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모나 에프 그래픽 컬렉션
노엘 스티븐슨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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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감상을 남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얼굴을 마주보고 구두로 진행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오해가 발생하곤 하는데 

2차원에 적힌 글과 그림을 보고 진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인 독서가 모든 독자들에게 동일한 경험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의 감상에서도 '기대감'이라고 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책은 독특하게 내 기대감을 상회했다.

사실 표지와 책 소개를 읽고선 어린 소녀가 영웅으로 성장해가는 전형적인 판타지물이겠거니 싶어 크게 기대가 되지 않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 조금씩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접한 책인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그래픽노블이라고 굳이 장르를 붙이긴 했지만 사실 일반적인 그래픽노블에 비해 텍스트 양이 적어서 그냥 만화책이라고 불러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작품인데, 이 작품만의 독특함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흐리게 처리하였다.)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작성하려 했으나,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밝힌다.)



먼저 세계관이 좀 특이한데, 일반적인 판타지 작품들처럼 왕정 국가에 '기사'라는 계급, 마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만, 

SF 작품들처럼 기계 팔이나 총, 생체 실험과 같은 첨단 과학 산물이 공존하고 있다. 

작품의 주연급이라 할 수 있는 '발리스터 블랙하트' 역시 사고로 팔을 잃어 기계 팔을 장착한 인물로 묘사된다.


블랙하트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관계도 기존의 슈퍼히어로물과 비슷한 듯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점들이 있다.

블랙하트는 기존 히어로물의 이분법적 구분에 따르면 '빌런'에 해당한다. 

그는 '국가'와 '협회'에 대항하며 각종 테러 행각을 벌이는 인물로 묘사된다. 

국가와 협회에는 블랙하트를 막고자 하는 '암브로시우스 골든로인'이라는 인물이 있으며 그는 대중들에게 '영웅'으로 불린다. 


작품명이기도 한 '니모나'는 블랙하트 밑에 들어가 악당이 되고 싶어한다. 

니모나는 평소에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변신 능력자로, 생명체가 있는 것이면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혼자 일해온 블랙하트에게 최강의 능력을 가진 부하가 생긴 셈인데, 능력치에 비해 사고방식은 사춘기 청소년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초반에는 비교적 가볍게 둘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이 전개된다.

하지만 중반을 지나가면서 드러나는 '협회'의 정체, 블랙하트와 골든로인의 관계 등 서사가 깊어짐에 따라 점점 전통적인 선악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협회'는 절대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핵심 등장인물인 블랙하트나 골든로인, 심지어 주인공인 니모나까지도 선인과 악인으로 단순하게 구별할 수 없다. 

(협회도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일부 국가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무조건 악이라 할 수도 없다.)



또한 책의 제목이 '블랙하트'가 아니라 '니모나'라는 점도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특이하다. 

비중만 놓고 보자면 사실 두 인물이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제목이 '니모나' 인것이 특이하게 느껴진 이유는, 

블랙하트에게는 있는 '기원'의 스토리가 정작 니모나에게는 없다는 점 때문이다. 


슈퍼히어로물에 등장하는 모든 주연급 영웅과 빌런들은 각기 자신들이 왜 그 길을 가야만 했는지에 대한 기원(Origin) 스토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니모나는 그 기원이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갖게 된 힘의 근원도 모호할 뿐더러 왜 굳이 블랙하트 밑에서 일하려 했는지 그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 (단순한 흥미?)

반면 블랙하트의 동기와 기원은 비교적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제목이 '니모나'여서 좋았던 점은 캐릭터의 확장성 때문이다. 

(물론 내가 작가가 아니니 장담할 순 없지만) 장르의 특성상 얼마든지 미래에 후속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작품의 엔딩으로 미루어 볼 때 니모나는 후속 작품에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여지가 있다. 

심지어 블랙하트가 죽고 사라졌다 하더라도 니모나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들과 함께 등장할 수 있다. 

본래 캐릭터의 기원이 모호하니 어떤 맥락에서 다시 등장해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하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이 작품에서 모두 달성했기 때문에 니모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후속작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백그라운드 때문에 또 하나 걱정했던 것이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적 접근이었는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도 좋았다.

