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킹버드 월터 테비스 시리즈
월터 테비스 지음, 나현진 옮김 / 어느날갑자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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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던 중 불현듯 학창 시절에 문학을 읽어야 할 이유를 배웠던 기억이 났다.

다른 이유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단 하나의 이유가 기억에 남는데, 바로 '즐거움'을 준다는 이유였다.

책이 사라져가는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한참 되었지만 '읽기'라는 행위가 주는 원초적인 즐거움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뜬금없이 문학의 즐거움을 이야기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읽기'라는 행위 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가 1980년대였는데, 극한의 개인주의를 향해 치닫는 현대의 우리 사회 모습이 지속된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를 제대로 상상하고 있는 작품이다.

본 작품의 세계에서는 로봇 기술 발달이 극에 달해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로봇까지 제작하기에 이른다.

'메이크'라는 시리즈 이름에 넘버링이 붙어 얼마나 발전된 로봇인지를 모델명으로 알 수 있는데, 그중 '메이크 나인' 모델인 '스포포스'라는 로봇이 작품의 시작을 연다.

그는 설정상 가장 발전된 형태의 로봇이며, 로봇이 인간과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되자 자신의 동력을 끊거나 핵심 부속을 파괴하는 일이 발생하여 스스로는 죽을 수도 없게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역할을 도맡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로봇이 세상에 등장하자 진짜 인간들은 마약과 안정제를 공급받으며 마치 사육되듯, 그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도 해방되며 심지어는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와 사유의 괴로움마저 거세된 채 살아가고 있다.

마약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표현할 수 없는 허기를 느끼는 자들은 심지어 분신이라는 행위를 통해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 사회에 어느 날 스스로 읽기를 깨친 '벤틀리'라는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아내고 있다.

나는 읽기 위해서 글을 쓴다.

읽기는 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기묘하고 신이 나는 어떤 감정을 일깨운다.

(pg 128)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끊임없이 언어를 흡수하듯 그는 글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세뇌된 사회에 저항하며 한 동물원에서 노숙자처럼 살아가던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 둘은 끝없는 읽기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읽기는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교묘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공유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심각한 개인 영역 침범에 해당되며 3세대와 4세대, 5세대 헌법을 직접 위반합니다.

읽기 교육도 마찬가지로 개인 영역과 인격 보호에 반하는 범죄입니다.

(pg 158)

무언가 계속 고장 나기만 하는 세상을 끝없이 고쳐야만 하는 '스포포스'는 죽음을 꿈꾸지만 그 스스로는 결코 그 꿈에 다다를 수 없다.

제목인 '모킹버드'는 다른 동물의 울음을 따라 하는 '흉내지빠귀'라는 새인데, 제목처럼 그는 능력 면에서는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었을지 모르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인간 대체품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이 영원한 사유의 고통에 시달리는 로봇과 이제 막 사유의 즐거움을 깨달아버린 인간이 보여주는 갈등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라는 작품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에서 쇠퇴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이 작품 속 사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즉 인간은 사유를 포기하고 로봇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하게 되자, 그 로봇이 고장 났을 때 고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인간이 남아있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로봇을 고치는 로봇이 필요해지고, 그 로봇을 고치는 로봇을 고칠 또 다른 로봇이 필요해지는 무한궤도의 사회가 이어지다가 결국엔 그 궤도가 어디서부턴가 끊기기 시작한 사회라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모든 것이 로봇이지만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 사회에서 오직 인간이 살아갈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포포스'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곧 인간을 천천히 절멸의 길로 이끌게 된다.

하지만 글을 배운 유일한 인류인 두 사람이 그 길에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다.

"이 하늘 아래에서 대체 나는 뭘까?" 목소리가 대답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냥 당신 자신입니다." 목소리가 기분 좋게 말했다.

"당신은 성인 남자고 인간입니다. 사랑에 빠졌고, 행복해지길 원하고 있죠.

당신은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pg 413-414)

개인적으로 두 번째 읽은 저자의 작품인데, 먼저 읽었던 '지구에 떨어진 남자'가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라면 이 작품에는 꿈과 희망이 모두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400페이지 중반 정도의 길이로 이 작품이 더 긴 편인데 오히려 읽는 데에는 시간이 덜 걸린 것 같고 읽고 나서 느껴지는 감정도 훨씬 긍정적이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재미의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했다.)

