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뜻밖에도 어느 날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에서였다.

법의학자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예능 프로에 나왔는데 아래와 같은 말을 하길래 무척 인상이 깊게 남았다.

TV를 거의 보지 않아 몰랐는데 '그것이 알고 싶다'에 자주 등장하는 법의학자라 한다.

책을 사려고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 익숙한 이름과 함께 자극적인(?) 제목을 가진 책이 있길래 선뜻 주문했다.

제목에 충실하게 매주 시체를 검시하는 직업을 가진 저자의 법의학 소개와 죽음에 관한 철학을 담은 책이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1부에서는 법의학의 맛보기가 담겨있다.

법의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저자가 법의학자로서 사건 해결에 기여한 여러 가지 충격적인 살인 사건들이

소개되어 있다.

법의학자는 확실한 증거로써만 진실을 추구한다.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든,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든

서사에 관심을 두기보다 명확한 증거에 입각해서 추론하는 것이다.

경험으로 쌓인 느낌이라든지 감각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결정적 판단은 오롯이 백퍼센트 과학적 증거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법의학이다.

(pg 55)

1부를 읽고 나면 법의학자의 존재가 강력 범죄 해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된다.

여기서 놀라웠던 점은 우리나라 법의학자의 수가 5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불현듯 이 사람들이 매수라도 당한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지기도 했다.

의사의 길을 가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라 할 수 없다는데, 얼마나 많은 외압과 유혹이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2부에서는 법의학 관점에서 죽음의 정의와 형태를 다룬다.

죽음의 형태라는 것이 다소 생경할 텐데,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것들을 밝혀내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물에서 건져낸 주검을 의학적이나 과학적으로 검사해

사망 원인이 익사임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스스로 투신했다면 자살일 것이고, 술에 취한 채 수영하다가 익사했다면 사고사이며,

강제로 물을 먹여 죽였다면 타살이다.

(pg 133)

여기서 더 나아가 존엄사, 안락사를 비롯한 연명치료 선택에 대한 히스토리는 물론 현재 일부 국가에서 시행 중인

의사조력자살까지 다루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어떤 제도의 시행 여부를 지지하거나 반대한다는 명확한 의사 표현은 없지만, 우리 스스로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그 의견이 존중받아야 하며 그에 따른 죽음의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세상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의료 행위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처분당하는 것이 요즘 우리 사회 죽음의 대세가 아닌가 싶어 씁쓸한 심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대세를 거슬러 이제 우리는 죽음을 당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pg 142)

이 책의 백미는 3부부터 시작되는 저자의 죽음에 대한 고찰이다.

하지만 이 3부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1, 2부를 꼼꼼히 읽어둘 필요가 있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우리가 스스로 죽음에 대해 미리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준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물질적, 심리적 정리가 있을 것이다.

각종 채무관계를 정리하고 유산이 있다면 어떻게 물려줄 것인지를 먼저 정하는 것이 물질적인 정리일 테고,

심리적 정리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인정하고 미리 인사를 나누고,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모습은 어땠으면 좋겠는지를 미리 의사소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 정리가 잘 안되기 때문에 죽음을 느닷없이 맞이하게 된다.

나의 스토리를 스스로 종결하지 못하고,

나의 내레이션을 마지막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남이 대신 마치게 하는 것이다. - 중략 -

내 인생의 마지막은 반드시 내가 종결지어야 한다.

(pg 238)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과거와 달리 사람들이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가 사망하게 될 확률이 점차 높아진다는 데 있다.

예전처럼 가족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 중환자실에서 홀로 온갖 호스들을 몸에 감고 불과 몇

개월 정도나 연장 가능한 연명치료를 전전하다 세상을 뜨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통계로 보면 1989년에는 전체 사망자의 77.4%가 집에서 사망했지만 2012년에는 집이 18.8%로 감소한

반면, 의료기관은 70.1%, 사회복지시설은 11.1%로 높아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어 늙어가다가 어느 순간 생의 기미가 푹 꺼지는 지점이

찾아왔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 중략 -

그러나 지금은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를 남길 틈도 없이

병원에서 아무런 준비나 의식 없이 마지막 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처럼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pg 215)

여기에서 저자가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추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인지라 생각보다 많이 팔린 것 같진 않아서 아쉬웠는데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서평: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0393453216)

여하간 그 책의 논지와 3장에 담긴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둘 다 읽어본 바로는 두 책 모두 상당히 좋은 책이며 읽는 재미도 있어서 추천하고 싶다.