최근 일부 문화 컨텐츠들에서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중심 서사 자체를 말아먹는 실망스러운 것들이 적지 않아서 생긴 걱정이었다.

이 책도 주인공이 여성이고 퀴어 성향의 인물들도 등장한다. (스포일러라 누구라고는 쓰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설정들이 중심 서사를 망치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블랙하트의 한 쪽 팔이 기계인 것처럼 퀴어 성향도 그저 하나의 특징일 뿐이다. 

또 읽는 이에 따라서는 꼭 동성 연인이 아니라 각별한 의형제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정도로 거부감 없이 표현한 점도 좋았다. 


보통 '이 책을 읽겠다'라는 각오는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보다는 무거운 선택에 속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는 그런 선택을 보다 가볍게 해주기 때문에 쉽게 선택하는 만큼 읽기 전에 느끼는 기대감도 적은데, 

모처럼 마음에 드는 작품을 접했다. 

자칫 굉장히 유치한 흐름으로 전개될 수 있는 주제들을 흥미롭게 잘 풀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과 표현도 거칠지 않아서 어린 학생부터 어른들까지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에는 기대감이 클 것 같다. 


후속 작품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설정상 니모나의 수명이 매우 길기 때문에 오랜 세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이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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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 없는 사과사회 - 조직의 운명을 바꾸는 진짜 사과와 거짓 사과
숀 오마라.케리 쿠퍼 지음, 엄창호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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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사과할 때는 조직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예를 들어 명성이 회복되거나, 소셜미디어의 반발이 누그러지거나, 아니면 소송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g 39)



삼성 공화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얼마전 이재용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가 있었다.

사과를 하게 된 배경이나 사과의 내용이 충실히 이행될지 여부도 보다 심층적인 판단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모습 자체가 기업의 탐욕이 당연시되던 시대에서 점차 기업도 사회적인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인 시대로 

발전해가는 상징적인 지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듯 기업이 일반 대중을 향해 사과를 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자세히 관찰한 책을 만났다.

제목만 봤을 때는 뭔가 진정성있는 사과가 부족한 사회를 꼬집는 책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내용상으로는 기업의 측면에서 사과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SNS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소위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개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양한 주제로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는데 여기에는 특정 기업이나 제품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피드백들도 상당히 많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쉽고 빠르게 노출, 확산되기 때문에 기업에서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어떤 기업이나 제품을 바라보는 시각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웃어 넘길 수 있던 것들이 요즘은 '불편함'이라는 이름으로 SNS에 올라오고 사람들은 이를 공유한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이 운영하는 SNS 계정에 사과문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조직의 사과들을 분석해 효과적인 사과를 위해 조직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여러 사례와 사과 방법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기업들이 '과도한 사과'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기업들이 사소한 일에도 사과를 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저자는 이를 '사과 충동'이라고 명명했다. 

(책의 원제도 'The apology impulse'이다.)

하지만 사과에도 비용이 들며 한번 한 사과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사용하는 카드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책의 핵심 주제다.


사과할 때는 조직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예를 들어 명성이 회복되거나, 소셜미디어의 반발이 누그러지거나, 아니면 소송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g 39)


즉, 철저하게 경영적인 시각에서 조직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제대로 사과를 하라는 것이다. 

사과 역시 학습효과가 있어서 사무적이고 일상적으로 사과를 남발하게 되면 나중에 진짜 큰 사건이 터졌을 때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과를 해야 할 상황 역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운영적인 문제와 문화적인 문제를 구분하고 있다.

운영적인 문제란 열차의 지연이나 상품의 하자 같은 기업의 일상적인 수익 창출 활동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말하는데

이런 문제들은 비교적 쉽게 사과할 수 있고 처리도 쉬운 편이다.


반면에 문화적인 문제는 광고나 SNS에 특정 성별, 인종, 종교 등에 대한 비하와 같이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경우에 발생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수용하는 정도가 달라 발생하는 문제들을 말하는데 이 경우 사과의 대상을 특정하기도, 문제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물론 기업에서 명백하게 실수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악의적인 편집이나 해석을 통해 문화적인 문제를 일부러 야기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고객의 불만에 소셜미디어로 대응하는 기업은 대체로 이미지가 좋아지며 매출도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테스코의 사례처럼 어떤 조직이든 소셜미디어에 발을 담그면 사과에도 연루될 수밖에 없다. (pg 82)


2017년 한 익명의 바이럴 뉴스 저널리스트가 와이어드닷컴에 조회 수를 가장 많이 유도할 수 있는 뉴스 기사의 유형을 밝혔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싶어 하는 기사는 보통 누군가가 사회의 악에 대항해서 싸우는 유형의 기사다.

