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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평점 :
보통 500페이지는 우습게 넘길 정도로 벽돌 같은 작품만 내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매력에 빠져 금세 책장을 넘기게 되는 피에르 르메트르의 최신작이다.
저자는 '재앙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3부작(오르부아르, 화재의 색, 우리 슬픔의 거울)을 통해 2차 세계대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냈고, 전쟁이 끝난 후의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4부작을 예고했다.
이 작품이 그 새로운 4부작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전쟁 후 레바논 베이루트 지역에서 비누 공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한 가족의 이야기다.
부모와 4남매로 이루어진 가족인데 뚱뚱한 장남과 그의 아내, 언론인을 꿈꾸는 둘째 아들, 성소수자인 셋째 아들, 셋째 오빠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막내딸이 있다.
성공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 첫째 내외와 둘째는 파리로 떠나고, 셋째는 베트남의 외인부대로 전쟁터에 나간 연인을 찾아 사이공으로 떠난다.
첫째는 살면서 모든 일에 실패를 거듭하며 결혼조차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하고 만다.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이 생겨 가끔 사람을 충동적으로 죽여 버린다.
다행히(?) 꼬리를 잡히지 않고 지내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그가 저지른 살인사건 현장을 둘째가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면서 둘째는 언론인으로서의 성공 가도를 달리고, 첫째는 극한의 초조함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사랑을 찾아 떠난 셋째는 자신의 연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실의에 빠져 아편에 중독되고 만다.
여기까지가 대략 중반 정도까지의 스토리다.
이후로는 셋째가 국가적 규모의 스캔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위험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서 굉장히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는데, 스포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자면 '재앙의 아이들' 시리즈의 인물 중 하나가 등장한다.
갑자기 그 이름이 등장했을 때는 정말 반갑기도 하고, 이렇게 치밀하게 스토리를 짠 저자에게 새삼 놀라기도 했다.
가족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따뜻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저자의 스타일 대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심지어 꽤 잔혹하게 죽는 편이다.) 음모와 속임수가 판을 치며 그 안에 저자 특유의 해학도 숨어 있다. (제목부터가 굉장한 반어법이다.)
역시나 읽는 재미는 탁월했고, 마지막 결말까지도 긴 여운이 남았다.
저자의 작품들이 대체로 평범한 해피 엔딩을 보여주지는 않는 편인데, 이 작품 역시 모든 인물들이 아주 해피한 결과를 맞지는 않는다.
특히 연쇄 살인마에 지나지 않는 첫째는 끝까지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 심지어는 그냥 잡혀가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결말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후반에 드러나는 반전 때문에라도 '재앙의 아이들' 3부작을 모두 읽은 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읽지 않았어도 작품 내에서 다 설명해 주기는 하나, 반전이 밝혀졌을 때 느껴질 짜릿함의 강도가 꽤나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반전 때문에 세 작품 중 하나는 읽을 필요가 없어지는데 그러기엔 3부작이 모두 상당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어서 놓치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70을 훌쩍 넘긴 고령의 작가인데, 시작이 늦었던 만큼 그의 창작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모양이다.
전후 프랑스 사회라는 생소한 배경이었지만 당시의 역사적인 사건도 꽤 상세히 알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꽤나 재미있는 스토리를 엮어내서 책을 덮은 후 이 책으로 시작될 새로운 4부작도 기대가 되었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다음 작품이 발간되었다고 하니 국내에도 조만간 소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