멋있어 보이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마무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삶이 있고 100가지의 죽음이 있는 것이다. - 중략 -

죽음과 친숙한 삶이야말로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삶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삶을 묻는 이유다.

(pg 246)

마지막으로 저자가 40분간 강연한 영상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책을 다 읽은 후 쭉 돌려봤는데 이 책 내용의 한 60% 정도는 커버하는 것 같다.

한 40분 정도 되는 영상인데, 보고 난 뒤의 감동 역시 책의 6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책 역시 2-3시간이면 다 읽으니 어지간하면 책을 먼저 본 뒤 내용 리마인드용으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말도 재미나게 잘 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시간 압박이 있는 영상물이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책으로

읽었을 때의 감동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b_jbtR0En_U

일반 사람들 중에는 분명 영생을 준다 해도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각자의 운명을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는 영생을 기다리며 환상에 빠져 지내기보다는

우리의 지금 이 순간을 낭비 없이 꽉 채우는 온전한 현재의 삶을 사는 것이다.

(pg 265)

다행히 저자가 매우 쉽게 저술했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

책도 작고 분량도 270여 페이지로 얇은 편이어서 2-3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읽은 시간 대비 충분한 지식과 생각할 주제들을 던져주는 책이라 생각했다.

저자가 충분히 강조한 바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유기체인 이상 삶의 종료 시점이 언젠가는 찾아올 수밖에 없다.

나도 아직 40도 안되었으니 한참 젊을 때라 할 수 있겠으나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

삶의 마지막 여정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미리 고민해 보고 가까운 사람들과 진솔하게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뭔가 읽을 것이 떨어진 느낌이 들 때 생각 없이 집어 들게 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작품.

그래도 이번 책은 다른 작품들과 느낌이 매우 달라서 새로운 느낌으로 재미나게 읽었다.


이 책만의 특징이라 한다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제4의 벽을 마음대로 넘나든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영화 속 '데드풀'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자신들이 소설 속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독자들에게도 끊임없이 말을 건다.

단순히 말만 거는 것이 아니라 시비도 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번 소설은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다.

그러므로 독자가 아무리 메모를 해 가며 꼼꼼히 읽는다 한들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소설에 나오는 힌트만으로는 결코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것이 이번 소설의 구조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논리적으로 범인을 찾아내려는 독자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대부분 직감과 경험으로 범인을 간파해 낸다.

(pg 57)


게다가 소설의 주인공이 '명탐정'이 아니고 '명탐적 옆에서 뻘짓을 하는 경찰'이다.

자신이 정확히 범인을 알아내면 명탐정과 역할이 겹치기 때문에 자신은 헛다리를 짚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경찰이 주인공인 것이다.


짧은 단편들이 묶여 있는 형태인데, 일단 주인공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그 주변에 항상 우연하게도

명탐정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때에도 '어이쿠, 하필 내가 여기 있었네!'라는 느낌으로 등장한다.)

어릴 적 인기였던 코난이나 김전일 같은 만화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이상하게 주인공이 어딜 가기만 하면 주변에서

항상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정면으로 비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흔한 클리셰들을 소개한 뒤 그 클리셰가 얼마나 뻔하고 지루한지를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사건을 해결한다.

밀실 살인, 사라진 흉기, 변장한 범인, 고립된 무대 등 추리소설에서 한 번쯤은 봤을법한 트릭들이 모두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건의 해결 방식 또한 황당하기 그지없고, '설마.. 또 밀실 살인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와 비슷한 대사들이

연이어 등장하니 읽다 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지점이 꽤나 많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접근법으로 책을 썼을까?

책의 후반부에 다른 작가가 쓴 해설에서 그 해답을 엿볼 수 있었다.

일본의 전형적이고 수준 낮은 추리물들에 대한 비판에 더해 작가 자신 역시 그런 추리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다는

자기검열이 합쳐진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라는 것이었다.


