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의 법칙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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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내가 이 시리즈의 전작들을 읽지 않았음을 먼저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동명의 영화와 드라마로 이미 유명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라는 작품의 주인공인 미키 할러가 등장한다.

전작은 물론 영화와 드라마도 본 적이 없어서 읽기 전에 고민을 좀 했었는데 오히려 본 시리즈를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 나 같은 독자들도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고 난 솔직한 감상을 남겨보려 한다.

주인공인 미키 할러는 자신이 변호사인 이상 의뢰인이 진짜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의 무죄를 받아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여러 사건들에서 승소하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어느 날 승소 기념 파티를 가진 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한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게 된다.

음주도 하지 않아 떳떳하게 검문에 응했지만 자신의 차 트렁크에 예전에 알고 지냈던 의뢰자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물론 모함이고 함정이라는 것은 알지만 정황적인 증거가 그를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상황에 담당 검사는 미키가 살인자라는 사실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재판에 임한다.

여기에서 검사와 미키의 팀이 벌이는 법정 싸움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법정 스릴러'라는 단어에 걸맞게 법정에서의 싸움이 작품의 대부분인데, 이쪽 장르를 잘 접해보지 않았기도 하고 미국의 사법 체계가 우리나라와는 상당히 달라서 꽤 신선한 재미가 있었다.

먼저 정황적인 증거들이 그를 범인으로 몰아가자 그는 사건에서 경찰과 검찰이 보였던 절차적인 문제부터 걸고넘어진다.

보는 시각에 따라 '비겁하다'라고도 할 수 있을법한 접근법이지만 진짜로 억울한 상황이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대의 논리에서 보이는 작은 구멍을 공격해 그 구멍을 점차 넓혀가는 접근법이 인상적이었다.

결백의 법칙에서는 어떤 범죄에 대해 무죄인 사람이 있으면

유죄인 사람이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유죄인 사람을 찾아내

세상에 드러내 보여야 한다.

(pg 144)

픽션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의 사법 현실에 대한 여러 모습도 잘 관찰할 수 있었다.

특히 미키가 수감시설에서 있었던 불법적인 행위를 법정에서 폭로한 후 호송 중에 다른 죄수로부터 린치를 당하는데 이 사건이 그저 해당 범죄자 개인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종결 나버리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또한 미국에 배심원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배심원들을 어떻게 선발하는지는 몰랐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그 절차도 엿볼 수 있었다.

최대한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검사와 피고 측이 따로 선택하고 배제하는 절차를 거치는데, 여기에서 보여주는 전략(술수?)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다만 결말이 다소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결백의 법칙'이라는 뜻인데 제목에 충실하게 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무죄를 받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미키와 그의 팀이 해결책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더 큰 무언가에 의해 훅 해결되어 버리는 느낌이랄까.

마치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가 각지에서 독립을 위해 힘을 쌓고 있던 중 미국의 원자폭탄 한 방으로 독립이 주어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결말 때문에 스토리는 다소 아쉬웠지만 미키 할러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전작이 왜 진작부터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캐릭터였다.

뭔가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인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갖추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리즈물이 가지는 한계도 조금 느껴지는 편이었다.

전작부터 미키와 함께 활약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미키를 도와주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들의 전 활약상을 모르니 읽으면서 약간 소외되는 느낌(?)을 받긴 했다.

물론 작가가 이런 독자들을 위해 작품 내에서 간략하게 정리해 서술하고 있기는 하나, 아무래도 전작을 모두 읽은 것만은 못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따라서 전작을 모두 읽었다면 나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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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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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대사를 외울 정도로 봤음에도 혼자 술 마실 때 볼 게 없다 싶으면 또 보는 그 영화의 원작이 담긴 단편집을 이제야 읽어보게 되었다.

SF, 특히 장편보다는 단편으로 굉장히 유명한 작가인데 그런 작가의 단편이 20작품이나 실려 있어서 단편집이지만 무려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를 자랑한다.

하지만 20가지의 이야기에서 각기 다른 상상력이 펼쳐지므로 살짝 무겁다는 점만 제외하면 읽는 동안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다 읽은 후 가장 먼저 든 소감은 수록작들이 상당히 괜찮아서 작가의 명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작가가 1982년에 사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품들이 최소한 40년 전 작품이라는 의미인데 그럼에도 수록된 작품들이 2023년에 읽는 사람에게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재미의 바탕은 기발한 상상력에 있었다.

냉전 시대를 살다 간 작가답게 작품의 배경으로 미-소 냉전의 연장과 그로 인한 핵전쟁 등 인류가 초래한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그러면서도 작품의 소재나 작가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작품마다 조금씩 달랐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인간은 어떻게 정의하는가?', '진화의 산물로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가 등장하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전쟁이나 기후 변화 등 우리 스스로 우리의 세계를 끝장낸다면 어떻게 될까?' 등등 SF의 단골 주제이면서 누구도 쉽게 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이는 우리가 자초한 바요. 우리가 전쟁을 일으켰고 지구를 변화시켰소.

