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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나의 집
한동일 지음 / 열림원 / 2024년 9월
평점 :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해피엔딩은 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한다지만 막상 읽고 나면 '픽션이니까 이렇지. 현실이 어디 그렇게 녹록한가.'라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문학이든 영상물이든 끊임없이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생산되고 소비된다.
비극적인 인물들을 보며 내 현실보다는 낫다고 위로하기도 하고, 가상 인물들이 경험하는 극단의 좌절을 통해 세상의 모순을 관찰함으로써 개인의 불행이 온전히 개인의 잘못만은 아님을 인지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비극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다.
포문을 여는 작품부터 인생의 진한 비극을 맛볼 수 있다.
학창 시절에 교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폭력을 경험한 바 있는 한 여성이 교사가 된 후 변화된 사회의 폭력에 시달리는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이제 갓 40대의 문턱에 진입한 나 역시 학교를 다닐 때에는 손바닥이나 엉덩이를 맞는 정도의 체벌은 저학년 때부터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이제는 통제되지 않는 학생들에게 언성만 조금 높여도 소송을 당하고 유튜브에 박제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교내 폭력에 눈을 감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힘의 역학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온전한 약자가 되어버린 교사들의 처지에도 진한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표제작인 '불 꺼진 나의 집'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한 남성의 이야기다.
아내가 힘든 과정을 겪고 임신을 하지만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이야기에 그는 임신 중절을 권유한다.
하지만 끝내 아이를 낳고자 하는 아내를 말릴 수는 없었고, 결국 태어난 아이도 몇 년 만에 사망하고 만다.
그런 남편에게 질려버린 아내도 떠나버린 후 홀로 남겨지지만, 그는 끝끝내 자신의 불행함만을 인지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외로움의 형태를 맛볼 수 있었다.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냄새'라는 작품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족을 떠나 방황하다 결국 시체로 발견된다.
가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무연고자로 처리될 뻔했지만 친구에 대한 연민 때문에 자신이 장례를 떠맡게 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의 백미는 제목처럼 후각적인 상징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냄새가 가난의 상징으로 쓰였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친구가 세상을 떠난 후 남긴 냄새는 그의 외롭고 비참했던 삶을 그대로 반영하며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떠맡은 경제적 부담을 원망하던 그에게 몇 푼의 돈이 남겨지고, 그 돈을 통해 친구의 사체 냄새가 자신의 몸에도 전이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 밖에도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가 보험금이라도 아들에게 남겨주고자 죽을 방법을 모색하는 이야기인 '죽음을 맞이한 방', 자신에게 걸린 소송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이야기인 '소송' 등의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작품인 '팽팽하게 감긴 태엽'의 경우 다른 작품들과 달리 굉장히 몽환적이고 판타지스러운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개인적으로는 다른 작품들과 이질감이 커서 깊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이 책이 작가의 첫 단편집이기도 한 모양이다.
마지막 수록작을 제외하면 꽤 현실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의 작품들이라 개인적으로는 꽤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비극적인 작품을 써나갈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에 발표할 작품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