작가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다작을 한 작가라 아직도 못 본 작품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라 불리는 작품들은 '용의자 X의 헌신'을 제외하면 아직 접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런 자기검열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작가가 쓴 다른 추리소설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당장에 이 작품 역시 '명탐정의 저주'라는 후속편이 존재해서 읽을 것이 계속 생겨나는 느낌이다.


읽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작품들을 주로 써서 그런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은 일단 집어 들 때 마음이

편하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재미가 보장되니 계속해서 읽게 되는 것 같다.

작가의 지치지 않는 창작 열정이 어디까지 갈지 개인적으로도 궁금해지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늑대
장마르크 로셰트 지음, 조민영 옮김 / 리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국열차'의 원작자가 그린 작품이라고 해서 일단 기대가 됐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져 독창적이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은 스토리를 구현해 내는 작가여서 이번에는 '늑대'라는

동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펼쳐냈는지 궁금했다.

책을 받아든 첫 느낌은 '가볍다'였다.

전체 페이지가 120페이지 미만으로 아주 얇은 편인데, 작품이 만화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짧은 분량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그래픽 노블이라기엔 글의 분량이 매우 적다. 그냥 만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실제로 후반부에 실린 해석까지 읽더라도 2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었다.

짧지만 강렬한 그림들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충분히 독자들에게 전해진다는 느낌이었고

다 읽고 난 후 스스로 생각해 볼 것들을 던져주기도 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국립공원 내 제한된 영역에서 방목으로 양을 키우는 노인 가스파르는 늑대로 인한 피해에 지쳐 암컷 늑대

한 마리를 쏴 죽인다.

이때 죽은 늑대의 새끼가 살아남아 가스파르와 대립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 후반부에 한 프랑스 교수의 작품 해설이 실려있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자원을 내어주는 존재라는 일반적인 서양의 자연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것이 해석 내용의 주된 내용이다.

해설에 따라 이해하든 각자 자신의 시각에서 이해하든 본 작품은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일단 나처럼 인간과 자연은 일방적인 관계일 수 없고 본래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은 저항할 수 없는 대자연이라는 것에 무의미하게 저항하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작품 속 늑대 역시 마찬가지지만 눈보라나 산사태 등의 자연 현상은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 현상에 앙심을 품고 복수심을 불태워본들 자연은 화를 내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작품 그 자체로만 감상한다면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양치기와 늑대라는 두 존재의 날카로운 대립과 처절한

복수극, 그리고 생존이라는 대전제 하에서의 극적인 화해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양 떼'는 두 존재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매우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대립은 그만큼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포효하는 대자연 앞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빚을 지게 된다.

늑대는 결코 인간을 위해 길들지 않았지만 인간이 허락하는 이상을 욕심내지 않게 되었고, 인간 역시 늑대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을 버리고 늑대의 영역을 지켜주며 자신의 자원을 기꺼이 나누었다.

저자가 의도한 작품의 핵심 주제는 아니겠지만 '복수'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작품 속 늑대가 가스파르에게 한 행위가 진짜 '복수'의 목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진짜 계획적으로 가스파르를 '엿 먹이기 위해' 행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저 본능에 따른 우발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가스파르에게 피해를 입힐 의도였다고 한다면 다른 늑대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굳이 저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 마리보다는 여러 마리일 때 더 효과적으로(?) 엿을 먹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뇌가 발달한 동물일수록 복수라는 행위를 실제로 할 수 있다고 하니 작품 속 늑대의 복수 역시 의도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는 인간이 아니기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동물이 본능에 충실한

것을 탓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스파르는 명백한 '복수'의 의미로 늑대를 추적한다.

그 결과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데,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자신이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

중간에 몇 번이고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그 늑대의 숨통을 끊지 않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복수심'이라는 것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감정이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이 불타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파멸시키고 싶은 마음.

전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이 제3자의 시각에서는 얼마나 덧없어 보일 수 있는지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짧은 작품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 자체가 가벼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이 온라인 서점에서 '청소년'도 아닌 '어린이'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다소 당황스러운 느낌이다.

