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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나 ㅣ 에프 그래픽 컬렉션
노엘 스티븐슨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20년 9월
평점 :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얼굴을 마주보고 구두로 진행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오해가 발생하곤 하는데
2차원에 적힌 글과 그림을 보고 진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인 독서가 모든 독자들에게 동일한 경험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의 감상에서도 '기대감'이라고 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책은 독특하게 내 기대감을 상회했다.
사실 표지와 책 소개를 읽고선 어린 소녀가 영웅으로 성장해가는 전형적인 판타지물이겠거니 싶어 크게 기대가 되지 않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 조금씩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접한 책인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그래픽노블이라고 굳이 장르를 붙이긴 했지만 사실 일반적인 그래픽노블에 비해 텍스트 양이 적어서 그냥 만화책이라고 불러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작품인데, 이 작품만의 독특함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흐리게 처리하였다.)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작성하려 했으나,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밝힌다.)
먼저 세계관이 좀 특이한데, 일반적인 판타지 작품들처럼 왕정 국가에 '기사'라는 계급, 마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만,
SF 작품들처럼 기계 팔이나 총, 생체 실험과 같은 첨단 과학 산물이 공존하고 있다.
작품의 주연급이라 할 수 있는 '발리스터 블랙하트' 역시 사고로 팔을 잃어 기계 팔을 장착한 인물로 묘사된다.
블랙하트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관계도 기존의 슈퍼히어로물과 비슷한 듯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점들이 있다.
블랙하트는 기존 히어로물의 이분법적 구분에 따르면 '빌런'에 해당한다.
그는 '국가'와 '협회'에 대항하며 각종 테러 행각을 벌이는 인물로 묘사된다.
국가와 협회에는 블랙하트를 막고자 하는 '암브로시우스 골든로인'이라는 인물이 있으며 그는 대중들에게 '영웅'으로 불린다.
작품명이기도 한 '니모나'는 블랙하트 밑에 들어가 악당이 되고 싶어한다.
니모나는 평소에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변신 능력자로, 생명체가 있는 것이면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혼자 일해온 블랙하트에게 최강의 능력을 가진 부하가 생긴 셈인데, 능력치에 비해 사고방식은 사춘기 청소년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초반에는 비교적 가볍게 둘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이 전개된다.
하지만 중반을 지나가면서 드러나는 '협회'의 정체, 블랙하트와 골든로인의 관계 등 서사가 깊어짐에 따라 점점 전통적인 선악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협회'는 절대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핵심 등장인물인 블랙하트나 골든로인, 심지어 주인공인 니모나까지도 선인과 악인으로 단순하게 구별할 수 없다.
(협회도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일부 국가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무조건 악이라 할 수도 없다.)
또한 책의 제목이 '블랙하트'가 아니라 '니모나'라는 점도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특이하다.
비중만 놓고 보자면 사실 두 인물이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제목이 '니모나' 인것이 특이하게 느껴진 이유는,
블랙하트에게는 있는 '기원'의 스토리가 정작 니모나에게는 없다는 점 때문이다.
슈퍼히어로물에 등장하는 모든 주연급 영웅과 빌런들은 각기 자신들이 왜 그 길을 가야만 했는지에 대한 기원(Origin) 스토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니모나는 그 기원이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갖게 된 힘의 근원도 모호할 뿐더러 왜 굳이 블랙하트 밑에서 일하려 했는지 그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 (단순한 흥미?)
반면 블랙하트의 동기와 기원은 비교적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제목이 '니모나'여서 좋았던 점은 캐릭터의 확장성 때문이다.
(물론 내가 작가가 아니니 장담할 순 없지만) 장르의 특성상 얼마든지 미래에 후속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작품의 엔딩으로 미루어 볼 때 니모나는 후속 작품에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여지가 있다.
심지어 블랙하트가 죽고 사라졌다 하더라도 니모나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들과 함께 등장할 수 있다.
본래 캐릭터의 기원이 모호하니 어떤 맥락에서 다시 등장해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하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이 작품에서 모두 달성했기 때문에 니모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후속작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백그라운드 때문에 또 하나 걱정했던 것이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적 접근이었는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도 좋았다.
최근 일부 문화 컨텐츠들에서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중심 서사 자체를 말아먹는 실망스러운 것들이 적지 않아서 생긴 걱정이었다.
이 책도 주인공이 여성이고 퀴어 성향의 인물들도 등장한다. (스포일러라 누구라고는 쓰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설정들이 중심 서사를 망치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블랙하트의 한 쪽 팔이 기계인 것처럼 퀴어 성향도 그저 하나의 특징일 뿐이다.
또 읽는 이에 따라서는 꼭 동성 연인이 아니라 각별한 의형제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정도로 거부감 없이 표현한 점도 좋았다.
보통 '이 책을 읽겠다'라는 각오는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보다는 무거운 선택에 속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는 그런 선택을 보다 가볍게 해주기 때문에 쉽게 선택하는 만큼 읽기 전에 느끼는 기대감도 적은데,
모처럼 마음에 드는 작품을 접했다.
자칫 굉장히 유치한 흐름으로 전개될 수 있는 주제들을 흥미롭게 잘 풀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과 표현도 거칠지 않아서 어린 학생부터 어른들까지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에는 기대감이 클 것 같다.
후속 작품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설정상 니모나의 수명이 매우 길기 때문에 오랜 세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이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