사람들은 성적인 내용의 트윗 글을 비난하는 여성이나 인종차별 발언을 한 누군가를 비난하는 유명 인사나 사기꾼에게 복수하려고 

이를 가는 사람에 관한 기사를 즐겨 읽는다. 

다시 말해 바이럴 뉴스는 분노의 대상을 공개적인 장소로 호출하는 문화를 통해 돈을 버는 '분노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아냈다. (pg 86)



이렇게 기업들에게 사과의 압박을 주는 주체는 역시나 미디어이다. 

개개인인 인플루언서들이야 아무리 자극적인 글을 올려 본 들 그들의 팔로워 정도에게만 노출될 뿐이지만,

이것이 미디어를 타기 시작하면 금새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기업의 비리처럼 뉴스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고 공개 사과가 필요한 사건을 보도하는 일과, 

고객과 기업 사이의 사소한 다툼을 부추기는 일은 다르다. 

공개 사과의 증가 현상은 후자에 속한다. 

오늘날은 사과가 뉴스거리가 되고 클릭을 유도하며 돈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사과하고 있다. 

사과를 요구하고, 제공하고, 보도하는, 삐뚤어진 동기가 너무나 강력해서 이에 저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pg 91)


미디어는 공정한 관찰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대게는 가장 먼저 만만한 희생자를 찾아내서 치명상을 입히며 어떻게든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pg 170)



이렇게 미디어는 기업들에게 사과를 강요하고 기업은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보다 여론이 나빠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므로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사과를 남발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사과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피해자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며,

기업 역시 불필요한 비용만 지출하는 꼴이 된다.

결국 이를 선동하는 미디어만 이득을 취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은 사과가 고객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비결이 아님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소셜미디어에서 조직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객이 아니다. (pg 170)


사과는 사실 피해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조직의 '청중'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청중이란 충성스러운 고객뿐 아니라 조직의 의사소통 내용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생각하는 

미디어 인플루언서와 고객이 아닌 사람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pg 207)


위기에 몰린 기업이 굽신거리며, 확인되지도 않았고 입증하기도 어려운 문화적 위기에 대해 사과하는 비용을 지불하게 되면,

경쟁사는 그 틈을 타서 성장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온라인 기반이 있고, 미디어를 통해 다른 기업을 위기에 몰아넣고 모욕을 주려는 탐욕이 있는 한 

이러한 풍토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pg 269)


미디어는 공개 사과의 유포와 취득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 교환의 오랜 통로였다.

이러한 현실을 안다면 사과가 거래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가짜도 있을 수밖에 없다. (pg 274)



그렇다면 사과가 필요할 때는 언제고 어떻게 하는 사과가 좋은 사과인 것일까?

책에서는 아래와 같은 해결책을 전해준다. 


사과는 간단해서도 안 되지만, 복잡해서도 안 된다. (중략)

사과의 핵심 기능은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해명하고, 책임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보상을 제시하고, 마지막에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 순서대로 사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pg 144)


사과 대응 계획은 복잡할 필요 없다.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때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당신의 잘못인가?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미안해해야 하는가? 사태를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pg 336)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과의 사례보다 안좋은 사과의 사례가 더 많이 등장하고 좋은 사과를 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서술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져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진정성 있는 사과가 부재한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기업의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의 사과를 다룬 책이어서 

기대한 바와는 좀 다른 책이었다. (물론 제목에 낚인 내 잘못이다.) 

그리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닌데 문장이 너무 번역투여서 쉽게 읽히는 맛도 좀 부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례들도 많고 인상적인 구절도 많았다.