파괴한 것이 아니라 변화시킨 거요. 너무도 달라서 스스로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pg 401, 단기 체류자의 행성 中)

"우리는 우리 진화 방향의 최종 산물인 겁니다. 공룡처럼요.

지성을 극한까지 추구한 겁니다. 어쩌면 너무 멀리까지 추구한 걸지도 모르죠.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인지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너무 많이 생각해서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pg 462, 황금 사나이 中)

고문실이나 절멸 수용소는 설득이 먹히지 않았을 때나 필요한 것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설득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공포로 다스리는 경찰국가는 전체주의의 기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에나 등장했다.

과거의 전체주의는 완벽하지 않았다.

관료 체제는 실제로 삶의 모든 측면에 간섭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소통의 방식 자체가 진보했다.

진정으로 성공적인 전체주의 국가가 바로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pg 700, 얀씨의 허울 中)

책 후미에 작가 노트가 수록되어 작품들이 처음 출간된 시기와 더불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소회도 엿볼 수 있었다.

작가가 집필하면서 어떤 고민들을 했었는지, 출간 당시에 편집자 및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었었는지도 언급되어 있어서 작품을 막 읽고 난 스스로의 감상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두 번째 변종'이라는 작품의 작가 노트에서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려고 했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언급되어 있다.

"내 본질적인 주제, 즉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으로 보이는(인간인 척하는) 것 뿐인가?'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직시해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도 확신할 수 있는

해답을 얻을 때까지, 내 생각에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중략 -

그리고 해답을 얻는 일은 정말로 힘들다."

(pg 778)

표제작을 비롯해 이미 영화로 제작된 작품들이 꽤 많은데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작품의 흐름은 영화와 상당한 차이가 난다.

개인적으로도 시대가 갖는 한계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질 설정들도 꽤 보여서 스토리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것은 아무래도 매력이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기인데 영상 통화를 하러 특정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거나 로봇들이 활개를 치는데 AI가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직업들에 인간들이 종사하는 것 등이다.

당시의 일반 대중과 현대의 일반 대중이 경험하는 과학 기술의 간극은 너무도 클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부분에 세부적으로 집착하기보다는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질문들에 집중한다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단편집을 접했으니 장편을 읽어볼 차례인 것 같다.

이미 그의 장편 대표작 중 하나가 책장에 꽂혀 있어 안심이 된다.

국내에 발간된 작품도 많아서 앞으로 작가의 책 서평을 꽤 자주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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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2 사일로 연대기
휴 하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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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총 6권으로 구성된 '사일로 연대기'라는 시리즈 소설의 첫 번째 작품이다.

직관적으로는 무슨 뜻인가 싶은 단어인데, 친숙한 의류 소재를 뜻하는 그 울이라고 보면 된다.

다 읽은 지금 생각해 보면 울이라는 소재가 작품 내용 전반을 상징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약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울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SF 소설은 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증을 유발하는 효과는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스포를 당하면 재미가 매우 반감될 것 같은 작품인지라 최대한 주의하며 작성하려 했으나, 작품의 배경이나 감상을 소개하려면 부득이 내용 이야기를 곁들이게 될 것 같으므로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 정보 없이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일단 이 작품은 세계관이 아주 매력적이었다는 언급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지표면의 환경이 생명체가 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어 '사일로'라고 하는 총 144층에 이르는 긴 원통형 모양의 지하 시설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그것도 잠시 대피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곳에서 대를 이어가며 수백 년 이상을 살아와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당 지하 시설을 벗어나지 않아도 인류가 절멸하지 않도록 심층부에는 자원 채취 및 전기 생산을 위한 기계 설비들이, 중간에는 농업 및 인류 재생산(출산 시설 및 보육원) 관련 시설들이, 상층부로 가면 통신과 보안을 담당하는 IT 부서와 시청, 보안관 등 행정 인력들이 자리하고 있다.

상층부에서는 외부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밖을 관람(?)할 수 있는데, 이 카메라가 오염 물질로 더러워지면 죽어 마땅한 범죄자들을 밖으로 내보내 이를 닦게 하는 이른바 '청소형'을 실시하고, 청소가 끝나면 외부에서 숨져 그 시신이 풍화되어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의 시야에 남아 남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소재로 활용된다.

주변의 세상은 계층화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이 보였다.

상층부는 아침 식사와 함께 즐기는 생과일주스를 당연하게 여기며,

흐려져가는 풍경을 걱정했다.