꽤나 오래된 작품임에도 그가 보여주는 미래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와 꽤 가까운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태여 약물 따위를 이용하지 않아도 점점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하는 대신 영상이 사유를 집어넣어 주기를 바라며,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에서는 스스로 출산을 통제하며 절멸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단편적인 사실들만 들여다보아도 그렇다.

물론 조금만 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류와 비슷한 AI가 탄생할 시점은 아직도 멀었고, 또 그런 AI를 구태여 인간형 로봇에 탑재할 이유도 마땅히 없기 때문에 인류의 미래가 그렇게까지 어두워지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주제를 던져 주기에는 충분했으며, 또한 그저 '재미'를 위한 '읽기'를 위해서는 매우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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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떨어진 남자 월터 테비스 시리즈
월터 테비스 지음, 나현진 옮김 / 어느날갑자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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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이미 넷플릭스 드라마로 유명한 '퀸즈 갬빗'의 저자라고 한다.

그 인기에 힘입어서인지 시리즈로 그의 저작이 몇 권 출간되어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SF 작품들만 골라 읽어보게 되었다.

제목조차 너무도 SF스러운 '지구에 떨어진 남자', 말 그대로 지구에 도착한 한 외계인의 이야기다.

작품의 화자는 '안테아'라는 행성에서 온 '뉴턴'이라는 남성 외계인이다.

그의 모행성은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지만 거듭되는 전쟁으로 행성은 황폐화되고 급기야 그의 종족은 생존자 300명 수준으로 멸종 직전에 이른다.

단 한 명 만을 외부에 보낼 수 있는 연료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뉴턴'을 지구로 보내 자신들을 한 명이라도 더 지구로 데려올 수 있도록 지구의 기술력을 발달시키는 임무를 부여한다.

이 작품이 1960년대 초반에 나왔으므로 배경 설정 자체는 꽤나 상투적인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개는 꽤 참신한 편인데, 일단 과학의 발전이 더 월등한 외계 종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와 지구를 정복하기 위한 대규모 침략을 그리고 있지 않다는 점부터가 특이하다.

그가 선택한 가명처럼 지구에 도착한 뉴턴은 높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여러 발명품들을 만드는데, 이 물건들은 지구인의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만한 것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발명이 곧 그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다 주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그의 종족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지만 그의 의도는 꽤 평화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이 넓은 행성에 본인이 곧 종족의 유일한 개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는 인류의 예술, 사회, 경제, 과학, 문화 등을 공부하며 인류를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개와 오래 살아서 개처럼 4족으로 뛰는 여성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여성이 진짜 '개처럼'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역시 술에 의존하면서까지 인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치 수학에서 1과 무한히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결코 1은 될 수 없는 무한소수를 보는 것처럼 그의 노력이 인간에게 와닿지는 못한다.

"당신은 인간입니까?" 그가 물었다.

뉴턴의 술잔이 반쯤 비었다. "그건 정의의 문제입니다." 그가 내뱉었다.

"어쨌든 지금 전 충분히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pg 221)

그의 변장이 언제까지고 밝혀지지 않을 수는 없었고, 일부 인간들이 그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에서 종종 관찰할 수 있었듯 우리는 합의된 의견을 가질 수 없고 때문에 그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두고 각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계산들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행정적 실수로 그는 급기야 실명에 이르고 만다.

화자가 선인이었던 만큼 꽤 씁쓸함이 맴도는 결말을 보여준다.

외계인마저도 알코올 중독 앞에서는 장사 없다는 무서운 사실도 곁가지로 전해주면서 말이다.

사실 착한 외계인이 등장하는데 결말 역시 착하게 끝나면 결코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술에 찌든 채 넋두리를 내뱉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배타적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당신들이 지구의 문명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인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 거란 말을 이제 알아듣겠습니까?

강의 물고기들과 나무의 다람쥐들, 수많은 새와 토양, 물까지 전부를요.