기업을 운영하고 있거나 고객 불만 응대가 직업인 사람들에게는 참고할만한 좋은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또한 어떤 기업에 분노할 수는 있지만 그 분노의 해결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대체로는 그 분노를 야기한 직접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마지막 메시지도 개인적으로는 아주 의미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매뉴얼대로 수백 번쯤 사과하고 쏟아지는 분노의 댓글들을 처리하느라 허우적대면서 소비자의 불평에 대응하는 사람이,

정책을 수립하거나 광고를 승인하거나 그 불만과 관련된 제품을 고안한 사람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중략)

모든 조직의 사과 뒤에는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으로 구성된 하나의 팀이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소비자는 물론 바이럴 뉴스 미디어, 소셜미디어 업체, 커뮤니케이션 산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기억했으면 한다. (pg 378-349)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특히 조직 입장에서 여론에 몰릴 때 무작정 사과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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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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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가브리엘 :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죽는 거에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카틀린 : 그렇게 말하니까 별 매력이 없네요. 하지만 존재마다 고유한 서정성을 부여해 주는 미세한 결의 차이는 존재하죠.

케이스별로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에요. (pg 54)



이제는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있는 프랑스 작가임을 당당히 밝히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이 나왔다. 

한국 사람들이 유독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를 나 나름대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강도 높은 제도권 교육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고나 생활방식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갖도록 사회화가 되는데, 

이런 '우리'들에게는 제법 신선하게 느껴질법한 발상과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도 작가의 이름이 새겨진 신간을 만나면 늘 새로운 기대감과 함께 주저없이 받아 드는 편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매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때로는 인간보다 더 큰 존재가, 

때로는 인간보다 더 작은 존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인간을 관찰한다. 

이번 작품은 사후 세계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존재들의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한국 전통신앙의 눈으로 보면 염라대왕쯤 될테고, 서양의 시각(책에서 나오기로도)으로는 천사라고 부를 수 있겠다.


세계관은 작가의 다른 사후세계 관련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작품도 사후세계를 다루지만 절대자의 존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천사)들이 절대자의 대리임을 자각하고는 있지만 절대자와 실제로 접촉해 본 적은 없다는 걸 언급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이들은 죽은자가 천국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를 심판하지 않는다.  

심판하는 곳 자체가 천국이며 심판의 대상자가 받는 가장 심한 형벌은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동양의 윤회 사상과 서양의 사후 심판이 공존하는 세계라 할 수 있겠다.  


이 세계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총 4명이다. 

판사(가브리엘), 검사(베르트랑), 변호사(카롤린) 그리고 윤회 여부를 심판 받을 피고(아나톨). 

피고의 삶이 윤회를 마칠 정도로 충실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판사의 일이며 검사는 그렇지 않음을, 변호사는 그러함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데, 

윤회를 마칠 정도로 충실한 삶이라는 것이 단순히 '착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판의 기준이 되는 충실한 삶이란 그 이전 사람(아나톨로 태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이 의도한 바대로 사는 삶이다. 


즉, 윤회를 할 때 마치 게임에서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 하듯 성별과 국적, 장점과 단점, 가족 관계 등 어떤 삶을 살지를 세부적으로

결정하는데 이 때 너무 평온하고 윤택한 삶을 살도록 설정하면 다음에도 다시 윤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극단적인 고난과 극단적인 평온 사이를 저울질해 다음 생을 결정하는데, 

이렇게 윤회 전 자신이 결정한 삶과 얼마나 가까운 삶을 살았는지를 심판하는 것이다. 


 

(pg 128)


베르트랑 : 지나치게 평온하고 지나치게 틀에 박힌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등한시하고, 운명적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피숑 씨는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엘리자베트 루냐크의 꿈을 배신했어요.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배신한 셈이죠. (pg 133)


카롤린 :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란 뜻입니다. 외도보다 신의를, 거짓보다 진실을 택했죠. 

그리고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결과가 불확실한 예술 분야의 직업보다 진지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베르트랑 : 용기보다 비겁함을,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편안함을 택한 거죠. (중략)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일구기보다 불행을 줄이려고 애쓰죠. (pg 142)


즉 현재 우리가 공유하는 선과 악의 개념은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판사인 가브리엘은 노예상인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검사 베르트랑은 살면서 한 번도 외도를 저지른 적 없는 

충실한 남편이었음을 주장하는 아나톨에게 '바로 그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이 빛을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도 온전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베르트랑의 주장은 

정보가 차단된 개인(천사들이 가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지식이 없는)들에게는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성이나 꿈 대신 안정된 삶만을 추구하는 현상이 과연 진정으로 바람직한 일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카롤린의 주장이 설득력 없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난 '류현진이 만약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을까'를 묻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카롤린의 주장에 더 마음이 갔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번 작품은 소설이 아닌 희곡이다.