그 아래에 살면서 정원에서 일하거나 가축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은

흙과 나뭇잎과 비료로 이루어진 자기들만의 세계 주위를 돌았다.

그들에게 바깥 풍경이란 청소가 이루어질 때까지 무시해도 좋은, 지엽적인 무엇이었다.

그리고 심층부, 기계 공장과 화학 연구소, 끌어 올리는 석유와 삐걱거리는 장치들,

기름때 묻은 손톱과 힘든 일의 땀 냄새로 이루어진 실무적인 세상이 있었다.

(1권, pg 156)

특이하게도 본 1-2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 줄리엣은 1권 중반 이후에나 등장한다.

줄리엣이 작품을 이끌어가기 전 두 챕터는 홀스턴과 잔스라는 걸출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데 단순히 세계관을 이해시키기 위한 인물들 치고는 매력이 상당하다.

이 두 인물이 퇴장하게 되는 부분까지가 1권의 중반 정도에 해당되고, 여기까지 읽었다면 독자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과연 사일로 밖은 정말 위험한가?

그리고 남겨진 인류는 정말 그들뿐인가?

1권에서는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제시되면서 끝이 나는데, 이 부분 역시 반전이라면 반전있게 제시됨으로써 바로 2권을 들추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좁은 지하 공간에서 사는 그들의 삶이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저 바깥,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들은 왜 여기에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있는 걸까?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저 멀리에서 무너져가는 높은 사일로들을 지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1권, pg 189)

줄리엣은 이 폐쇄적인 사회에 작은 균열을 내고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욕구는 그 작은 균열을 통해서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진실에 대한 추구야말로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는 욕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생을, 아니 조상 대대로 속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의 분노는 막을 수 없었다.

생각만 하던 터부가 속삭임으로 이동했다.

금지된 생각들이 혀끝에서 태어나서 허공을 헤엄쳐 다녔다.

(2권, pg 81)

시리즈물이니 당연히 후속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본 작품만 놓고 볼 때 어떻게 끝나는지 상당히 궁금했는데, 스포 없이 기술하자면 이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완결성 있게 결말을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연히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도 충분했다.

마치 재밌는 마블 영화의 한 편을 본 것처럼 당연히 이어지겠구나 싶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스토리였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남은 모든 책과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도

읽을 사람이 없고 갈라진 구름 사이로 올려다볼 사람이 없으면 무의하다고 말하리라.

(2권, pg 336)

출판사의 책 소개에 보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괴물 같은 작품'이라는 다소 상투적인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 문구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스토리의 몰입도가 상당했다.

읽을 책들이 쌓이고 있는 중인데도 이 시리즈는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빨리 사게 될 것 같다.

검색을 해보니 2권짜리 프리퀄이 하나, 시퀄이 하나 해서 총 6권으로 구성되는 모양이다.

이미 미드로도 제작되었다고 하고 평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조만간 미드도 찾아보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충분히 덕질(?)할 수 있는 좋은 SF 작품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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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1 사일로 연대기
휴 하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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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총 6권으로 구성된 '사일로 연대기'라는 시리즈 소설의 첫 번째 작품이다.

직관적으로는 무슨 뜻인가 싶은 단어인데, 친숙한 의류 소재를 뜻하는 그 울이라고 보면 된다.

다 읽은 지금 생각해 보면 울이라는 소재가 작품 내용 전반을 상징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약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울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SF 소설은 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증을 유발하는 효과는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스포를 당하면 재미가 매우 반감될 것 같은 작품인지라 최대한 주의하며 작성하려 했으나, 작품의 배경이나 감상을 소개하려면 부득이 내용 이야기를 곁들이게 될 것 같으므로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 정보 없이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일단 이 작품은 세계관이 아주 매력적이었다는 언급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지표면의 환경이 생명체가 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어 '사일로'라고 하는 총 144층에 이르는 긴 원통형 모양의 지하 시설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그것도 잠시 대피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곳에서 대를 이어가며 수백 년 이상을 살아와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당 지하 시설을 벗어나지 않아도 인류가 절멸하지 않도록 심층부에는 자원 채취 및 전기 생산을 위한 기계 설비들이, 중간에는 농업 및 인류 재생산(출산 시설 및 보육원) 관련 시설들이, 상층부로 가면 통신과 보안을 담당하는 IT 부서와 시청, 보안관 등 행정 인력들이 자리하고 있다.

상층부에서는 외부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밖을 관람(?)할 수 있는데, 이 카메라가 오염 물질로 더러워지면 죽어 마땅한 범죄자들을 밖으로 내보내 이를 닦게 하는 이른바 '청소형'을 실시하고, 청소가 끝나면 외부에서 숨져 그 시신이 풍화되어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의 시야에 남아 남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소재로 활용된다.

주변의 세상은 계층화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이 보였다.