물론 만화이고 글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아이들이 봐도 무방은 하겠으나, 아이들이 읽고 '음..역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지' 이상의 행간의 의미를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어린이를 너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작품을 너무 오버해서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길이는 짧지만 그림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책의 사이즈가 큰 편이기 때문에 편안한 장소에서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천천히 읽어본다면 생각보다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스퍼맨 - 속삭이는 살인자
알렉스 노스 지음, 김지선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흔히 정적인 느낌을 주는 행위로 인식된다.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손에 땀을 쥘 정도'라거나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책을 읽으면서 숨이 막힌다는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경험할 수 있게 해 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재미나게 읽었기 때문에 최대한 스포일러에 주의하며 소개하려 하겠으나, 의도치 않은

스포가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위스퍼맨'이라는 연쇄 아동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다.

범인은 어린 소년만을 골라 살해했는데, 위스퍼맨은 살해 전 피해 아동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던

것에서 착안된 별명이다.

피트라는 베테랑 경찰이 범인을 검거했지만, 마지막 피해자의 유해를 찾지 못해 20년간 습관처럼 피해자의 시신을

찾아 헤맨다.

그러던 중 과거 위스퍼맨의 범행을 흉내 낸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젊은 경찰인 어멘다와 함께 해결하려 한다.

이 마을에 아내를 잃고 홀로 어린 아들 제이크를 키우는 톰이 이사 오면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일단 책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재미있다'였다.

500페이지가 넘어 살짝 두꺼운 느낌이 들지만 사건의 전개가 빠른 편이어서 금세 책장이 넘어갔다.

게다가 종반부로 갈수록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긴장감까지 전해져 나중에는 결말이 너무 궁금해 빨리 읽어 버리고

싶은 자아와 한 글자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는 자아가 충돌하는 개인적으로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서술상의 특징으로는 매우 끔찍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끔찍함의 묘사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피해 아동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시신은 어떤 모습인지, 범행 현장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등등

일체의 끔찍한 서술 없이 사건의 흐름과 인물들 간의 대화로만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런데도 읽다 보면 묘하게 무서운데, 고어함 없이도 무서운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읽으면서 가장 끔찍한 구절을 고르라면 아래의 문단을 고를 것 같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아래의 문구가 왜 끔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는지는 작품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안전하게 지켜줘야 할 아이. 사랑해줘야 할 아이.

왜냐하면 그게 모든 아이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거니까.

안 그런가? 부모에게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지는 것.

그 생각에 심장이 아파왔다.

(pg 419)

특히 사건 자체가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여서 그런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보자니 더 무서웠던 것 같다.

자신이 상해를 입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내 아이가 상해를 입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차원이 다른 것 같이 느껴진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 뉴스를 볼 때에도 우린 무서움을 느끼긴 하지만 만약 그 범죄가 어린

아이만을 대상으로 벌어졌다고 하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아주 매력적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다양한 남성상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다.

젊은 시절 알코올 중독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과거를 반성하며 금욕적인 삶을 이어가는 경찰,

급작스럽게 싱글대디가 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지만 그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하는 젊은 아버지,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 악당과 그를 추종하는 추종자까지

정말 영화화하면 좋을 캐릭터들이 전체적인 작품을 이끌어간다.

이미 해외에서는 이런 점이 충분히 알려졌는지 어벤져스 인피니티워로 유명한 루소 형제가 이 작품을 영화화할

계획이라 한다.

아직 캐스팅 정보 등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피트 역할에는 키스 데이비드라는 배우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논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고, 그냥 알코올 중독을 운동으로 이겨내며 범인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늙은 배테랑

경찰 역할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이번 작품의 경우 어멘다를 제외한 주요 인물들이 모두 남성이어서 최근 헐리웃의 PC 성향에 맞는 작품이

되긴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우려가 든다. (그래서 흑인 배우가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책 후반부에서 역자도 언급했듯이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장들이 매우 좋은 편인데,

영화로 만들면 이런 문장들을 느끼기가 어려우니 단순한 서사 위주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나비들에겐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게 살아 있는 존재들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고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도 그들은 계속 삶을 이어간다.

(pg 114)

여하간 개인적으로는 무척 재미나게 읽은 작품이니만큼 모쪼록 영화로도 잘 나와서 다시금 본 작품의 감동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브랜든 1~2 세트 - 전2권 사람 3부작
d몬 지음 / 푸른숲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d몬 작가의 사람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브랜든이 드디어 책으로 발매되었다.

