탐구가

주가 되는 사상이라는 것 정도만 인지하고 있었다. 


이 책은 노자 사상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 도덕경의 원문을 먼저 소개하고 저자가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덧붙인 책이다.

도덕경이 총 81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책의 두께도 총 560여페이지로 두툼한 편이어서 쉽게 뚝딱 읽고 넘어갈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들어가는 말에서 작가는 하루에 도덕경을 한 장씩만 읽고 내용을 이해한 뒤 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시간을 가진 후

느낀 바를 종합해 집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각 장마다 마무리로 '지금, 도를 행하라'라는 문구 아래에 독자들이 실천할 수 있는 조언을 곁들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철학책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어려운 내용만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가볍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다음 식사 때는 먹는 양을 조절해보자.

우선 음식을 조금 먹은 후에 아직도 배가 고픈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중략-

만약 더 이상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기서 식사를 끝내라.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도덕경> 9장의 마지막 문장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일을 다 하였으면 물러나는 것이 바로 하늘의 길이다." (pg 82)

(물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도덕경의 내용을 간단하게 축약할 자신은 없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는 '도를 따르라'라는 문장 하나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도()는 무엇인가?

나는 '자연의 법칙이자 세상 만물이 작동하는 원리'라고 이해했다. 

마치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어서 오히려 잘 인식되지 않는 것. 


책을 보면 영어로도 도를 'The Way'라고 쓰는 것 같은데, 어쨌든 삶이 지나온 곳, 나아가야 할 곳 모두 '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생겨나는 것도, 죽어 사라지는 것도 모두 '도'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도'라는 것은 우주 자체일 뿐이며 영속적인 것이므로 우리네 짧은 삶은 그저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마치 태양이 매일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시작'은 종종 고통스러운 '끝'의 모습으로 위장을 해서 나타나곤 한다.

현재의 실망스러운 일 너머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알면 "이것 역시 지나갈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pg 121)


이 '도'라는 개념이 한 단어가 가지기에는 너무 큰 뜻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경 역시 한 번 읽어서는 전부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에 빈 공간이 있으므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난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으므로 방의 쓸모가 생겨난다.

있음의 유용함은 없음에 달려 있다. (pg 90)


결국 우리가 주장하는 선함과 악함, 좋음과 싫음, 아름다움과 추함 등 모든 구분들은 인간이 작위로 부여한 것이며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것이다. 

무슨 얘긴지도 알겠고 멋진 말이긴 한데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작가가 서술한 바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물어보라.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외부의 압력이 없다면, 나만의 고유한 본성은 무엇일까?

무엇이 되라는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본성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가운데 하루를 살아라. (pg 104)


문장 자체는 쉽지만 결국 자신을 탐구하는 진지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해한 도덕경의 내용들을 삶에 적용한다면 개개인의 행복감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노자 사상은 확실히 낯선 느낌이 들었다.

노자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지도자는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지배자'이다. 

그 말에 따르면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 지배계층이 상당히 바람직한 것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서른 중반이지만 아직 도덕경의 내용은 생경한 것이 더 많았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나 나 자신이 '인간이라면', '바람직한 사회라면' 응당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노자는 그런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이다. 

애초에 그런 가치라는 것이 자연히 존재할 리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류와 사회가 진화해온 결과물이라면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껍고 어려운 책이지만 한번쯤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동양인들이 배우는 서양사상의 양 대비 서양인들이 배우는 동양사상의 양은 턱없이 낮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서 동서양의 좋은 철학 사유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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