상층부는 아침 식사와 함께 즐기는 생과일주스를 당연하게 여기며,

흐려져가는 풍경을 걱정했다.

그 아래에 살면서 정원에서 일하거나 가축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은

흙과 나뭇잎과 비료로 이루어진 자기들만의 세계 주위를 돌았다.

그들에게 바깥 풍경이란 청소가 이루어질 때까지 무시해도 좋은, 지엽적인 무엇이었다.

그리고 심층부, 기계 공장과 화학 연구소, 끌어 올리는 석유와 삐걱거리는 장치들,

기름때 묻은 손톱과 힘든 일의 땀 냄새로 이루어진 실무적인 세상이 있었다.

(1권, pg 156)

특이하게도 본 1-2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 줄리엣은 1권 중반 이후에나 등장한다.

줄리엣이 작품을 이끌어가기 전 두 챕터는 홀스턴과 잔스라는 걸출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데 단순히 세계관을 이해시키기 위한 인물들 치고는 매력이 상당하다.

이 두 인물이 퇴장하게 되는 부분까지가 1권의 중반 정도에 해당되고, 여기까지 읽었다면 독자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과연 사일로 밖은 정말 위험한가?

그리고 남겨진 인류는 정말 그들뿐인가?

1권에서는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제시되면서 끝이 나는데, 이 부분 역시 반전이라면 반전있게 제시됨으로써 바로 2권을 들추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좁은 지하 공간에서 사는 그들의 삶이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저 바깥,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들은 왜 여기에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있는 걸까?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저 멀리에서 무너져가는 높은 사일로들을 지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1권, pg 189)

줄리엣은 이 폐쇄적인 사회에 작은 균열을 내고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욕구는 그 작은 균열을 통해서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진실에 대한 추구야말로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는 욕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생을, 아니 조상 대대로 속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의 분노는 막을 수 없었다.

생각만 하던 터부가 속삭임으로 이동했다.

금지된 생각들이 혀끝에서 태어나서 허공을 헤엄쳐 다녔다.

(2권, pg 81)

시리즈물이니 당연히 후속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본 작품만 놓고 볼 때 어떻게 끝나는지 상당히 궁금했는데, 스포 없이 기술하자면 이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완결성 있게 결말을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연히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도 충분했다.

마치 재밌는 마블 영화의 한 편을 본 것처럼 당연히 이어지겠구나 싶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스토리였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남은 모든 책과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도

읽을 사람이 없고 갈라진 구름 사이로 올려다볼 사람이 없으면 무의하다고 말하리라.

(2권, pg 336)

출판사의 책 소개에 보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괴물 같은 작품'이라는 다소 상투적인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 문구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스토리의 몰입도가 상당했다.

읽을 책들이 쌓이고 있는 중인데도 이 시리즈는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빨리 사게 될 것 같다.

검색을 해보니 2권짜리 프리퀄이 하나, 시퀄이 하나 해서 총 6권으로 구성되는 모양이다.

이미 미드로도 제작되었다고 하고 평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조만간 미드도 찾아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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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내 옆에 앉아! 푸른 동시놀이터 105
연필시 동인 엮음, 권현진 그림 / 푸른책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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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그림이 많은 책은 혼자서도 제법 잘 읽는 편이라 책 보는 시간이 꽤 많은데 생각해 보니 운문 쪽은 거의 읽어준 적이 없는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아이와 함께 동시를 읽어보고 싶어 접하게 되었다.



파스텔 톤의 따뜻해 보이는 표지가 예쁘다.

나온 지 20년이 넘은 책이라 하는데 세월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요즘 아이들이 보기에도 예쁜 디자인으로 새롭게 리뉴얼이 되었다.

책 안쪽에도 삽화가 꽤 많아서 아이들이 읽기에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모든 글은 읽을 때 쓴 사람의 의도를 생각해야 되지만 시는 그 중요성이 더 큰 것 같다.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그대로 풀어쓴 산문과는 달리 운문에서는 단어 하나하나에도 숨겨진 의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기보다는 구절을 곱씹고 생각하며 읽어야 제대로 된 감상이 가능하기에 산문보다 길이는 짧아도 난이도는 더 어려운 읽기가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아래의 시에서 까치가 햇살을 입에 물었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다.

햇살은 입에 물 수 있는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창한 어느 날 나무 위에서 반갑게 지저귀는 까치를 떠올린다면 해당 구절이 무슨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부분들을 부모가 읽어주면서 아이와 함께 대화를 나눠본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pg 21)

90여 페이지 정도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시라는 특성상 굉장히 많은 시가 실려 있는 편이다.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통독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 꽤 오래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지금까지 400여 편이 넘는 서평을 써왔지만 시집을 읽고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이 덕분에 시집을 읽고 감상을 남겨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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