가끔 당신들을 보면, 박물관에서 풀려난 유인원이 칼을 들고서

캔버스를 쫙쫙 그어 버리고 망치로 조각상을 부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pg 238)

총 300페이지가 살짝 넘는 두께로 금방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상상력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데이빗 보위'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고, 최근에 미드로 새롭게 제작된 적도 있다고 한다.

전자는 70년대에 나온 작품이어서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보면 원작의 감동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후자는 소재만 차용했을 뿐 내용은 전혀 다른 것 같아 별 기대가 안된다.

좋은 소재와 줄거리를 가진 작품이어서 원작 내용에 충실한 영상으로 리메이크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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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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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필생의 역작이자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예전에 영화로 봤던 기억이 있어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었는데, 우연찮게 책을 입수하게 되어 읽어보게 되었다.

영화로 봤었다고는 하지만 워낙 옛날 일이라 당시 한참 전성기였던 '히로스에 료코'의 눈부신 미모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어서 처음부터 몰입해 읽을 수 있었다.

스토리는 익히 알려진 바대로 한 어머니의 영혼이 딸의 육체로 들어가게 되는 신비한 현상을 상상한 작품이다.

화자는 '헤이스케'라는 남성으로 그의 아내와 초등학생 딸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아내는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모든 상처를 뒤집어쓰고, 딸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눈을 뜬 딸의 몸에는 아내의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초등학생의 몸에 들어간 삼십 대 여성이며 한 남자의 아내이자 딸인 기묘한 상태로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는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간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남녀 간의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정신적인 측면이 사랑에서 더 중요한 부분이라면 그들은 딸을 잃었다는 슬픔 외에는 평범한 부부처럼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정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측면에서도 서로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맺어져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에 몸에 들어간 아내를 탐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힘들어한다.

또한 고등학생이 되어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고자 노력하는 아내에게 불같은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그 때문에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그래서 더 괴로워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딸의 의식이 돌아오고 딸과 아내가 번갈아 한 육체를 오가다 마지막에는 그 유명한 반전으로 끝이 난다. (개인적으로 스포를 싫어하기도 하고 이 반전에 대한 부분은 나무위키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궁금하면 그쪽을 참고하기 바란다.)

제목이 '비밀'인 이유도 물론 이 기묘한 관계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기도 하겠으나, 이 반전이야말로 진짜 비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손을 잡자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보,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를 잊지 마세요."

나오코. 그는 다시 한번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pg 462)

저자 스스로도 자신이 쓴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수작이라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작품인데, 읽고 나니 과연 그러할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을 일이기는 하나, 만약 그런 일이 나에게 발생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가만히 고민해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물론 유물론적인 입장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육체와는 별개로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적어도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바람은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것 같다.

유부남이면서 딸을 키우는 아버지이기도 하기에 작품에 상당히 몰입할 수 있었는데, 가족을 잃는다는 상상 따윈 하고 싶지 않기에 그들이 온전한 육체와 정신으로 오늘도 건강하게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러운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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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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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저자의 책을 몇 권째 읽었는지 세는 것을 포기했다.

최고의 작가라고 부른다면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최고의 다작 작가라고 하면 그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작품은 제목을 비웃기라도 하듯 눈도, 외따로 떨어지지도 않은 산장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특이하게도 천재지변이나 지리적 여건으로 조성된 밀실이 아닌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설정한 상황들 때문에 언제든 나갈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 갇히게 된다.

처음에는 누구 하나 추리극의 등장인물에 몰입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다들 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pg 203)

작품에서는 남자 넷, 여자 셋 총 7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두 연극배우로 유명 감독의 작품이라 다들 치열한 오디션을 뚫고 합격했다.

이 중 나머지 여섯은 같은 극단 출신이어서 서로 안면이 있는 반면, '구가'라는 인물만이 외부 출신이다.

당연히 외부인이 단 한 명이라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므로 초반부터 구가의 독백이 있어서 전지적 시점과 구가의 시점을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인물들은 비밀리에 한 장소에 모일 것을 지시받고, 총 3박 4일을 머물러야 한다.

그들은 산장에서 모의 연극 스토리를 위한 가상의 사건들이 벌어질 것이라 예고 받는다.