실제 프랑스에서는 이미 연극으로 공연된 바 있다고 한다.


연극의 특성 상 장소와 등장인물, 서사의 길이가 한정되어 읽기에 부담이 없는 작품이었다. 

읽는 속도에 따라 1-2시간 정도면 충분히 완독할 분량이다. 

실제 공연을 염두해 둔 영향인지 결말 역시 굉장히 속도감있게 말 그대로 '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문학 작품의 감상라는 것이 어떤 작품이든 호불호가 나뉘는 영역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호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다만 소재의 참신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작가의 희곡은 '인간'이라는 작품에 이어 두 번째로 접하게 되었다. 

특이하게도 두 작품 모두 변호인 역할을 하는 자와 검사 역할을 하는 자의 공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대립되는 두 가지 논점 모두를 균형감 있게 제시함으로써 읽은 이로 하여금 스스로의 결론을 생각해보게 만드려고 
노력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결국 작가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었을까 싶은 구절이 있어 옮겨둔다. 


가브리엘 :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죽는 거에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카틀린 : 그렇게 말하니까 별 매력이 없네요. 하지만 존재마다 고유한 서정성을 부여해 주는 미세한 결의 차이는 존재하죠.

케이스별로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에요. (pg 54)



내용 상 중요한 구절은 아니지만 요즘 시국이 이러니 가슴에 와닿는 구절도 있었다. 


베르트랑 : 난 멍청이들을 경멸해.

카롤린 :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면 멍청이야.

베르트랑 : 시대를 막론해 보편적인 멍청이들이 존재하지. 그들은 시대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 

대부분 무자각, 게다가 전염성까지 있어. 우리를 전염시켜 버리지. (pg 39)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목사를 사칭하는 누군가와 그의 추종자들이 불현듯 떠오르는 구절이었다. 

이런 시국에는 역시 누군가가 소중하게 배달해준 책을 보며 집에 콕 박혀있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또 다른 희곡 '인간' 서평 :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021203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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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들
J.moonriver 지음 / 바른북스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인상깊은 구절

내가 애써 죽으려고 하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싫어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있다.

그 시기를 일부러 앞당기지 않아도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시기는 온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살아내야 한다. (pg 232)



소설을 거의 안읽었었는데 최근에 책 자체를 잘 안읽다 보니 소설이라도 읽자 싶어서 문학작품을 자주 접하고 있다. 

(책읽기는 내 습관 중 유일하게(?) 타인에게 얘기해도 좋을 습관인데 이게 없어지면 삶을 너무 막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짧은 소설의 모음집이라 하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나 이복구의 '맨밥'처럼 굉장히 즐겁게 읽었던 책도 있었지만,

'여기 용이 있다'처럼 읽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엄청 실망했던 책도 있었다.

그래서 생소한 작가의 책을 접하는 것은 마치 소개팅에 나가는 듯 일정 정도의 긴장감을 갖게 된다. 

책을 덮은 후 다행히(?) 이 책은 전자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어봐야 2장을 넘지 않는 분량의 이야기들이 300페이지가 조금 안되는 분량에 가득 담겨 있다. 

뭔가 이렇게 소개하면 되게 잡다한 이야기들이 짧게 짧게 들어있을 것 같아 집중이 어려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쭉 읽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정서에 상당히 잘 맞는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들을 살아가면서 느낄법한 소소한 정서들을 담은 작품이 많았다.

작가 소개가 자세하지 않아서 상세한 이력이나 연령대는 모르지만,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날 것 같지 않은 한국인 여성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각각의 작품마다 남녀노소가 바뀌기는 하지만 뭔가 인상적인 작품들은 대체로 젊은 여성 화자였다. 

특히 아래의 글은 오로지 한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사람들만이 제대로 공감할 수 있는 재미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g 58)


읽다보면 누가 읽어도 허구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마치 블로그에 그 날의 일기를 남긴 듯한 이야기도 많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최근에 아버지를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서로 연관성 없이 나열되는 짧은 이야기들 속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제법 된다.

