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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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대사를 외울 정도로 봤음에도 혼자 술 마실 때 볼 게 없다 싶으면 또 보는 그 영화의 원작이 담긴 단편집을 이제야 읽어보게 되었다.

SF, 특히 장편보다는 단편으로 굉장히 유명한 작가인데 그런 작가의 단편이 20작품이나 실려 있어서 단편집이지만 무려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를 자랑한다.

하지만 20가지의 이야기에서 각기 다른 상상력이 펼쳐지므로 살짝 무겁다는 점만 제외하면 읽는 동안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다 읽은 후 가장 먼저 든 소감은 수록작들이 상당히 괜찮아서 작가의 명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작가가 1982년에 사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품들이 최소한 40년 전 작품이라는 의미인데 그럼에도 수록된 작품들이 2023년에 읽는 사람에게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재미의 바탕은 기발한 상상력에 있었다.

냉전 시대를 살다 간 작가답게 작품의 배경으로 미-소 냉전의 연장과 그로 인한 핵전쟁 등 인류가 초래한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그러면서도 작품의 소재나 작가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작품마다 조금씩 달랐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인간은 어떻게 정의하는가?', '진화의 산물로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가 등장하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전쟁이나 기후 변화 등 우리 스스로 우리의 세계를 끝장낸다면 어떻게 될까?' 등등 SF의 단골 주제이면서 누구도 쉽게 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이는 우리가 자초한 바요. 우리가 전쟁을 일으켰고 지구를 변화시켰소.

파괴한 것이 아니라 변화시킨 거요. 너무도 달라서 스스로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pg 401, 단기 체류자의 행성 中)

"우리는 우리 진화 방향의 최종 산물인 겁니다. 공룡처럼요.

지성을 극한까지 추구한 겁니다. 어쩌면 너무 멀리까지 추구한 걸지도 모르죠.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인지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너무 많이 생각해서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pg 462, 황금 사나이 中)

고문실이나 절멸 수용소는 설득이 먹히지 않았을 때나 필요한 것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설득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공포로 다스리는 경찰국가는 전체주의의 기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에나 등장했다.

과거의 전체주의는 완벽하지 않았다.

관료 체제는 실제로 삶의 모든 측면에 간섭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소통의 방식 자체가 진보했다.

진정으로 성공적인 전체주의 국가가 바로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pg 700, 얀씨의 허울 中)

책 후미에 작가 노트가 수록되어 작품들이 처음 출간된 시기와 더불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소회도 엿볼 수 있었다.

작가가 집필하면서 어떤 고민들을 했었는지, 출간 당시에 편집자 및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었었는지도 언급되어 있어서 작품을 막 읽고 난 스스로의 감상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두 번째 변종'이라는 작품의 작가 노트에서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려고 했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언급되어 있다.

"내 본질적인 주제, 즉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으로 보이는(인간인 척하는) 것 뿐인가?'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직시해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도 확신할 수 있는

해답을 얻을 때까지, 내 생각에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중략 -

그리고 해답을 얻는 일은 정말로 힘들다."

(pg 778)

표제작을 비롯해 이미 영화로 제작된 작품들이 꽤 많은데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작품의 흐름은 영화와 상당한 차이가 난다.

개인적으로도 시대가 갖는 한계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질 설정들도 꽤 보여서 스토리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것은 아무래도 매력이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기인데 영상 통화를 하러 특정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거나 로봇들이 활개를 치는데 AI가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직업들에 인간들이 종사하는 것 등이다.

당시의 일반 대중과 현대의 일반 대중이 경험하는 과학 기술의 간극은 너무도 클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부분에 세부적으로 집착하기보다는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질문들에 집중한다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단편집을 접했으니 장편을 읽어볼 차례인 것 같다.

이미 그의 장편 대표작 중 하나가 책장에 꽂혀 있어 안심이 된다.

국내에 발간된 작품도 많아서 앞으로 작가의 책 서평을 꽤 자주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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