온라인에서야 진작에 완결이 났지만 뭔가 만화는 손으로 넘기는 맛이라고 생각하는 아재인지라 책으로 나와

내 손에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데이빗'에서는 인간의 형상이 인간을 정의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면,

'에리타'에서는 자신이 정의하는 자신의 정체성이 인간을 정의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에 관한 어떤 질문을 던져줄지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에리타처럼 스토리에 스포일러가 될만한 반전이 있는 편은 아니어서 조금은 자유로운 내용 소개가 가능할 것 같다.

브랜든에서는 각자가 모두 자신을 '사람'이라 여기는 3개의 종족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브랜든은 우리와 같은 인류로 흑인 남성이며 영어를 쓰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브랜든이 어느 날 다른 세계로 가는 포털을 발견하게 되어 빨려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올미어'라는 존재를

난다.

올미어는 검은색 구형으로 된 머리에 가느다란 금속막대로 이루어진 몸체를 지녀 마치 거실에 두는 스탠드형

조명기구(;;)같이 생겼다.

올미어의 세상은 압도적인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인격이 모두 데이터화되어 노후된 몸을 계속 바꾸면서 인격이

계승되고, 각 개체 간의 의사소통도 마치 블루투스로 데이터를 전송하듯 이루어진다.

SF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 스타크래프트의 칼라이 프로토스가 더해진 느낌이라고

상상하면 얼추 맞을 것 같다.

올미어의 세계에서는 모든 지식과 경험이 모든 개체에게 공유되기 때문에 각 개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하면 되는데 올미어의 경우 그 일이 다른 종족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브랜든을 만나기 전 그는 '라키모아'라는 원시 종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라키모아는 긴 털 고릴라 같은 생김새를 가진 종족으로 수렵, 채집 시절의 인류와 비슷한 느낌이다.

압도적으로 발전된 사회에서 사는 올미어는 브랜든이나 라키모아를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벌레 정도의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브랜든은 자신이 올미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3개 종족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각기 다른데 이 부분이 재미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서로를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스포가 될 수 있어 흐리게 처리하였다.)

올미어의 시각: 올미어(사람) 브랜든(벌레) 라키모아(벌레)

브랜든의 시각: 올미어(사람) 브랜든(사람) 라키모아(사람)

라키모아 종족의 시각: 올미어(신) 브랜든(천사) 라키모아(사람)

결말까지 스포를 할 수는 없으니 작품의 흐름만 언급하면,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뭔가 대단한 논리적

증명 방법이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감성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방법이 만화라는 장르에도 부합할 뿐만 아니라

섣부른 논리적 증명 방식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다 읽은 뒤 종합해 보자면 그저 생각하고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고, 과거를 통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책 2권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만화이기 때문에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데, 3개의 전혀 다른 사회를 독자들에게

이해시켜야 하니 각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주요 서사의 진행은 굉장히 빠르게 지나가버린 것 같은 아쉬움도 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가 할 말만 딱 하는 느낌이어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느낌은 3부작 전체에 걸쳐

일관적으로 좋았다.

보통 만화의 경우 인기가 좋으면 무리하게 분량을 늘리려는 시도가 많은 것 같던데 이 작가는 그런 거 없이 자신이

구상한 스토리에 꼭 필요한 장면과 대사만 딱 넣어 마무리 짓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것 같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평소에 잘 해보지 못했던 질문을 던져주는 좋은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1부와 2부는 재미있게 읽고 나면 끝에 가서 뭔가 찜찜하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이 남는 엔딩이었다면

이번 브랜든은 그야말로 '완결'에 걸맞은 결말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서도 책을 덮으며 한껏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브랜든이라는 캐릭터 역시 충동적인 면과 나약하지만 선한 면을 함께 지닌 평범한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이 인물이

책 두 권에 걸쳐 내면적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메리아나, 말했지...신은 없다고...

그저...우리만 있을 뿐이야...

우리는 모두가 달라...

(2권, pg 308)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대사의 감동을 많은 사람들이 느껴봤으면 좋겠다.

보통 만화를 보고서 '아이와 같이 보면 좋겠다'리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3부작만큼은 잘 보관하고

있다가 아이가 좀 더 커서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할 때쯤 같이 읽어보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d몬의 사람 3부작 서평

1. 데이빗: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2285818489

2. 에리타: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24641070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