물론 소설이라 했으니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영했을 것 같진 않지만, 공통되는 주제가 별로 없는 이야기들 속에

공통된 주제를 가진 이야기들이 여러편 존재하면 그 인상이 크게 박혀서 그런 모양이다. 

(멀쩡히 살아계시다면 작가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pg 53)


엄청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겪거나 들어봤을 법한, 

혹은 공상이라도 해봤을 법한 생각들이 꽤 많이 담겨있다. 

누구나 한번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이 부모를 닮아간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위 이야기를 읽고서는 언젠가 자다 옆을 돌아봤는데 장모님이 누워 계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집사람이 장모님과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날 이후로는 볼 때마다 닮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뭔가 우리 삶과 밀접한 주제들이 많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친숙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게 읽은 책이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출퇴근 길에 읽으면 딱 좋을 책이다.(특히 퇴근길)

작품들의 분량이 책 제목처럼 진짜 짧은 편이라 부담이 없는 반면에, 잊고 있었던 자신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알고 있던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했다. 


다만 뭔가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인상적인 구절이 없는 편이라 다소 아쉬웠다. 

우리 삶과 밀접한 주제들로 친숙하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 때문에 문장에 힘이 많이 안들어가서 그랬을 수 있겠다 싶다.

아름다운 문장이나 톡톡튀는 상상력이 돋보이진 않지만 뭔가 아는 지인이 '재밌는 얘기 해줄까?'라며 들려주는 듯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여서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여하간 작가가 처음 쓴 책으로 보이는데, 앞으로 어떤 글을 써가게 될지 궁금해지는 작가를 하나 더 알게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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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시대, 인간의 일 -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들을 위한 안내서, 개정증보판
구본권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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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로봇 시대가 던지는 질문들은 결국, 진짜 중요한 문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책은 로봇 시대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진짜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작은 실마리가 되고자 할 따름이다. (pg 27)



사실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체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된 일처럼 느껴진다.

견학이 가능한 공장을 가보면 이미 사람보다 로봇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학 시절에 KT&G 공장 견학을 한 적이 있었는데 휴게실 정수기 종이컵 칸에 담배가 담겨 있던 것과 더불어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그 큰 공장에 사람이 이렇게 적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 기억도 벌써 10년 전 기억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로봇'이란 산순히 생산공정의 일부를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좀 더 책 내용을 잘 표현하려면 지금 제목 대신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여하간 인간이 가진 물리적인 힘을 대체하는 로봇은 이미 널리 쓰여지고 있고, 생산직 노동력의 상당부분을 대체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고유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지각 능력과 판단 능력까지도 대체할 수 있는 로봇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내 직장(혹은 직업)은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 이후의 세대들은 어떤 일을 하며 살게 될까? 

이런 궁금증들을 안고 책을 읽어 나갔다.


물론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 TV 시장이 사라질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여전히 대형 디스플레이에 대한 수요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방송국'이라고 하는 초대형 컨텐츠 메이커 시장이 작은 규모의 개인방송 시장과 실시간 스트리밍 시장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처럼 지금의 현상을 잘 분석한다고 해서 미래도 잘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 책 역시 '앞으로 이런이런 일은 인공지능이 있어도 안전할 것이다'라는 식의 섣부른 미래 전망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다만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했고 앞으로 이 정도까지는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는 일 중 

이런저런 부분까지는 대체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도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에이, 별 것 없겠네' 싶을 수 있겠지만 상당히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읽는 이로 하여금 나름대로 미래를 예측해보게 하는

유의미한 질문들도 많이 던져주고 있다.


일례로 대학에서 월급을 받는 자로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역시나 대학에 관련된 챕터였다.

IT인프라가 발달하면서 MOOC니 Flipped Learning이니 하며 대학 강의실에도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 추세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상당히 속도감 있게 현실화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들은 이제 싫어도 할 수 없이 온라인 강좌를 만들어 제공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대학이 갖는 존재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과연 대학이 학위를 판매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는가?

왜 우리는 대학을 가기 위해 노력하며, 왜 자식들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돈을 쏟아 붓고 있는가?