언제든 외부에 연락하거나 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오디션 합격은 취소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틀 밤에 걸쳐 두 명의 인물이 사라지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 상황이 연극인지 진짜 살인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 모든 인물들은 마치 마피아 게임을 하듯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누가 범인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이 기막힌 상황 속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두뇌 게임이 진행되는 이야기다.

설정은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결말이 다소 싱겁게 느껴질 수 있다.

작가의 평소 스타일대로 중간중간 힌트를 흘려주는데 이번 작품은 그게 좀 과했던 건지, 내가 그의 스타일에 익숙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어떤 결말일지 예상이 되는 전개였다.

하지만 살인과 시체가 난무하는 그의 미스터리 작품답지 않게 따뜻한 결말을 보여주니 읽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워낙 작품 수가 많아 인상적인 작품의 수는 그리 많지 않게 느껴지고 이 작품 역시 명작 반열에 오르기는 힘들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가볍게 읽기엔 제격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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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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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500페이지는 우습게 넘길 정도로 벽돌 같은 작품만 내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매력에 빠져 금세 책장을 넘기게 되는 피에르 르메트르의 최신작이다.

저자는 '재앙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3부작(오르부아르, 화재의 색, 우리 슬픔의 거울)을 통해 2차 세계대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냈고, 전쟁이 끝난 후의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4부작을 예고했다.

이 작품이 그 새로운 4부작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전쟁 후 레바논 베이루트 지역에서 비누 공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한 가족의 이야기다.

부모와 4남매로 이루어진 가족인데 뚱뚱한 장남과 그의 아내, 언론인을 꿈꾸는 둘째 아들, 성소수자인 셋째 아들, 셋째 오빠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막내딸이 있다.

성공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 첫째 내외와 둘째는 파리로 떠나고, 셋째는 베트남의 외인부대로 전쟁터에 나간 연인을 찾아 사이공으로 떠난다.

첫째는 살면서 모든 일에 실패를 거듭하며 결혼조차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하고 만다.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이 생겨 가끔 사람을 충동적으로 죽여 버린다.

다행히(?) 꼬리를 잡히지 않고 지내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그가 저지른 살인사건 현장을 둘째가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면서 둘째는 언론인으로서의 성공 가도를 달리고, 첫째는 극한의 초조함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사랑을 찾아 떠난 셋째는 자신의 연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실의에 빠져 아편에 중독되고 만다.

여기까지가 대략 중반 정도까지의 스토리다.

이후로는 셋째가 국가적 규모의 스캔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위험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서 굉장히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는데, 스포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자면 '재앙의 아이들' 시리즈의 인물 중 하나가 등장한다.

갑자기 그 이름이 등장했을 때는 정말 반갑기도 하고, 이렇게 치밀하게 스토리를 짠 저자에게 새삼 놀라기도 했다.

가족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따뜻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저자의 스타일 대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심지어 꽤 잔혹하게 죽는 편이다.) 음모와 속임수가 판을 치며 그 안에 저자 특유의 해학도 숨어 있다. (제목부터가 굉장한 반어법이다.)

역시나 읽는 재미는 탁월했고, 마지막 결말까지도 긴 여운이 남았다.

저자의 작품들이 대체로 평범한 해피 엔딩을 보여주지는 않는 편인데, 이 작품 역시 모든 인물들이 아주 해피한 결과를 맞지는 않는다.

특히 연쇄 살인마에 지나지 않는 첫째는 끝까지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 심지어는 그냥 잡혀가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결말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후반에 드러나는 반전 때문에라도 '재앙의 아이들' 3부작을 모두 읽은 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읽지 않았어도 작품 내에서 다 설명해 주기는 하나, 반전이 밝혀졌을 때 느껴질 짜릿함의 강도가 꽤나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반전 때문에 세 작품 중 하나는 읽을 필요가 없어지는데 그러기엔 3부작이 모두 상당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어서 놓치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70을 훌쩍 넘긴 고령의 작가인데, 시작이 늦었던 만큼 그의 창작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모양이다.

전후 프랑스 사회라는 생소한 배경이었지만 당시의 역사적인 사건도 꽤 상세히 알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꽤나 재미있는 스토리를 엮어내서 책을 덮은 후 이 책으로 시작될 새로운 4부작도 기대가 되었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다음 작품이 발간되었다고 하니 국내에도 조만간 소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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