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교
이동륜 지음 / 씨큐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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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1은 참 좋은 숫자다. 1은 자신을 몇 번 곱해도, 즉 몇 제곱을 해도 자신이 되는 자존심 높은, 변하지 않는 숫자다.

루트를 씌워도 변화시킬 수 없다. 참 많이 나랑 닮았다. 나는 늘 1이었고, 1이어야만 한다. (pg 161)



책과의 만남도 사람과의 만남과 다르지 않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책을 받아보기 전 이런 저런 기대를 갖게 마련인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일단 페이지 수가 많지 않은데 20편 이상의 단편이 실려 있다고 하니 개인적으로 짧은 서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작가도 신인이라 이름에서 주는 기대감이 적었다. 


그런데 첫 작품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인간교를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 상당히 재미있다. 


특히 처음 두 작품인 '인간교'와 '황야의 5인'이 기가 막히다. 

둘 다 인간성을 갈구하는 로봇이 주제인데 단편이어서 작가가 둘 간의 연관성을 전제해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아이로봇'처럼 옴니버스식으로 쭉 이어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 같다. 

그 이후에도 '판단, 혹은 심판'이나 '바꿔줘' 같이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주제인 작품들이 종종 나오니 

작가의 로봇에 관한 작품들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 다음 책으로 나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봇이 되고, 로봇처럼 사세요." (pg 54)


'인간교'도 60페이지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위 문장까지의 진행이 정말 재밌었다. 

'황야의 5인'까지 두 작품만 합쳐도 약 90페이지 정도인데 총 270여 페이지 정도 되는 전체 분량에 비하면 

작가가 다른 작품에 비해 이 두 작품에 힘을 빡 실은 느낌이 분명히 난다. 


읽으면서 마치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로봇'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 같은 책들이 떠올랐다.

작가의 상상력은 그 두 책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만의 특색이 있다면 미래 사회를 그리면서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당히 디스토피아스러운 미래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책 표지도 어둡지만 안에 담긴 이야기나 삽화들도 대체로 어두워서 어두운 이야기 좋아하는(나같은) 사람들은 상당히 좋아할 것 같다. 

계속해서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을 발표해준다면 나름 덕후들이 생겨날 것 같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넷플릭스의 '러브, 데스+로봇'이나 옛날 '애니매트릭스'처럼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도 재미있을 것 같은 소재들이 많았다. 


'SF단편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긴 하지만 꼭 SF스러운 주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1부는 '미래', 2부는 '현실'이라는 부제로 단편들이 묶여 있는데, 

1부는 확실히 SF 느낌이 강하고 2부는 현실 사회 비판 쪽에 가까운 내용이 많았다. 

1부가 약간 어두운 맛이라면 2부는 매우 어두운 맛이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는 사회와 무섭도록 닮아있다.

나는 잠시 반역을 꿈꿨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pg 229)


'빌려줘'와 같이 소년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작품도 있고 '노인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등 섬짓한 살인사건이 주제인 작품도 있다. 

상상력이 돋보이지만 문장에 힘을 주고 있지는 않아서 특정 구절이 인상깊게 남는다거나 하는 건 많지 않았다. 

작품 길이들도 앞의 두 작품과 2부의 'numbers'를 제외하면 4페이지 정도로 짧은 편이지만 

각 작품들에서 보이는 작가의 상상력이 기발하고 내용도 상당히 충격적인 것들이어서 분량에 비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짧은 서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작가가 가진 상상력을 좀 더 긴 호흡으로 풀어주는 작품들이 후속으로 나와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각각의 이야기들이 짧은 만큼 출퇴근 길이나 육아 중에도 틈틈히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건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작가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후속작품이 나오면 또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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