물론 대학 졸업장이 갖는 서열적 의미가 갈수록 퇴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게다가 작가는 대학이 졸업장 장사 외에도 인간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제공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비단 강의실에서의 수업만이 아니라 동료나 선후배와의 토론, 전문 장비를 이용한 실험실습, 공동 프로젝트, 인턴십, 자원봉사, 

외국 유학 등은 실제 대학교육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온라인을 통해서 대부분의 활동과 관계가 가능해진 현실에서 대학은 교수와 학생들이 실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댄 채

공동의 주제를 논의하고 모색하는 시간과 공간이 된다.


대학은 특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호기심 강한 동년배 집단을 강의실과 실험실, 커뮤니티를 통해서 만나게 하는, 

대체 불가능한 공간이자 제도라는 특성을 지닌다. 

온라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거꾸로 오프라인에서 면대면 만남과 몰입이라는 

희소해진 경험을 제공하는 기능도 주목받는다. (pg 104)


최근 대학들에서 온라인으로 수업과 시험을 진행한 결과를 찾아보자. 

학생들은 충분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교수자들도 학생과의 소통이 없는 정보전달은 유부브와 다를 바 없다고 불평하며,

시험에서는 각종 IT 장비를 활용한 대규모 부정행위가 발생해 교육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물론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임시적 성격의 온라인 캠퍼스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보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책에서는 로봇이라는 기계가, 그것도 인공지능이라는 막강한 무기를 지닌 채 인간 사회에 빠르게 뿌리내릴 때

우리 인간들은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로봇 시대가 던지는 질문들은 결국, 진짜 중요한 문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책은 로봇 시대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진짜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작은 실마리가 되고자 할 따름이다. (pg 27)


언어는 주소를 기억하거나 길을 찾는 것처럼 외부저장장치 또는 외부연산장치로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이 아니다.

우리에게 판단의 토대가 되어주는 모든 표현과 소통이 이뤄지는 '궁극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에게 언어는 아웃소싱할 수 없는 최후의 기능이다. (pg 85)


외뇌 시대에 어떻게 새로운 방법으로 외국어를 익힐 것인가라는 물음은 필연적으로 학습의 본질과 삶의 목표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어떤 기능까지 외부에 의존할 것인가.

내가 직접 배워서 몸에 지녀야 할 기능은 무엇인가. (pg 87)


사실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트렌드가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에게도 느껴지기 시작하면

각 개인은 그 트렌드를 주도하는 분야로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가장 유리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로봇과 인공지능을 둘러싼 분야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매우 유망한 분야가 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공지능과는 전혀 무관한 인문사회학(특히 철학)이 최근에 다시 주목받는 것도 사실이다. 


인공지능을 통제하는 것이 과학자들과 입법가의 과제라면 생각하는 기계의 등장이 각 개인에게 던지는 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특징과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철학적인 질문이다. (pg 274)


앞으로 로봇과 인공지능은 매우 빠른 변화를 거치며 우리 삶에 녹아들 것이다. 

스스로 작곡하고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스스로 기사와 소설까지 쓰는 AI가 우리 눈 앞에 있다.

스스로 인식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을 때 과연 우리는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이 몇 십년 전 아이작 아시모프가 주장한 로봇 3원칙으로 간단히 정리될 리 만무하다. (물론 매우 잘 만들어진 원칙이지만)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사회학적 가치로 무장한 인간이 아닐까.


바야흐로 공학의 시대가 왔다.

기초교육으로 코딩이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사람은 틀딱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공학도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책을 통해 역설적으로 공학 이외의 학문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각 개인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작가가 서두에 한 이야기처럼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작업을 기계와 알고리즘에 위임하는 상황에서 주요하게 고려되는 작업자의 자질은 인간적인 덕목일 것이다.

사람의 노동을 로봇이 하게 되면, 우리가 사람에게 무엇을 가장 기대하는지가 드러난다.

함께 일하고 싶은 '좋은 동료'로서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pg 161)


약 400페이지 정도로 얇지 않은 책이지만 총 12개의 짧은 챕터들로 나누어 서술되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번에 증보판으로 나오면서 비교적 최신 사례들도 수록하고 있어 읽기에 몰입감도 좋았다.

아주 쉬운 서술은 아니지만, 중고등학생과 성인 모두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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