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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들 ㅣ 걷는사람 소설집 4
임성용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혼자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신은 알고 있다.
적당히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혼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스팔트 위의 중앙선처럼, 될 수 있는 대로 중앙으로, 할 수 있는 만큼 가지런하게, 끝없이 이어지며 내버려 둘 수 있는 혼자.
말 그대로 그대로의 혼자. (pg 105)
설 연휴에도 집, 삼일절 연휴에도 집에만 있다보니 좋은 책과의 만남도 잦아지는 것 같다.
이번에도 생소한 작가의 단편집을 만났다.
책 소개를 보고 선택하는 것이니 당연히 내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겠으나,
종종 실패도 하는 걸 보면 책과의 인연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처럼 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책은 내 취향에 너무도 잘 맞아 읽은 소감을 쓰는 마음이 한결 가볍다.
230여 페이지에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최근에 읽은 단편집들이 대체로 너무 짧은 호흡이어서 아쉬움을 주었던 것에 반해 이번 단편집은 일단 길이면에서도 마음에 들었다.
단편집이니 각각의 이야기들마다 주제가 있지만 작품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들이 비슷해서
마치 한 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이야기들이 매우 어둡다. 그러면서도 또 무겁다.
단편이지만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을 장면들이 여럿 등장한다.
특히나 살인이 스토리 진행에 큰 영향을 주는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예 화자의 직업이 살인청부업자여서 일거리를 처리하듯 진행되는 살인부터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살인,
이념 대립으로 인한 맹목적인 살인 등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와 역사의 어두운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공원 조 씨'와 책의 제목이기도 한 '기록자들'은 내용 일부가 겹쳐지며 같은 세계관 속 다른 이야기라는 느낌도 전해준다.
'공원 조 씨'만 읽은 뒤에는 인재(人災)로 가족을 잃은 한 정신병자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 같지만
'기록자들'까지 읽고 나면 뭔가 '공원 조 씨'에도 더 큰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위 두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총 7개의 단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맹순이 바당'일 것이다.
제주 4.3 항쟁으로 남편을 잃고 낯선 곳으로 도망쳐 자신을 지우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 서사가 여느 장편소설 못지 않게 탄탄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준다.
본 작품이 2018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라 하니 제목으로 검색하면 원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끝분은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들러붙은 빨갱이 여편네 냄새가 가려져야 했다.
누가 들어도 우스운 이름이어야 한다. 끝분은 점례 동생 순이를 떠올렸다.
이름은 순이였지만 맹한 구석이 있어 동네사람들이 맹순이로 불렀다.
끝분은 맹순이가 되기로 했다. (pg 172)
물론 다른 작품들 역시 충분한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편이니 이런 '어두침침한', 그러면서도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도 후회없는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제주 4.3 항쟁이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의 피해자들, 88올림픽 당시 소외된 계층 등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만한
역사적 장면들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어서 작품 속 이야기들의 현실감도 높이고 등장인물에 공감하기도 쉽다.
책의 후반부에 작가의 말이 실려 있는데 작가가 이런 느낌의 작품을 쓰게 된 심리적 배경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시선과 선택은 늘 지하를 향했다.
눅눅한 지하에서 환상을 이야기하고, 지상의 세상을 헐뜯었다.
산등성이보다 골짜기를 좋아하고 그늘이 없는 사람은 사귈 수 없었다.
쇼윈도 속의 동물보다 버려진 짐승들에게, 온화한 스승보다는 괴팍한 스승에게 마음이 더 갔다. (pg 231)
뭔가 내 성향과 비슷한 작가를 한 명 더 알게된 것 같아 기쁘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